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6권 16화
6. 프랑스에서
"후우."
저택을 나선 진호는 넥타이를 풀었다.
피에트로가 쿡쿡 웃었다.
"다신 못할 짓이네요."
"잘하셨습니다, 진."
잘한 정도가 아니다. 완벽 그 이상이었다.
"어땠습니까?"
"음. 외로워 보이셨어요."
멈칫! 생각지도 못한 답이었다.
"그렇죠. 그분은 LVMH란 제국의 황제니까요. 그러면서도 오늘처럼 서로 마주 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상황을 먼저 만들 만큼 좋은 분이기도 합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건데…….'
진호는 자신이 알아차린 점을 말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사람에겐 감추고 싶은 비밀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네. 그런 것 같네요. 좋은 분이세요."
피에트로는 대견하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유럽최고 부자 아르노 베르베우 와의 식사다.
초대받은 사람은 무엇이든 얻고 돌아간다. 진호라면 이 점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전혀요."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나란 존재를 각인시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긴장이 풀리며 술기운이 올라와서 그런지 속말이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피에트로는 수습하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만족시켜 주는 자신의 어린 친구의 사상을 조금이라도 엿보고 싶었다.
"음? 아."
진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그분께 원하는 게 없으니까요. 있어도 제가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들뿐이죠."
딩. 피에트로는 머리를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흐하핫! 그렇군요. 가시죠. 제가 잘 아는 펍이 있습니다."
"오!"
둘은 떠들썩하게 차에 올랐다.
한편, 남겨진 아르노는 아직 온기가 남은 것 같은 맞은편 테이블과 앞에 놓인 진호의 사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여태껏 날 만나며 무언가를 바라지 않은 사람이 있었나?"
없었다.
자식들마저도 언제나 무언가를 원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더 심해졌다.
그런데 진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동정했다. 처음 대면한 그 순간부터 말이다. 아르노는 진호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을 때 잠시 보았던 방향을 보곤 몸을 굳혔다.
가장 상석. 의자 하나만 덜렁 놓인 자리다.
그리고 자신이 앉은 자리를 보았다.
두 자리를 번갈아 본 그는 미간을 좁혔다.
"까미유."
늙은 집사가 다가왔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이 어떻지?"
"오늘도 멋지시고 잘 어울리십니다."
"그랬군. 너무 자연스러워서 읽혔던 거였어."
텅 빈 테이블을 한눈에 담기 싫어서 언제부턴가 안기 시작한 자리다.
그런데 진호는 이런 약점을 알았으면서도 이용하지 않았다. 그저 옆집의 노인처럼 대했다.
"바라는 게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건가."
스스로의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 와 스스로의 힘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기에 가능한 행동.
옆집 노인 취급을 당했지만, 불쾌 하지 않았다.
웃음이 나왔다.
눈을 감으니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뮤즈의 진짜 의미가 이것이었군."
방금 전 헤어졌는데도 벌써부터 다음 만남이 기대된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타인에게 부럽다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다음식사 초대를 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려면…….'
아르노 베르베우는 즐거운 상상을 시작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마지막 쇼의 리허설을 마친 진호는 파리에 들를 때마다 꼭 한 번씩은 찾는 베이커리 카페로 향했다.
"오! 진!"
"잘 지내셨죠? 아, 이쪽은 제 경호원인 월터예요."
오늘도 호들갑스런 후덕한 덩치를 지닌 칠십 대 노인과 포옹을 한 진호는 거의 지정석이나 다름 없는 자리에 앉았다.
카페 밖에 놓인 테이블이다.
곧 종류가 다른 빵 몇 개와 햄, 커피 등이 놓였다.
크루아상을 바삭 베어 문 진호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역시 아저씨 빵이 프랑스 최고 예요."
진심이다.
이 베이커리 카페의 주인은 빵으로 훈장까지 받은 인물로 한때 프랑스 대통령의 아침식사와 간식을 책임 졌던 대단한 파티쉐다.
"푸흐흐. 많이 들게."
