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6권 14화
다음 날이 되자 진호는 파리로 향했다.
입국 게이트 앞에 몇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진호는 그중 가장 선두에 선 여성에게 걸어가 포옹을 했다.
쪽쪽!
프랑스식 인사인 비쥬.
볼에 입을 맞추는 게 아니라 소리만 내는 거다.
"오랜만이에요, 오드리."
오드리 끌레르. 피에트로 CEO의 비서다.
"당신이 마중 나을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지니를 마중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제가 와야죠."
"고마워요. 아, 이쪽은 월터. 제 개인 경호원이에요."
"제 고용주의 걱정을 덜어 준 사람이 당신이었군요. 반가워요, 오드리 끌레르예요."
"월터 스미스입니다. 마드모아젤."
둘은 악수를 하며 서로를 인식했다.
그녀의 시선이 진호에게로 향했다.
"지니, The J가 폭풍을 일으킨 거 알아요?"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묻고 싶었던 말이다.
"어느 정도예요?"
"군용무술을 가르치는 곳들 수강생이 전보다 3배 늘었을 정도? 특히 초등학생들이 많아졌다죠."
"아동학대 아니에요?"
한국의 부모들처럼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강제로 학원에 보내는 행위가 프랑스에선 아동학대로 비춰질 수 있다.
"미튜브 영상 못 봤어요? 자발적 이에요. 미래의 내 여자는 내가 지킨다나……."
"푸하핫!"
프랑스에 직접 와야 들을 수 있는 통계들이다.
"누군지 몰라도 만나고 싶네요."
"수배할까요?"
"그렇게 해 주세요."
농담이 아니다. 진심이다.
오드리는 진호의 말을 메모했고, 그들은 공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숙소는 5성급 호텔의 VIP룸이었다.
"모레 저녁엔 제 고용주와 저녁 식사 및 데이트 약속이 있어요. 시간 괜찮으실까요?"
"그럼요."
내일부터 3일을 파리에 체류해야 한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모레 뵈겠습니다. 편히 쉬어요."
오드리가 나가자 월터가 휘파람을 불었다.
"지노 넌 한국보다 프랑스에서 더 대접을 받는 것 같군."
크리스찬 디올.
반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그도 알고 있는 거대 패션 브랜드다.
그런 곳의 CEO 비서가 직접 마중을 나왔다.
"파리가 패션의 도시잖아요."
"미스터 정이 이런 모습들을 봐야 하는데."
월터가 혀를 찼다.
정대리는 가끔씩 할리우드에서 보는 연예인의 매니저와 달리 굉장히 저자세다.
"드라이빙 매니저잖아요."
스케줄 매니저나 카운슬링 매니저로 승진시키고 싶은데, 그가 거부하고 있다.
"흐음. 아, 오늘 밖에 나갈 거야?"
"저녁 즈음에?"
"나갈 때 연락 줘."
"네, 씻고 한숨 주무세요."
월터마저 나가자 진호는 창가로 걸어갔다.
프랑스 시내가 훤히 보인다.
'아름답지만, 그 속을 자세히 보면 더러…….'
"이런…… 후우우."
쇼에서기 전날은 마치 습관처럼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메인으로서의 중압감 때문이다.
그럼에도 쇼에서는 걸 그만두지 않는 이유는 피날레에서 쏟아지는 박수 때문이다.
언제 들어도 짜릿하기 그지없는 박수 소리.
진호는 숨을 길게 내쉬며 신경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단단히 준비한 진호가 쇼장을 찾았다. 리허설을 위해서다.
"진!"
디올 옴므의 수석 디자이너 팀 존스가 다가왔다.
"반년 만이에요, 팀."
"그래요. 알았으니까 얼른 상의부터 벗어 보세요!"
"네?"
"문신! 상처!"
"푸하핫!"
진호는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상의를 탈의했다.
팀 존스는 얼굴까지 꼼꼼히 살피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문신, 상처는 안돼요. 물론 엄청 섹시했지만, 절대 안돼요!"
"푸흐흐. 걱정 마요. 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죠. 어서 들어가 봐요."
"이번 쇼 콘셉트가 뭐예요?"
"아, 먼저 이 무대를 보다시피."
진호는 그의 설명을 귀 기울여 들었다.
