소설리스트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151화 (151/424)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7권 1화

1. 거장과의 합주.

누군가는 CG라고 펌하했다.

또 누군가는 디지털 성형이라고 깎아내렸다.

하지만, 아니었다.

진호는 살아서 움직이는 진짜 사람이었다.

늦은 아침, 쓰레기 장 앞에 모이는 주부들의 대화 주제가 바뀌었다.

도쿄의 어느 카페.

다리를 꼬고 앉은 진호가 목을 좌우로 꺾으며 어깨를 주물렀다.

그 주위엔 몇 대의 카메라와 조명 기구가 설치되고 있다.

일본에서 소화해야 할 스케줄 중 하나인 예능 프로그램이다.

어제 500명을 대상으로 한 허그회.

495명이 여자라서 그런지 마사지를 받았어도 허리를 비롯한 전신이 뻐근했다. 남성의 본능을 제어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진호는 맞은편에 앉아 전화를 하고 있는 다미앙을 보았다.

"네. 수고하십시오."

"무슨 전화예요?"

"정 대리가 2기 연습생들과 함께 귀국했다는군요."

"그래요?"

콘서트 패션쇼 이후 2기 연습생들은 중국에서 모델 데뷔를 했다. 칼, 도마 같은 주방 기구나 인터넷 쇼핑몰 피팅 모델, 디올을 제외한 다섯 개 패션 브랜드의 화보 보조모델 등.

그들이 일본인인 게 문제 될 뻔 했지만, 의외로 무사히 잘 넘어갔다.

"그리고 모델료를 현금으로 정산 받고 울었다고 합니다."

다미앙은 문자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진호는 무음으로 돌려 뒀던 자신의 핸드폰을 보았다.

"……짜식들."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 폭탄이 와 있었다.

지이잉!

다미앙의 전화가 다시 울었다.

진호는 무시한 채 메시지를 하나 씩 하나씩 확인했다.

울고 웃고 온갖 이모티콘에 장문의 감사 글이 적혀 있었다.

코끝이 찡했다.

'고마우면 더 노력해라.'

그것이면 된다.

"흐음. 알겠습니다.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음?'

진호는 다시 다미앙을 보았다.

"진호 씨, 혹시 하시마 료라고 기억 하십니까?"

"료 형이요?"

기억할 수밖에 없다.

생에 첫 예능 프로그램에서 만난 인연이니 말이다.

이후 일본에서도 프로그램을 같이 찍었다.

그때는 형 동생하며 으싸으싸 했지만, 서로 바빠지면서 관계가 자연스레 소원해졌다.

중국의 웨이홍도 마찬가지다.

"기억하죠. 그 형이 왜요?"

"그쪽 기획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하시마 료의 지인으로서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해 줄 수 있냐 하는군요."

"흐음……."

하시마 료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으면 이렇게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페이는요?"

"10만 엔이라는군요."

"고사하죠."

만약 하시마 료가 명절날 SNS에 글이라도 남겼으면, 천 엔이라도 출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고, 진호 자신과 하시마 료의 관계는 비즈니스 관계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0만 엔이라면 생각할 가치조차 없다.

하시마 료가 소속된 아이돌 그룹이 오리콘 차트 20위안에 드는 그룹이라고 해도 말이다.

'굳이 료 형 그룹의 인지도 띄우기의 희생양이 될 수 없지.'

"알겠습니다."

"네. 으흠흠."

다미앙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오늘은 우에토 유리라는 여배우와 데이트가 있다.

정확히는 그녀가 도쿄를 안내하는 거다.

우에토 유리.

85년생으로서 '더 씨프'를 같이 찍은 한국의 국민 첫사랑 김주아로 생각하면 될 만큼 대단한 일본의 여배우다.

원래는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을 부른 가수 나키시마 유카와 데이트였지만, 그녀에게 급한 일이 생겨 무산되었다.

우에토 유리는 나키시마 유카의 대타였지만, 진호로서는 훨씬 더 기뻤다.

'역시 뜨고 봐야 해.'

The J가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의견조차 타진해 보지 못했을 거다.

"한자와 나오키 진짜 재밌게 봤는데!"

얼른 연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사카이 마코토 씨나 기무라 바쿠야 씨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님 고로 상이라든지 고로 상이라든지 고로 상이라든지?"

중요하니까 세 번이다.

애정 프로그램인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인 마츠시게 고로.