"감사합니다. 그런데 안쪽이 좀 시끄럽네요? 무슨 일 있어요?"
카메라나 조명 같은 게 보인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도 한국인 이었지. 한국에서 내게 빵을 배우러 왔네. 아이돌? 아무튼 그런 거라더군."
"아, 그래요? 누군지 몰라도 제대로 찾아왔네요."
"으허헛! 햄 좀 더 가져다줄까?"
"감사합니다!"
"으허허허헛!"
그가 들어가자 진호는 커피를 마시며 핸드폰을 들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해도 딱히 궁금증이 가질 않았다.
"역시 좀 시끄럽네."
제니퍼 로제와 찍은 사진이 한국의 포털사이트 연예란에 올라왔다. 같이 식사하는 사진, 클럽에 들어가는 사진 등을 무단으로 퍼간 한국 기자들은 열애설이라는 설레발을 치며 어그로를 끌고 있었다. 파리나 미국은 조용한데, 유독 한국만 시끄러웠다.
덕분에 앨리나 김세연, 김윤식 등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화 폭탄을 받아야 했다.
반박 기사를 내지 않았다면, 일파만파 커졌을 것이다.
"정말 얼른 연예를 하든지 해야지, 원."
"좋은 생각이십니다. 상대만 찾으면 되겠군요."
드륵! 맞은편 의자가 빠지며 다미앙이 앉았다.
"좀 건지셨어요?"
다미앙은 모델이나 모델의 자질을 가진 사람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파리에 왔다.
"예. 돌아갈 땐 2명과 함께할 겁니다."
"오, 많네요. 패션위크는 다 도실 생각이죠?"
"3기 연습생은 10명으로 맞출까 합니다."
"더 받아도 되는데."
"다른 디렉터들도 월급 받는 값은 해야죠."
둘은 웃음을 터트렸다.
"진호 씨."
다미앙이 갑자기 낯빛을 굳혔다.
"네?"
"어제 황제 아르노 베르베우를 만나셨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어? 그걸 어떻게 아세요?"
진호도 저택에 도착하기 전까지 누굴 만날지 몰랐다.
다미앙의 낯빛은 더욱 굳었다.
"실화였군요. 어디서 시작된 소문 인지 모르나 지금 패션계에 파다 합니다."
"흠……."
'누구지?'
극비였던 일이다.
'피에트로? 아르노 씨?'
둘 중 한 명이라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진호 씨가 탔던 차량은 아르노 베르베우가 손님을 픽업할 때 보내는 것입니다. 한 기자가 그걸 목격했습니다."
"아하."
진호는 피식 웃었다.
상황이 아주 재밌게 변했다. 누군지 모를 그 기자 때문에 오늘 만나기로 한 HU 에이전시 임원은 똥줄이 타게 생겼다.
"이거 의도치 않게 체크메이트부터 외치게 됐네요."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냥 신변잡기? The J의 팬이시더라고요."
다미앙은 눈을 끔뻑였다.
"그 아르노 베르베우가 말입니까?"
"네. 드라마에 조예가 깊으시던데요? 요샌 한국 막장 드라마도 보신대요."
프랑스 드라마보다 더 막장이라서 재밌다고 했다.
다미앙은 커피를 마시며 먼 하늘을 보았다.
지금 들은 말을 부정하고 싶은 거다.
진호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카페 입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쪽을 보고 있다.
다 한국인이었다.
'말했구나. 그런데 왜 안 오지?'
마치 수줍은 소녀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선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누군가는 뒤에서 툭 밀어 한 발 나왔다가 재빨리 무리로 돌아갔다.
질시 어린 시선도 있지만, 참 귀여웠다.
피식 웃은 진호는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다가갔다.
"꺄!"
"오, 온다!"
"PD님!"
"난 왜! 야, 이씨! 밀지 마! 밀지 말라고!"
결국 떠밀려나온 삼십 대 중반의 PD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 막 PD가 된 듯한 평범한 인상의 사내였다.
진호는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 안녕하십니까. 이진호 씨. 히야, 진호 씨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여기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혹시……."
