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6권 20화
커다란 회의실. 무거운 공기 속, 둥근 테이블에 백인, 흑인, 라틴 등 나이가 지긋한 중년인들이 앉아 있다.
그들 중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도 타이밍을 놓쳤군요."
사람들의 시선이 한 백인 중년인에게로 향한다.
HU 에이전시 아시아 총괄지사 지사장이다.
그는 마치 죄인인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렇다. 지금 이 자리는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모델 에이전시 HU 에이전시의 임원 회의다.
"아시아 지사장.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아시아 총괄지사 지사장의 고개가 더 숙여진다.
그도 할 말이 있긴 하다.
모델은 초반에 빵 떠서 그 인기를 계속 유지해 가는 직종이다.
그 어떤 직종보다 외형을 중시하기에 디자이너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끝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대략 3년 정도가 걸린다.
그런데 이진호란 인물은 그 노선을 이탈해 버렸다.
디올 음므로 이름을 알리더니 순식간에 두 개의 브랜드가 더 붙고, 눈 깜빡할 사이에 세 개의 브랜드가 더 붙더니 이젠 LVMH의 황제까지 만났다.
"진호 리가! LVMH의 뮤즈가! 다미앙 토마소가! 독립을 하면 어떻게 할 거난 말입니다!"
"차라리 독립이라면 낫지. 다른 에이전시에 들어가면?"
날카로운 말에 회의실이 침묵에 빠졌다.
가장 큰 문제이자 가장 예민한 문제다.
"대체 당신은 얼마나 바보이기에 그 인성 논란 사건에 끼어들지 않은 겁니까!"
"끼어들지 못한 거라면 더 심각한 문제겠죠."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입다고 했다. 그게 반대 파벌의 인사라면 말할 것도 없다. 지사장은 속에서 천불이 솟았지만,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중국보다 작은 시장이라고 우스웠습니까?"
"……."
"좆 같은 변명이라도 해 보세요! 진호 리가 배상금 전액을 기부한다는 말에 LVMH의 매출이 뛰었습니다! 착하지만 강단에 개념까지 있는 스타를 후원한다는 이유로요!"
이 사실을 알리는 첨병은 LVMH가 아니라 HU 에이전시가 되어야 했다.
"안젤라 리 디올 코리아 부사장이 현재 차기 디올 차이나 사장으로 확실시되고 있죠."
"……."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지금까지 몇 개의 기획을 성공시킨 진호 리가 또 언제, 어디서 어떤 기획을 성공시킬지 모른다는 거예요!"
'모델, 뉴욕에 도전하다'도 한국의 연예기획사가 아니라 HU 에이전시가 메인이 되어 기획되었어야 한다.
"뭐라고 말 좀 해 보세요!"
회의실이 뜨거워진다.
시끄러운 고성뿐만 아니라 눈빛도 뜨겁다.
"자, 자, 모두 진정합시다. 사건이 터지고 고작 6일 만에 수습됐어요. 작정하고 벌인 판인데 나라고, 그리고 여러분 누구라고 그 일에 끼어들 수 있있겠습니까?"
"쯧."
"크흠."
후덕한 덩치를 지닌 칠십 대 노인의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이런 말이 있죠. 늦었다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 지금이라도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면 됩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누가 가냐겠죠."
진호는 커져도 너무 커졌다.
현재 위치도 위치지만, 드러나지 않은 잠재력까지 합하면 어디까지 커질지 모른다.
"말을 꺼낸 내가 가겠습니다."
노인의 말에 모두 엉덩이를 들썩였다.
지사장도 경악했다.
"관심이 무척이나 가는군요. 그럼 승인한 걸로 알고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그 뮤즈가 다른 사고를 치기 전에요."
노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고, 임원들은 안심했다.
노인이라면 진호를 다독이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들은 늦었다.
* * *
케이블 드라마의 역사를 쓰고 있는 The J의 촬영이 모두 끝났다.
첫 주연 작품이라서 그런지 무척이나 아쉽고 섭섭했지만, 밀린 스케줄은 감성에 빠질 틈을 주지 않았다.
부우웅!
일곱 대의 버스가 줄지어 달리고 있다.
그 속에서 진호는 양진혁과 통화를 하고 있다.
- 진호야.
"옙?"
-이늠의 쉬키야!
"으흐흐."
-하아. 진호야. 제발. 응? 스케일도 적당해야지, 인마!
"에이, 레오 형 돈 많잖아요."