모델의 워킹이라는 게 다 똑같아 보이지만, 옷과 무대에 따라 표현 하는 방법이 미세하게 달라진다. 수묵화에 아크릴 물감을 쓰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남자의 워킹과 여자의 워킹도 다르다.
이걸 제대로 표현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모델의 급수가 나뉜다.
설명을 모두들은 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향했다.
백스테이지에 있던 모델과 스태프들이 재빨리 길을 텄다.
"로빈. 에밀리앙."
진호는 아는 얼굴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자리로 향했다.
앳된 외모의 모델들은 1평 남짓한 공간에서서 몸을 푸는 진호를 선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다 놀랐다.
동양인 모델이 진호의 앞에 섰기 때문이다.
"안녕?"
한국어였다.
몸을 풀며 긴장을 끌어 올리던 진호는 살짝 불쾌했다.
이 한 평 남짓한 공간은 자신의 것이다.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헬퍼와 스태프뿐이다.
"아, 네. 안녕하세요."
"반가워. 난 최진기야. 너랑 같은 HU."
"누군지는 알고 싶지 않고, 제 공간에서 나가 주시겠습니까?"
"뭐?"
"처맞고 싶지 않으면 꺼지라고요. 아무리 친하더라도 쇼에선 이 선을 넘으면 안 된다고 못 배웠습니까?"
'여긴 이 모델의 공간이다'라고 바닥에 붙여 놓은 하얀 테이프. 옛날, 그리고 지금도 종종 누군가 모델이 입을 옷을 망가트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렇기에 모델들은 자신만의 공간에 누군가 침입하는 걸 무척이나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그건 진호도 마찬가지다.
아니, 메인 모델이라서 몇 배 더 예민하다.
메인의 옷이 망가지면, 쇼도 망가진다.
더욱이 이건 친구인 팀 존스의 쇼다.
진호가 이런 진심을 담아 이를 드러내자 하얗게 질린 모델은 주춤 물러섰다.
"그래요, 딱 거기. 제게 할 말이 있으면, 거기서 말하세요."
"아, 아니 그게……."
"할 말 없으면 몰입 방해하지 말고 사라지시고요."
"으, 응."
돌아선 모델은 빠르게 사라졌다.
경멸 가득한 시선들이 그를 좇았다.
옆 공간에서 검은 피부의 대머리가 쑤욱 올라왔다.
"진. 아무리 생각해도 넌 정말 착 해. 나였다면 벌써 얼굴을 박살 내 버렸을 거야."
농담이 아니다.
정말 주먹이 날아간다. 그렇다고 되받아쳤다가는 모델들 사이에서 왕따당한다.
"모르고 한 실수잖아."
오늘이 파리 패션위크의 데뷔라는 것이 팍팍 느껴졌다. 그래서 일부러 강렬하게 경고했던 것이다.
"1년차건 뭐건. 흥."
진호는 피식 웃었다.
"이번에 낳은 딸 사진 봤어. 너 안 닮았던데?"
"빌어먹을. 머리 보지 마. 죽여 버리기 전에."
흑인 모델은 중증 탈모다.
"아버지 입이 그렇게 험해서 쓰겠어? 딸이 배운다."
"여, 여긴 괜찮지 않을까?"
"평소에 연습해야지."
맞는 말이라 흑인 모델은 입을 다물었고, 진호는 키득키득 웃었다.
촤악!
모든 이의 시선이 한쪽으로 몰렸다.
진호도 그쪽을 보았다.
"리허설 시작 5분 전!"
눈을 빛낸 진호는 다시 몸을 풀며 긴장을 끌어 올렸다.
아침 10시가 되자 쇼가 시작되었다.
귀가 터져 버릴 만큼 강렬한 비트가 울리고, 그 사이로 구경 온 관객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실수로 손끝이라도 닿았다가는 싸움이 일어날 정도로 분위기가 날카로웠다.
지금 진호는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옷을 걸친 이상 과도한 예민함은 독으로 작용된다.
"이제 진도 관록이 붙은 것 같군요."
물을 마시던 진호는 팀 존스의 흐뭇한 눈빛에 미소를 지었다.
"누구 덕분에 쇼에 선 게 몇 번 인데 이 정도는 해야죠."
