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6권 23화
자리를 옮겼다.
사람이 많은 대기실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게다가 오늘 고생한 사람들 및 지니어스 상해 지부의 지부장을 비롯한 간부들, 장칭, 웨이양과 뒤풀이 약속이 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사람을 위해 내줄 시간과 장소는 한정되었다. 그가 레전드라 불린다고 해도 말이다.
원래 약속 잡은 날짜는 내일이다. 윌리엄 우드스미스는 머리에 쓴 스냅백을 비롯해 모든 굿즈를 벗으며 고개를 숙였다.
"일단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HU의 안일한 대처부터 지금의 이 무례한 방문까지 말입니다."
굉장히 정중한 사과다.
'이런 느낌이구나.'
아르노가 말한 재밌는 화술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당하고 나니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그의 목덜미에서린 진심이 불쾌함을 희석시켰다.
"지금 저의 행동은 뮤즈의 콘서트에 반한 한 명의 팬이 저지른 충동적 행동이니 HU와 연관을 짓지 말아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미앙, 자네에게도 미안하군."
"아닙니다, 스승님."
스승. 진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 거였구나.'
다미앙이 자신의 동의 없이 허락한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후, 할 말이 없게 만드시는군요.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뮤즈."
자리에 앉은 그는 굿즈를 정성스럽게 개키기 시작했다. 다미앙이 이마를 잡았고, 진호는 낯빛을 굳혔다.
굿즈를 소중히 대해 주는 건 고맙지만, 공은 공이었다.
"시간을 많이 낼 수가 없습니다."
모두 개키고 가슴에 손을 얹은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이야기를 오래 나누기 위해 온 게 아닙니다, 뮤즈. HU 가, 그리고 제가 준비한 말이라고 해 봤자 앞으로 더 잘해 주겠다, 불편한 건 없냐 등등. 형식적인 말 들뿐이니까요. 이런 건설적이지 못한 말보다는 애인의 엉덩이를 두드리는 게 훨씬 더 보람차지 않겠습니까?"
순간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독특하신 분이네.'
진호는 긴장을 놓기로 했다.
윌리엄은 정말 충동적으로 찾아 온 것이었다.
'정말 특이해.'
"편하게 진 혹은 지노라고 불러 주십시오."
미우나 고우나 다미앙이 몸담아 일하고, 올라가야 할 HU의 이사다.
"오우. 윌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애칭입니다."
"하핫. 알겠습니다, 윌. 그래서 HU가 준비한 건 뭡니까?"
진호의 입에서 튀어나온 애칭에 살짝 마음을 놓았던 윌리엄은 입 맛을 다실수밖에 없었다.
'안 먹히는군.'
"인정에 기댄 사정입니다."
"와닿지 않는군요."
"지노에게 무언가를 더 해 주기에는 여력이 없습니다."
진호의 계약이 8 대 2다.
그 2중 HU의 본사가 가져가는 돈은 티끌에 불과하다.
"정말 그렇습니까?"
진호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겠군요. HU의 입장은 잘 들었습니다."
진호는 몸을 일으켰다.
윌리엄은 식겁하며 다미앙을 보았다.
'이렇게 끝난다고?'
이럴 줄 알았던 다미앙은 미소만 지을 뿐이다.
이 일의 결정권자는 진호다. 윌리엄이 캐스팅이나 계약에 대해 알려 준 스승이라지만, 다미앙은 진호의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진호는 윌리엄을 보았다.
"HU와 저흰 처음부터 비즈니스 관계였습니다, 레전드."
자신과의 계약으로 인해 다미앙은 치프 디렉터 후보권을 내려놓았다. 그 허름하고 작은 곳에 사무실을 차렸다.
JH와 계약을 맺고,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 다미앙과 직원들의 노력이다. HU가 도와준 건 단 하나도 없다.
"인정. 저도 참 좋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뺨 때리고 달래려는 상대에게 인정이라…… 우습다 생각 하지 않습니까?"
진호는 윌리엄의 가슴팍을 보았다.
움찔!
윌리엄은 하얗게 질렸고, 진호는 서늘하게 웃었다.
사람은 지갑같이 중요한 물품을 몸에 소지하면 무의식적으로 그걸 확인한다. 방금 그는 마치 정중히 사과하는 듯 왼 가슴을 만졌지만, 그 손의 움직임은 무언가를 확인 하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는 영업맨으로 살아온 아버지 이형만이 말해 준 기업식 뺨 때리고 달래기다.