진호는 불타는 눈으로 다미앙을 보았다.

다미앙은 다시피식 웃었다.

'이럴 땐 참 어린아이 같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에이, 꼭 알아봐 달라는 건 아니고요."

"알아보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사랑합니다."

"하핫!"

코를 씰룩이는 진호에게 PD가 다가왔다.

"10분 뒤에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최대한 멋있는 포즈를 취해 주세요. 물론 가만히 있어도 반해 버릴 테지만 말이죠."

"하핫. 네."

진호는 웃었지만 속으로 긴장했다.

일본에서 꽤 유명한 프로그램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리얼, 정글에 가다' 수준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아오! 데이트를 해 봤어야 알지!'

제작진에서 데이트 코스를 짜 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난처할 뻔했다.

"그럼 전 일어나 있겠습니다."

"얼른 매니저 한 명을 더 구해야겠네요."

싱긋 웃은 다미앙은 촬영 스태프들 뒤로 향했고, 진호는 스태프가 콘셉트로 가져다 놓은 책을 펼쳤다.

그녀가 주연으로 출연한 드라마의 원작 소설이다.

'……재밌는데?'

진호는 순간 촬영이라는 것도 잊고 깊게 빠져들었다.

어차피 그녀가 도착할 때까지 10분이라는 시간도 있었다.

* * *

-안돼. 절대 안돼.

"히 짱, 나보다 14살이나 어린 남자라구? 자기보다 서른 살이나 어린 남자에게 질투하는 거야?"

-너와 나보다 나이 차이가 적잖아!

우에토 유리는 오늘따라 질투가 심한 남편의 행동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오늘은 무척이나 이해가 되지만, 정말 이럴 때마다 곤란했다.

"자꾸 그러면 정말 바람 피울 거야?"

-기다려. 지금 간다.

"오면 친정 갈 거야."

탁 전화를 끊어 버린 우에토 유리는 약속 장소인 카페의 문을 열었다.

딸랑.

'……와.'

CF 퀸으로서 수많은 남자 배우와 호흡을 맞춰 온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미모의 젊은 남자가 다리를 꼰 채 책을 읽고 있다.

햇볕이 그를 향해 내리쬐고 있다. 저런 남성이라면 정말 바람을 피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저건 콘셉트인가?'

책을 읽는 모습은 평생 보고 싶을 만큼 멋있지만, 계속 이쪽을 무시하는 건 좀 그랬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가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살짝 놀랐다.

'정말 책에 빠진 거구나. 거기다 내 드라마 원작이네?'

사락사락 넘어가는 책장의 소리와 어디선가 풍겨 오는 아로마 향기 같은 포근한 냄새가 절로 눈꺼풀을 무겁게 했다.

"흐음."

눈을 가늘게 뜬 그녀는 테이블을 두드렸다.

똑똑똑!

"음? 흐어억!"

순간 심장이 떨어졌다.

"……아하하하하! 안뇽하세요? 우에토 유리예요."

그녀의 어설픈 한국어에 진호는 입맛을 다셨다.

"안녕하세요, 이진호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첫 만남 부터 실례된 모습을 보였네요."

"어머, 일본인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많이 공부했죠. 식사는 하셨나요?"

"풋, 한국인 맞네요."

한국인은 만날 때마다 잘 지냈냐는 말과 함께 습관처럼 밥은 먹었냐는 인사를 건넸다.

머리를 긁적인 진호는 제작진이 준비해줬지만 먹지 않은 조각 케이크를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서로를 알아 갈 때는 술 아니면 단 게 최고잖아요."

"카사노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요."

"풋, 아하하!"

진호도 따라 웃었다.

둘은 커피와 케이크를 먹으며 서로에 대해 알아갔고, 그 예쁘고도 아름다운 그림에 피디는 크 감동 했다.

* * *

카페를 나선 그들은 주변을 가볍게 걷다가 도쿄 외각에 있는 온천으로 향했다.

혼탕이었는데 그녀가 유부녀가 아니고, 또 수영복을 입지 않았다면 눈 둘 곳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연기에 관한 소신도 굉장히 깊고 강했다. 배우다운 배우였다.

괜스레 그녀의 남편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비바 일본! 나쁜 국민 도둑놈!'

일본 온천 가이세키 요리 역시도 대단했다.

여자 친구가 생기면 꼭 함께 오고 싶었다.

"계속 제 알몸을 생각하면 여기서 끝낼 겁니다."