"역시 당신은……."
"워워. 남자의 그런 눈빛은 사양 한다고 했잖아요."
"지니 고!"
스태프의 외침이 터졌다.
"오늘도 잘 부탁해요, 진."
"넵."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백스테이지에서 런웨이로 향했다.
오프닝은 언제나처럼 그의 차지였다.
런웨이를 밟는 순간 수많은 관객들의 시선이 전신에 꽂혀 왔다. 상품을 낱낱이 해체해 살피는 듯한 눈빛들.
진호는 자신의 존재감과 옷을 더욱 부각시키며 워킹을 했다.
"아."
"오."
사람들은 감탄을 터트리며 진호에게 더욱 집중했다.
아니 마치 강제적으로 집중을 시키는 듯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 시선들에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누르며 걷던 진호는 순간 워킹이 흔들릴 뻔할 정도로 놀랐다.
객석에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어떤 여성 때문이다.
금발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인상적인 여성.
'로, 로제? 아니, 왜? 응?'
잘못 본 게 아니다.
다인코프 훈련소에서 만난 할리우드 톱 여배우 제니퍼 로제가 맞았다.
턴을 한 진호는 돌아가려는 고개를 억지로 참으며 백스테이지로 향했다.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 * *
그래도 쇼는 무사히, 그리고 완벽하게 마쳤다.
당황했다고 쇼를 망칠 순 없었다.
진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를 만나서 너무 당혹스럽고 반갑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지금 만날 수는 없었다.
다음 브랜드의 쇼에서야 하기 때문이다.
"로제."
-제니로 불러 줘요, 지노.
"그래요, 제니. 여긴 어떻……."
-다음 쇼가 지방시죠? 거기서 봐요.
"아니, 잠깐!"
뚝
진호는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를 직접 만나게 된 건 지방시 패션쇼가 끝난 다음이었다.
"지노!"
옷을 갈아입고 나온 진호는 달려 드는 그녀를 막아 세웠다.
패션쇼장 입구다. 장소가 좋지 않았다.
"진정해요."
기자들의 카메라가 이쪽을 향해 있다.
그들의 눈이 번들거린다.
'하아, 스캔들 확정이네.'
"일단 포즈부터 취하죠."
진호는 기자들을 무시하며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와우, 똑똑해."
피식 웃은 진호는 그녀의 어깨를 감쌌고, 그녀는 진호의 허리에 매 달리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찰칵!
"두 분은 무슨 관계입니까!"
한 기자의 외침에 기자들과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진호가 입을 열었다.
"당연히 친구 관계죠. 제니가 너무 연상이라서 좀……."
까득. 죽일 듯 노려보는 시선이 볼을 찔러 왔다.
진호는 고개를 돌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어, 어서 다음 질문을 읍!"
입이 막힌 진호는 발버둥 쳤다.
"푸하하하!"
"하하하!"
"제게도 무슨 관계냐고 물어봐 주실래요? 아, 너무 어린 동생이 걸음마는 잘하나 걱정돼서 온 거 예요."
다시 웃음이 터졌다.
기자들은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쪽을 보고 포즈 한 번만 취해 주세요!"
둘은 다정히 포즈를 취했고, 기자들은 빠르게 셔터를 눌렀다.
10분 정도 시달린 후 기자들에게서 풀려난 둘은 진호가 아는 한식당으로 향했다.
빈자리에 앉은 둘은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너무 연상?"
"걸음마?"
서로를 노려보던 둘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멋지던 걸요?"
그녀는 진심이었다.
왜 미국에선 틀어 주지 않는지 의문이 들 만큼 잘 찍은 드라마였다.
"아, 해적판. 영화는 어느 정도 찍었어요? 다 찍은 거예요?"
제니퍼 로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내년 여름쯤에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보다 우리 계속 이렇게 서로를 높여야 하나요?"
진호는 피식 웃었다.
"난 성격인 줄 알았죠."
"하아."
진호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녀는 눈을 흘겼다.
"그래서 어떻게 오게 된 거예요? 이쪽에 스케줄이…… 쩝."
"맞아. 너 보러 온 거야, 지노."
그녀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 처럼 매섭게 빛난다.
진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짜 이 매력 어쩔 거야.'
자신은 정말 죄가 많은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