그리 크지 않은 이득에 계약자가 실망했을 때, 이건 당신에게만 주는 거라며 내미는 선물.
그렇게 되면 계약자는 더 충성한다고 했다.
계속 못살게 군 상사가 술 한잔 사 주며 다 너를 위해 그런 것이라며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 주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했다.
진호의 눈을 본 윌리엄은 이내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당하는 게 몇십 년 만이지?'
어이가 없었다.
"실수를 몇 번째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죄송합니다. 먼저 드렸어야 했는데, 당신을 좀 더 알고자 하는 마음에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허리까지 숙이며 가슴팍에서 한 장의 신용 카드를 꺼내었다.
"저희가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입니다. 앞으로의 모든 경비를 HU 에이전시 본사가 책임지겠습니다."
'호?'
진호는 꽤 놀랐다. 다미앙도 마찬가지다.
자신만만해 하는 윌리엄의 표정처럼 경비가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0퍼센트 이상이다.
HU가 계약을 계속 연장시키기 위한 칼을 뽑았다.
'이거 손을 뿌리칠 수 없게 만드네. 하지만…….'
부족하다. 아직 윌리엄의 얼굴엔 여력이 있다.
진호는 그동안 찾아와 주지 않은 것에 대한 작은 화풀이를 하기로 했다.
"차."
"예?"
"스케줄용 차량을 사 준시다면, 이왕이면 일어서서 차 안을 돌아다닐 수 있는 그런 벤이라면 이 카드를 받도록 하죠."
진호는 검은색 카드를 쥐고 흔들었고, 다미앙은 화들짝 놀라 진호를 보았다.
너무 과한 요구였다.
하지만 진호의 눈은 여전히 무심 했다.
잡으려면 들어주고, 말면 말라는 배짱이다.
"허허헛."
한 방 맞은 윌리엄은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일어서 손을 내밀었다.
"이거 어쩔 수 없게 만드는군요. 그럼 이제 저희의 손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진호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HU가 다미앙 씨와 저를 지금처럼 잘 대해 주고 걸맞게 대우해 준다면 이 관계는 계속 지속될 것이라 약속드리겠습니다."
다른 곳을 가도 지금 같은 계약을 이어 갈 수 있다고 볼 수 없다. 팀 이진호의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휘유. 뮤즈의 가장 무서운 점이 무엇인지 이젠 알겠군요. 확실히 조사하지 않은 제 잘못입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자, 이제 지루한 이야기도 다 나눴으니 움직이시죠."
흥분이 서리기 시작한 그의 얼굴에 진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움직인다니요?"
"뒤풀이 가시려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런데요?"
"저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눈을 보니 진심이었다.
어이없다는 듯 웃은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부하면 어떻게든 따라올 것 같았다.
'장칭 할아버지와 좋은 친구 되겠네.'
친할아버지가 말하길 늙을수록 친구는 많아야 한다고 했다.
* * *
예상대로 윌리엄과 장칭은 순식간에 친해졌다.
웨이양도 친해졌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온갖 일을 겪은 윌리엄의 이야기 보따리는 밑바닥을 몰랐고, 장칭과 웨이양이 겪은 외국인은 모를 중국내의 이야기도 끝을 몰랐다.
세 명이 의기투합하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뒤풀이를 끝낸 진호는 다음 날부터 상해 스케줄을 소화한 뒤 다음 도시로 향했다.
-한국 배우 이진호, 상해를 웃기고 울리다!
-최초! 최초! 최초! 여태껏 이렇게 다재다능한 사람은 없었다.
-The J의 이진호, 여름의 사천을 더 뜨겁게 달구다.
"휘유. 진짜 왜 이래?"
중국 언론이 오늘도 우호적이다.
이 기사들을 쓴 기자들 모두 진호 자신의 팬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심이 충만하다.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부 지방이 아니라 거의 중국 전체에서 우호적인 기사들이 써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도시만 달라져도 취급하는 뉴스의 성향이 달라진다. 도시 마다 정치적 색과 공약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
이제야 중국 젊은이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수준이다.
삼십 대중반 이상의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다. 끝내 시청률 1퍼센트 고지를 넘은 The J가 아니었다면, 이마저도 어림없는 일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중국내 모든 위성 프로 드라마 시청률 순위 3위.
대박을 쳤다.
중국에서 시청률 1퍼센트는 한국으로 치자면 30퍼센트 대의 시청률이다.
'대체 뭐가 뭔지.'
고개를 저은 진호는 핸드폰을 끄며 기지개를 켰다.
"으드드!"
