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라이프 5권 25화
8. 아기 고양이
기합과 신음, 거침 숨소리가 울리는 피트니스 짐.
금발의 여성이 치닝디핑(철봉)에 매달려 풀 업(턱걸이)을 하고 있다. 민소매 티셔츠 밖으로 두꺼운 근육들이 역동한다.
"자. 하나 더!"
"끄으윽!"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으아아!"
마지막 하나를 끝마치고 뛰어내린 그녀는 죽일 듯 트레이너를 보았다.
트레이너는 활짝 웃었다.
"십 분 휴식."
"지옥에나가 버려요, 톰."
치켜세워지는 중지가 뻣뻣하다.
"하하핫!"
트레이너가 사라지자 근처 기구에 앉은 그녀, 로렌스 로제는 핸드폰을 들었다. 어젯밤 '나 지금 감독님에게 납치' 외에 부재중인 연락이 하나도 없었다.
"흐으응."
그녀는 옆에 선 매니저를 보았다.
"지아이제인이 한국에도 배급하죠? 북쪽 말고 남쪽."
"……오, 제니. 진은 패션위크에서 볼 수 있다니까?"
"진이 아니라 지노예요."
"진호. 이진호. 한국에선 그렇게 불러."
"……아무튼. 그렇죠?"
매니저는 이마를 잡았다.
"하아. 그렇지. 한국은 언제나 할리우드에 실망을 안기지 않는 시장이니까."
"좋아. 흐흐흐."
그 뻣뻣한 입술과 굳어 버린 혀. 그리고 귀여운 메시지 내용. 퓨어 그 자체였다.
'귀여운 고양이. 아, 호랑인가?'
* * *
와글와글, 우글우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공항. 짜증과 분노로 일그러진 진호의 입이 소리 없이 움직인다.
부르르!
"응?"
주위를 둘러본 진호는 이내 다시 앞에서 걷고 있는 장영진을 노려 봤다.
'사람이 말이야, 응? 연애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썸 같은 거라도 타 보겠다는 건데, 응?'
훈련이 끝나자마자 이렇게 끌려 오게 되었다.
딱 하루만 말미를 달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아오! 핸드폰만 미끄러지지 않았어도!'
역시 내구도 쓰레기인 미국제를 사는 게 아니었다.
"다 들려요, 진호 씨."
"……."
"얌마. 내가 너 잘못되라고 이러겠니?"
"감독님. 저도 이제 스물셋이에요."
훈련소에 있는 동안 새해가 밝아 버렸다.
"여태까지 남들 다 하는 썸 한 번 제대로 못 타 본 제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네?"
"해. 누가 하지 말래? 하지만! The J는 다 찍고 하자, 응?"
코드네임 제이는 The J로 제목이 바뀌게 되었다.
"……노이즈 마케팅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nope."
"하, 진짜 할리우드나 빌보드에 진출해 버릴까?"
"좋다! 다시보기 대박 터지겠네!"
이가 절로 악물어지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숨을 푹 내쉰 진호는 입을 열었다.
"The J, 벌써 중국 판권이 계약됐다면서요?"
"응. 상해 쪽과 계약했어."
그것도 대본과 1화, 2화 콘티만 보고 계약했다.
"더 씨프가 열풍이었잖아."
더 씨프는 중국에서도 대박을 쳤다.
누적 매출 1억 2천만 달러.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필리핀, 태국 등의 동남아로도 수출되었다.
돈을 갈퀴로 쓸어 담는 중이다. 장영진은 진호를 사랑스럽다는 듯 보았다.
더 씨프에서 진호가 차지하는 지분은 30퍼센트 이상이었다.
"여기서는 그런 눈빛 삼가해 주세요, 감독님. 오해해요."
"아. 그렇지, 참."
주위를 둘러본 장영진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여주는 궁금하지 않아?"
순간 솔깃했지만, 이내 힘이 쭉 빠졌다.
생각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고, 마침 선글라스에 모자, 마스크 까지 한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기 오네요, 여주. 세연이."
장영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수혜 이모 포스에 안 눌리면서 객관적으로 예쁜 이십 대 배우는 쟤밖에 없잖아요."
"……어휴. 우리나라도 참 문제야. 배우가 없어, 배우가."
아이돌은 처음부터 논외다.
여자 아이돌이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정말 예쁜 배우에게는 연기와 외모, 모두 밀릴 수밖에 없다. 김윤식에 김수혜. 그 외에도 연극과 영화에서 연기력을 인정받는 배우들이 조연 및 단역으로 포진 해 있다.
노선을 틀어 영화를 찍어도 최소 관객 수 500만.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들켰으니까 하지 마."
"……에이."
세연은 들었던 양손을 내리며 툴툴거렸다.
"우리 진호찡. 잘 지냈쪄?"
"성희롱도 하지 말고."
진호는 엉덩이로 다가오는 손을 쳐 냈다.