-몰라, 끊어!
꺼진 휴대폰을 본 진호는 히죽 웃었다.
그리고 포털사이트에 접속해 연예란을 보았다.
이진호, 천 명의 팬과 데이트! 모두 자비?
"크히히."
진호는 옆을 보았다.
몸매 좋고 매력적으로 생긴 팬클럽 회장이 핸드폰을 보며 웃고 있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다른 아이돌 탈덕하고 넘어오는 애들 많아서. 홈마들도 겁나 많아. 그래, 얼른 넘어오렴. 후딱 오렴. 본진으로서 중국은 눌러야지."
진호는 놀랐다.
홈마, 홈페이지 마스터면 코어 중 진성 코어 팬이라는 소리다. 애정 하는 연예인이 탈세를 저질러도 떠나지 않는 게 홈마다.
"와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이번 사건이 좀 컸지. 지들이 애정하는 아이돌들이 나가리 됐잖아. 이겼으면 또 몰라. 졌잖아. 거기다 팬들시켜 악를 달게 했는데 막상 고소 처맞으니 나 몰라라 하고 있잖아."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탈덕하는 게 이해된다.
"결정적으로 지금까지 그 어떤 연예인이 그동안 참아 줘서 수고 했다고 팬 천 명 모아서 여행을 가? 그것도 자비로."
"아하하."
원랜 시청률 공약인데, 그렇게 포장이 되었다.
그 때문에 인터넷이 뒤집힌 상황이다.
말이 천 명이다. 2박 3일이면 여행 경비만 억대다.
팬을 위해 억대의 돈을 쓴 연예인.
미세하게 남아 있던 부정적인 여론이 파도에 쓸린 듯 사라졌다. 현재 전국 각지에서 팬들이 집결 하는 중이다.
"거기다 진호 네가 그냥 혜자니? 혜자 중 혜자지?"
"아, 선생님 성함은 좀……."
"끙. 그러네. 이건 미안."
"됐어요."
진호는 그녀의 핸드폰을 뺏었다.
"이제부턴 바깥일 신경 끄고 실컷 놀 생각만 해요."
"오올. 상남자. 남자 되더니 더 상남자 됐어?"
진호는 눈을 부릅떴다.
"어, 어떻게?"
"글쎄. 어떻게 알았을까?"
진호는 흔들리는 눈으로 팬클럽 회장을 보았고, 그녀는 음흉하게 웃었다.
버스는 그렇게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숙소는 얼마 전 폐교를 한 어느 시골의 중학교다.
여름, 그것도 피서 철이라서 이런 곳 말고는 답이 없었다.
그래도 지근거리에 바다와 작지만 계곡이 있어서 물놀이는 걱정 없었고, 마을도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무리 시끄럽게 놀아도 걱정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기부를 했다.
"헐?"
"미친?"
교실이었던 곳으로 들어간 팬들은 경악했다.
고무 매트가 바닥 전체에 깔려 있다.
시원한 대나무 장판에 깔고 덮는 이불도 있다.
운동장에는 무대도 지어져 있다. 결정적으로 이동식 냉풍기와 선풍기가 방마다 열 대씩 돌아가고 있어서 시원하다 못해 추웠다.
나무 바닥도 감지덕지라 생각했던 그들은 감동하고 말았다.
"콘도를 통으로 빌리는 것보다 싸게 들었어요."
피서철 콘도는 1박에 20만 원 수준이다. 이것도 엄청 싸게 빌렸을 때 이야기다. 그런데 잘 수 있는 숫자는 정말 많아야 8명.
"냉풍기와 선풍기는 이후 기증할 거고요."
짜악!
"악!"
"역시 내 연예인! 잘한다! 멋지다!"
"캬! 시키지 않아도 아낌없이 주는 우리 진호!"
"아주 타 아이돌 팬들을 블랙홀 처럼 빨아들이네!"
"굿 잡. 베이베! 야! 지니어스! 다들 찍어! 홍보해!"
"그럼 짐들 풀어요. 남자들은 날 따라오시고."
팬이라고 모두 여자만 있는 게 아니다. 남자도 제법 있다. 비율로 따지면 9.5 대 0.5 수준이지만 말이다.
남자들 숙소는 교무실이었다.
구성은 교실과 똑같았지만 다른 게 있다.
커다란 TV와 온갖 비디오 게임기다.
"캬. 우리 진호 센스 정말."