'아, 피곤해.'
진호는 차 시트에 등을 묻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루에 최소한 개 이상의 스케줄을 3주 동안 이어 오다가 겨우 하루 휴일을 가지게 됐다.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웨이양이 식사 초대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 아마 6시간 이상을 잤을지도 모른다.
[스킬: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로 인해 하루 3시간만 자면 웬만한 피로는 다 풀려 버리는데도 말이다.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부우웅! 달리는 차 안, 운전석에 앉은 중국인의 북경어에 진호는 정신을 차렸다.
HU 에이전시 차이나에서 붙여준 현지 스태프다.
"아, 그래요?"
신색을 정리한 진호는 앞을 보았다가 잠시 넋을 놓았다.
한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길게 늘어선 담벼락이 보였기 때문이다. 옛 중국식의 기와가 얹어진 담벼락.
진호는 장칭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공무원이 아니라 정치인이셨네. 아니, 큰 의미로 보면 공무원이지."
'한국은 웹이 안 되네.'
한국 정치인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저런 곳에서 살 수 있을까 싶었다.
'일개 공무원이 저 정도인데, 주석은 대체 얼마나 큰 곳에서 사는 거야? 자금성 정도 되나?'
입구엔 경호원이 있고, 안에는 주차장도 있다.
차 수십 대는 족히 들어갈 넓은 주차장이다.
"내일 뵙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식사 약속이지만, 웨이양이 자고 가라며 속옷까지 챙겨 오라고 했다.
탁!
차에서 내린 진호는 주위를 둘러보곤 휘파람을 불었다.
1층만 해도 최소 200평은 될 법 한 거대한 2층 저택도 저택이지만, 보안이 엄청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숨겨진 카메라 다섯 대가 이쪽을 주시한다.
'여긴 침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겠는데?'
어찌어찌 침입은 해도 탈출이 미션 임파서블이다.
[스킬: 괴도 루팡] 그렇게 말하고 있다.
"잘됐네. 그런데 이 모두가 웨이양 할아버지 차인가?"
롤스로이스 같은 대형 세단뿐만 아니라 페라리, 람보르기니 등의 최고급 스포츠카도 있다.
"취미가 대단하시네. 부럽다."
차를 사는 건 문제가 안 된다. 유지비가 문제다.
입맛을 다신 진호는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웨이양과 그의 부인으로 보이는 노부인이 나오고 있었다.
"할아버지!"
뒤풀이 때, 웨이양도 할아버지로 부르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이진호입니다."
노부인이 살짝 놀랐다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서 오렴. 이 사람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친할머니다 생각 해 주렴."
"어? 그럼 안겨 봐도 될까요?"
순간 멍해졌던 두 노부부는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헛! 그놈의 넉살은 정말 "
"진심인데……."
시골에 계신 할머니의 품은 언제 안겨도 푸근하고 따뜻하다.
"이건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 가져온 선물이에요. 받아주세요."
"뭘 또 이런 걸 가져와."
"기러기 조각상 한 쌍인데, 백년 해로의 상장인 이 기러기 한 쌍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시라고요."
눈을 빛낸 둘은 흡족히 웃었다.
작은 선물에도 정성을 담는 진호의 마음이 참 갸륵해서다. 특히 웨이양은 부럽다는 듯 보는 부인의 눈빛에 가슴을 폈다.
"그래, 고맙구나. 안으로 들어오거라."
"옙!"
안으로 들어선 진호는 눈을 빛냈다.
아르노 베르베우의 대저택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욕심이 들게 만드는 현대식 인테리어였다.
"와. 오오."
진호의 감탄사에 웨이양과 그의 부인이 짓는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둘이 안내한 방에 짐을 푼 진호는 다시 안내를 받아 거실로 향했다.
"장칭 할아버지는 도착하셨어요?"
오늘 식사엔 장칭도 함께하기로 했다.
"먼저 와 있다. 그리고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들도 있고."
"소개요?"
긴 내가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잘난 손자이긴 하지.'
영화에서 나오는 대부라는 개념 처럼 중국도 호칭을 가족처럼 정하면 정말 가족같이 대한다. 말만 할아버지가 아니라 정말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가 형성되는 거다. 웨이양의 입에 걸린 음흉한 미소가 살짝 걸리긴 하지만 기대를 하며 거실에 도착한 진호는 잠시 눈을 비볐다. 장칭을 제외하고도 아는 사람이 있었다.
배우라면 누구나 알 수밖에 없는 인물.
'여, 여가위 가,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