"아, 파리에 들를 땐 꼭 한 번씩 찾는 단골집이에요."
PD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오오. 요리 잘하기로 소문난 진호 씨의 단골 가게였군요! 그런데 혹시 저희 프로그램에 대해서 아시나요?"
"죄송합니다. 바빠서 예능을 볼 틈이 없네요."
PD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다른 이들도 아쉬워했다.
"하하하. 워낙 바쁘시니 그럴 수 있죠. 저희 프로그램은 요리 초보들이 파티쉐가 되기 위한 여정을 그리는……."
설명은 장황했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콘셉트였다.
목표는 파티쉐 자격증이라고 했다.
'쉽지 않을 텐데.'
빵의 종주국이라 불리는 프랑스다.
요리에 대한 센스가 없는 이상 몇 달 배운다고 자격증을 딸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다.
"그래서 그런데, 시간이 되시면 저희 애들이 만든 빵을 맛보시고 품평을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요?"
진호는 다급히 손을 저었다.
이곳 주인에게 실례가 되는 행위다.
"부탁드리겠습니다!"
PD가 손을 잡고 매달리자 진호는 난처하게 웃었다.
"제가 그럴 주제나 될지 모르겠지만, 이곳의 주인이신 저분께 허락을 맡으신다면 그렇게 할게요."
"헛! 음……."
"전 그게 먼저라고 생각해요."
"아이고, 그렇죠. 아차차. 죄송합니다. 제가 큰 실수를 할 뻔했네요."
아이돌인 것 같은 어린 6명의 남녀는 뜻을 이해 못한 건지 아쉬워 할 뿐이었다.
그제야 그들을 제대로 살핀 진호는 살짝 놀랐다.
"어? 넌?"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는 머리를 긁었다.
"헤헤헤."
"야, 데뷔했으면 바로 알려 줬어야지."
예전에 JH에서 본 남자연습생이다.
다른 아이돌들이 부럽다는 듯 그를 보았다.
"몇 인조로 데뷔했어?"
"오, 오 인조요."
"혹시 영태와 진성이도 멤버야?"
청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너희 셋이 가장 실력이 좋았잖아."
"가, 감사합니다!"
"그래서 외국어는? 프랑스어 배운 거야?"
흠칫 놀란 그는 슬그미니 고개를 돌렸고, 진호는 코를 씰룩였다.
"야, 형이 공부하랬지?"
"그, 그래도 영어는 좀 해요!"
"그럼 다행이고. 잘 배워. 여기 주인분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아, 알고 있어요. 정말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진호는 대견하다는 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사, 사인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한여성 아이돌의 말에 진호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요. 저도 여러분의 앨범을 받고 싶은걸요."
6명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진호는 그들과 사진도 찍고, 앨범도 받은 후에야 자리로 돌아왔다.
"요리 관련 케이블 채널의 프로그램이군요. 프로그램 제목은 아이돌, 파리에 도전하다군요. 출연자는 신인 아이돌입니다."
다시 헛웃음이 나왔다.
어디서 많이 들은 제목과 유사했다.
"그래도 이목은 제대로 끌고 있나 봅니다. 아직 첫 화가 방송되려면 3주나 남았는데 인터넷 반응이 좋습니다."
"그래요?"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시죠."
* * *
HU 에이전시 임원과의 만남은 불발되었다.
정확히는 뒤로 미뤄졌다. 아르노 와의 만남이 HU 에이전시를 뒤집어 놓은 것이다.
그는 사과의 의미로 한국에서 만나자고 했다.
이렇게 약속이 파기됐지만, 둘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서로 악수했다.
'똥줄 제대로 탔네.'
"이제 치프 디렉터까지 한 발만 남았네요. 축하드려요."
"모두 진호 씨 덕분입니다."
마주 잡아지는 손은 참 억세고 따듯했다.
지이잉!
"아, 죄송합니다."
다미앙이 핸드폰을 들었다.
"예, 장 실장님. 예?"
그의 표정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