진호도 수영복을 입긴 했지만, 바지만 입었다.

탁!

그녀의 손이 팔뚝을 때렸다.

"어른을 놀리면 못써."

진지하게 혼내고 있지만 그녀의 양 볼은 발그스름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슬림 하지만, 선이 뚜렷한 알찬 근육. 이런 아름다운 몸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어.'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소중한 곳을 쳐다봤을 만큼 강렬한 페로몬이 풍겼다.

'거기다 연기에 관한 식견도 풍부 하고…….'

진호는 자기만의 세상에 빠지는 그녀를 일견하며 도쿄타워 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꼭 남산타워에서 서울을 내려다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이제 남은 건 마무리 산책뿐인가?'

이후 오일 뒤 다시 그녀와 함께 이 데이트를 찍은 이유인 토크쇼에 출연하면 된다.

아쉬웠다.

'우에토 씨가 유부녀만 아니면, 정말 날이 새도록 연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PD도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굉장히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슬리는 게 있었다.

"……에휴."

진호는 우에토 유리를 툭 치며 한 곳을 가리켰다.

"에?"

진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선글라스에 검은 마스크. 검은 스냅백.

진호가 온천에서부터 발견한 수상한 사람이다.

정체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우에토 유리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가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히 짱!"

"윽!"

우에토 유리는 씩씩거리며 그를 향해 걸어갔고, 깜짝 놀란 PD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따라갔다.

"와…… 깬다."

16살 차이가 나는 마츠다 히로와 우에토 유리의 결혼은 일본을 들썩이게 했다.

당시 둘의 결혼은 결코 이해가 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었고, 당사자인 둘도 이유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온갖 추측들이 나돌았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추측이 뮤지션의 정열이 우에토 유리를 함락 시켰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뮤지션은 열정과 정열의 상징이었고, 무조건 미인과 사귄다는 고정 관념이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냥 팔불출이셨구나."

진호는 팔짱을 낀 채 턱을 괴며, 당황했는데도 억지로 강한 모습을 보이려는 마츠다 히로를 보았다.

'저러다 진짜 싸우겠네.'

아무리 무난한 스케줄이라지만, 이렇게 끝낼 순 없었다.

진호는 그쪽으로 걸어가 마츠다 히로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늘 부인 되시는 분과 일일 데이트를 하게 된 이진호입니다."

"어흠, 마츠다 히로다. 들어 봤겠지?"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콘셉트를 지키려는 게 눈에 보인다.

일본의 뮤지션들은 대부분 거만하게 행동했는데, 이는 한국의 래퍼들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럼요. 그래서 오늘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요. 같이 데이트하기를 정말 바랐거든요. 아니, 이럴게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함께하실래요?"

이는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그는 일본을 대표하는 뮤지션 중 한 명.

우에토 유리와는 연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면, 그와는 음악적 견해를 공유해 보고 싶었다.

마침 마지막 산책을 위해 갈 곳도 음악적인 이야기를 나누기에 굉장히 좋은 장소다.

진호 자신에게는 굉장히 뜻 깊은 장소기도 했다.

"뭣?"

"에?"

"피디님도 그러기를 바라시는 것 같네요."

모두의 시선이 피디에게로 몰렸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어흠, 정 그러기를 바란다면야."

"히 짱? 처음 본 사람이잖아."

"시끄러워."

'귀여우셔라. 꼭 우리 할아버지 같네.'

그렇게 3인 데이트를 하게 된 셋이 마지막 산책으로 향한 곳은 도쿄에 있는 작은 공원이었다.

쿵쿵쿵! 띠리리.

많은 뮤지션들과 관객들이 여름 날을 더 뜨겁게 만드는 음악 공원.

"호오?"

"와."

진호는 감탄하는 부부를 보며 옅게 웃었다.

이 장소는 진호 자신이 고른 곳이었다.

도쿄에 다시 오게 되면 꼭 찾으리라 생각한 곳.

'여기서 구라모토 선생님과 만났지.'

하시마 료 때문에 일본에 왔을 때 인연을 맺게 된 뉴에이지 음악의 거장 피아니스트 유키 구라모토.

그와는 지금도 계속 연락을 하고 있다.

'난 저기 피아노 옆에서 기타를 쳤고, 선생님은 저기 관객들 사이에…….'

생각을 멈춘 진호는 한 곳을 쳐다보며 눈을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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