"근데 넌 왜 왔냐? 촬영장소를 물색하는 것뿐인데?"
촬영이 시작된 게 아니다.
어떤 사정에 의해 감금된 여주와 어떤 사정에 의해 도망치는 남주가 만나는 처음으로 장소를 찾기 위해 온 것이다.
이국적이면서도 아름답고, 또 어두운 그런 장소.
"……스케줄이 없어."
"에라이."
한숨을 내쉰 진호는 장영진을 보았다.
"일단 호텔부터 가죠."
"굿 초이스. 진호야, 그런데 너 이탈리아어 할 줄 알아?"
"네."
그랬다. 이곳은 이탈리아였다.
날이 어두워지다 보니 요구조건에 맞는 장소 탐색은 무리였다. 식사를 한 셋은 호텔 앞 펍에 모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탈리아야?"
"남주와 여주의 설정이 겹치는 곳이 이탈리아밖에 없어서. 아니면 다 뜯어고쳐야 해."
진호의 말에 장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 최고의 용병인 남주가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활약하는 세계 최고민간 군사 기업의 손에서 도망치려면……."
장영진이 가방에서 세계 지도를 꺼내어 펼쳤다.
펜으로 그린 빗금과 점선, 선이 가득했다.
"어느 정도 치안이 안정되면서 민간 군사 기업의 영향력이 크게 없는 곳. 맞지, 진호야?"
"치안이 너무 좋아서도 안 되고, 너무 안 좋아도 안 되고, 무슬림 영향권이면 더더욱 안 되고."
남주는 중동에서 활약하는 용병이다.
무슬림들에겐 공공의 적이다.
"그러면서 육지를 통해 어디든 갈 수 있는 나라."
이 정보들은 모두 훈련소의 월터와 교관으로 있는 다른 용병들이 알려 준 것들이다.
그리고 진호 자신이 생각해도 이탈리아밖에 없다.
적이 된 민간 군사 기업이 보낸 타격팀을 몰살시키고, 그 소식이 닿기 전에 최대한 멀리 도망치려면 바다밖에 없다.
그 바다를 통해 갈 수 있는 최대거리가 이탈리아다.
이런 진호의 설명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장영진이 뒷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천주교수도원에 갇힌 여주와 만날 수 있는 나라…… 키야! 좋다, 좋아."
장영진은 처음 진호에게서 이 말을 들었을 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는 막연히 중동과 가까운 천주교 나라면 되겠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와. 설정 디테일 봐."
달그락.
이탈리아 만두 요리인 라비올리가 테이블에 놓였다.
진호는 30대의 남자 종업원을 보았다.
"안 시킨 건데요?"
"여기 예쁜 요정께 드리는 제 선물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제 어린 딸이 두 눈을 매섭게 뜨고 있군요. 롬에 온 걸 환영해요, 진."
"하하핫! 고마워요. 제가 따님께 선물을 드려도 될까요?"
"사진 한 장이면 아주 만족해할 겁니다. 니나!"
주근깨가 많은 10대 초반의 귀여운 소녀가 재빨리 다가왔다.
그녀는 들고 온 기타를 내밀었다.
"정말 팬이에요, 진!"
"기타 쳐?"
"……에헤헤."
"듣고 싶은 곡 있어?"
먼 타지에서 만난 팬을 위해 노래 한 곡쯤은 불러 줄 수 있었다.
"저, 정말요?"
소녀는 울음을 터트릴 듯 울상을 지었다.
진호는 라비올리가 담긴 접시를 톡톡 두드렸다.
"공연비도 줬잖아. 듣고 싶은 노래 있어?"
"Shape of You!"
망설임이 없었다.
크게 웃은 진호는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곤 기타를 쳤다.
곧 오직 실력으로 빌보드를 정복한 보컬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휘이익!"
펍에 있던 손님들이 환호를 보냈고, 사인된 기타를 든 소녀는 굉장히 행복한 얼굴로 제 아빠에게 자랑하러 달려갔다.
"왜?"
이쪽을 보는 세연의 눈빛이 멍하다.
"……너 엄청 유명하구나."
"패션에 신경 쓸 나이잖아."
어깨를 으쓱인 진호는 다시 장영진을 보았다.
"그래서 콘셉트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존 윅? 본 시리즈?"
"흠. 아무래도 본 시리즈가 낫겠지?"
"나쁘지 않죠. 본 시리즈는 속도 감과 박진감이 넘치니까."
"그래. 제작비가 넘치는데 본이고, 존 윅이고 문제겠니."
"제작비가 넘쳐요?"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김세연이 놀랐다.
장영진은 편당 제작비가 얼마인 지 알려 주었다.
"사, 삼억? 삼억이요?"
상해 쪽과 계약을 맺으며 편당 제작비가 더올라갔다.