"그렇다고 게임기만 붙들고 있으면 모두 블랙입니다. 그리고 옆방과 옆옆방은 기사님들 주무시는 곳이니까 좀 챙겨 드리시고요."
"아주 빈틈이 없네!"
남자들은 당연하다는 듯 엄지를 치켜들었다.
"술과 안주는 좀 이따가 올 건데, 술 취해서 사고만 쳐 봐요. 아주 그냥……."
턱! 어깨에 손이 얹어졌다.
"진호야. 980명 여자들 상대로 사고 치면 우리가 죽어."
이번 여행의 남자 참가자 숫자는 총 20명이다.
"그래요, 형. 우리 노예 안 되게 형이 막아 줘야 해요. 아니, 문단속부터 철저히 해야 할 듯."
"불침번 서자."
떨떠름해진 진호는 그들 사이에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버스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들의 반응도 최고였다.
진호는 마지막 버스까지 도착하자 방송실로 향했다.
그 안에는 먼저 도착해 있는 촬영 팀이 있었다.
당첨되지 못한 팬들을 위한 촬영 팀이다.
이미 며칠 전, 먼저 내려와 조작법을 배운 그는 촬영 팀에 인사하고는 기기 앞에 앉아 마이크를 켰다.
"아아, 모두 들리시나요?"
네!
"자리가 좁거나 불편하지 않으시고요?"
네!
"옷은 다 갈아입으셨죠? 혹시 지금 당장 바다에 갈 거라고 수영복 입은 거 아니죠?"
대답이 없다.
"꿈깨요. 바다는 오늘 안 가요."
우우우우우!
진호는 눈을 빛냈다.
"그럼 지금부터 보물찾기를 시작 할 건데요."
다시 교정이 조용해졌다.
"나 알죠? 뽀뽀 한 번, 허그 한 번 그런 쪼잔한 거 꽝입니다. 디올, 지방시, 겐조, 태그호이어 등! 신상 백, 바지, 셔츠! 최고급 양주, 핸드폰, 노트북! 상품은 총 3천 개!"
"우와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악!"
"찾아보세요. 내 모든 걸 이 학교 부지 안에 숨겨 뒀으니!"
뛰어!
찾아!
노트북은 내 거야!
진호는 우르르 몰려나가는 팬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굿즈를 사 면서 모은 응모권을 통해 여행에 당첨된 이들이다. 운도 운이지만, 굿즈를 사기 위해 일인당 쓴 돈이 어마어마하다.
드르륵! 쾅!
"잉?"
전의 가득한 얼굴의 팬클럽 회장이 성큼성큼 들어와 방송실 내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보여 주려는지 검정색 비키니에 하얀 시스루 티셔츠다. 그러더니 찾아냈다.
"그렇지! 노트북이 여기 있을 줄 알았지! 에이, 허그."
"헐?"
진호는 살짝 놀랐다.
"네가 학교 부지 안이라고 했잖아. 그럼 이 학교 건물도 포함된 거지. 네가 있는 이 방송실에 좋은 게 숨겨졌을 거라 생각한 것뿐이야."
"와, 머리 진짜."
"내가 괜히 회장이겠니? 그보다 얼굴이 왜 그래?"
"아, 티나요?"
진호는 조금 씁쓸히 웃었다.
"돈을 많이 썼는데 당첨 안 된 팬들이 눈에 밟혀서요."
"그래서 저거 보내려고?"
팬클럽 회장이 이쪽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가리켰다.
"베리 굿. 멋진 생각."
진호는 씩 웃었다.
"아뇨?"
"응?"
"저도 찾을 건데요? 못 온 40만 명과 함께."
진호는 기기 옆에 두었던 핸드폰을 들었다.
채팅이 읽지 못할 만큼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접속자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실시간 방송이었다.
오지 못한 이들을 위한 선물. 앞으로 50시간 방송이다.
"야, 잠깐?"
"물론 전 아무 말도 안 할 겁니다. 딱 이분들이 가리키는 곳만 뒤질 거예요. 시작은 앞으로 30분 뒤."
그 정도면 상품을 거의 다 찾았을 시간이다.
끝내 못 찾아도 이들만을 위한 선물이 더 준비되어 있다.
"에이 씨! 너 두고 봐! 일단 굿 잡!"
팬클럽 회장은 다급히 녹음 부스 안으로 들어갔고, 진호는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다들 볼일 보고 오세요. 앞으로 50시간, 논스톱으로 달릴 겁니다. 물론 저녁에는 잘 테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