"딱 촬영에 쓰이는 돈만 삼억이지. 출연료나 스태프 월급, CG, 특수 효과 등 나머진 별도. 얼마든 지 청구 가능."
그녀는 이제 경악했다.
최소 150억이라는 소리다.
"……나 엄청난 기회를 잡았구나."
"너밖에 없었던 거야."
퉁명스럽게 말한 진호는 라비올리를 맛봤다.
세연의 눈이 커졌다.
"오, 맛있다."
반죽까지 손수 만들어 숙성한 수제품이다.
"오올. 진호찡. 누나가 그렇게 예뻐요?"
진호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런데 시에 허락은 받았어요?"
"장소 선정하면 받아야지. 그래서."
"네, 도와드릴게요."
탁!
와인이 놓였다.
"제 딸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준 보답입니다."
"하아. 또 제가 와인 고픈 건 어떻게 아시고. 라비을리에는 역시 이탈리아 와인밖에 없죠."
"하하하하하!"
"그렇지! 젊은 사람이 먹을 줄 아는구먼!"
"제가 먹는 걸 좋아하거든요!"
"오!"
펍에 있는 사람들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김세연과 장영진은 진호의 친화력에 혀를 내둘렀다.
* * *
다음 날부터 셋은 로마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5일이 지났을 때, 그들은 촬영장소를 확정 지을 수 있었다. 한국에 있는 연출진에게도 오케이를 받았다.
"역시 기를 쓰고 오길 잘했지."
장영진은 오늘도 혀를 농락했던 이탈리아의 맛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진호가 데려가는 곳은 모두 10점 만점에 8점 이상이었다.
"스태프 분들도 다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리 백지 수표라지만, 아낄 건 아껴야지."
옅게 웃은 진호는 김세연을 보았다.
그녀의 낯빛이 어둡다.
"한국 가면 빡세게 빼라."
"……난 왜 저녁을 먹었던 걸까."
먹을 땐 행복했지만, 지금은 끔찍하다.
여주는 마르고 수척한 외형이기 때문이다.
세연은 지금부터 한 달 안에 최소 5kg을 빼야 한다.
"들어가시죠."
장영진은 긴장했다.
타국에서 촬영 허가를 받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어쩔 땐 허가를 해 주지 않아 도둑 촬영을 할 때도 있다.
물론 문제가 생긴다.
'부디 호탕한 사람이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지만, 담당자의 첫인상은 짜증으로 얼룩져 있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진호를 본 담당자가 눈을 동그랗게 뜬 것이다.
"설마, 진?"
진호는 담당자, 40대 여인의 손에 입을 맞췄다.
"처음 뵙겠습니다. 디올의 요정 님."
그녀가 입은 여성 슈트는 디올의 것이었다.
"……호호호! 진이 이탈리아 남자인 줄은 처음 알았네요."
키가 작으면 요정, 키가 같으면 공주, 키가 크면 여왕. 아주 유명한 말이다. 이탈리아 남자에게 여성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시작점이 이곳 이탈리아니까요."
"……잊지 않았군요."
"잊을 수가 없죠. 그분과는 가끔 연락하고 지냅니다."
처음 진호의 상업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다.
"역시 진은 마음도 훌륭하군요."
20대 남성 모델로서 탑인 진호를 발굴한 나라라는 타이틀은 이탈리아 패션계의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팬을 위해서슴없이 노래를 불러 준 그 마음도……."
'아, 그렇구나.'
며칠 전의 일이 미튜브를 타고 번진 듯했다.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진호가 손짓하자 장영진과 김세연도 허둥지둥 앉았다.
담당자가 차를 내왔다.
"촬영 허가를 받고 싶다고요?"
"네."
진호는 남주와 여주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사연이 꽤 독특하군요."
이탈리아 방송에서 생각지도 못한 설정이다.
"너무 안타깝고, 또 슬퍼요. 특히 안나의 사정이."
"그런 두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교차점이 될 중요한 배경인 이탈리아, 아니 이 로마를 최대한 아름답고 서글프게 표현해 볼까 합니다."
이탈리아가 아닌 로마. 그녀는 로마의 공무원이다.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정말 못 당하겠군요."
"요정님의 마음이 너무 순수하셔서 그런 것 같군요."
"호호호!"
한껏 웃은 그녀는 바로 허락했고, 곧 계약서를 작성했다.
장영진은 만난 지 10분 만에 처리되어 버린 이 일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담당자와 웃으며 악수하고 시청을 나올 때까지 말이다.
"……이번엔 또 무슨 마술을 부렸니?"
"간단해요, 관광객이죠."
한국인 관광객이 늘어나면 모두 오늘 만난 담당자의 공이 된다. 이런 진호의 설명에 장영진은 어이없어 했다.
"뭐가 이렇게 쉬워?"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죠."
진호는 사정을 숨기며 웃었다. 그리고 한 달 후 본 촬영이 시작 되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라이프 6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