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라이프 5권 14화
진호는 모델들의 몸에서 긴장이 사라지는 것 같자 입을 열었다.
"먹으면서 들어. 다음 스케줄은 일단 육체를 쉬게 할 겸 뮤지컬을 보러 갈 거야. 가서 자도 돼."
원래 뮤지컬은 내일 있을 스케줄 이었지만, 스킬을 얻기로 마음먹은 진호가 급히 당겼다. 이건 자비로 계산했다.
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
"그, 그래도 돼요?"
"어. 하지만 난 끝까지 보는 걸 추천하고 싶어. 너희는 일반 모델이 아니라 다방면에 유능한 모델테이너가 되려고 이 먼 뉴욕까지 온 거야. 그것도 베이스는 가장 힘든 하이패션. 맞지?"
모델들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왜 그런 뮤지컬이 성공을 하는지, 서양인들의 박자감이 어떤지, 이들과 나는 뭐가 다른 지를 계속 생각하고 공부하면 좋겠어. 그게 성공의 원동력이 되어 줄 거야. 하지만……."
진호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씁쓸히 웃었다.
"한국에서는 모델이 그렇게 각광 받는 직업이 아니지?"
낯빛이 어두워진 모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호는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모델이란 직업이 가지는 수명은 무척이나 짧다.
모델이 좋아 이 길을 택한 이들이지만, 마음 한편에선 의욕이 꺾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오늘, 한국에서는 프로인 그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레벨이 고작 지망생인 것을 알게 되었다.
좌절했을지도 모른다.
멘토로서 그걸 바로잡아 줘야 했다.
"그러나 여긴 달라. 십 대 애들 열 명을 잡고 물으면 그중 한 명은 모델이 하고 싶다고 말해. 왜? 그만한 부와 명성을 얻거든. 그게 어느 정도일 것 같아? 흠. 로버트를 예로 들어 볼까?"
제작진들마저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로버트가 쇼에 서면 한화로 대략 이억에서 삼억 정도 받아."
"헉!"
"꺄악!"
2억에서 3억. 한국의 레전드 모델들이 말하는 액수다.
서른을 훌쩍 넘긴 레전드들이 받는 페이를 남자에다가 어린 로버트가 받는 거다.
"고작해야 이십 분에 그 정도를 버는 거야. 단위가 엄청나지?"
"예, 예."
"그런데 그런 로버트도 쇼의 메인은 아냐."
"……마, 말도 안돼."
"메인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지불하냐고? 하이패션이 왜 하이패션이겠어. 그 정도 돈을 투자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하이패션인 거야. 그 돈 벌고 싶지 않아?"
순간 남녀 모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겠어?"
"……예!"
"좋아. 그럼 출발. 기사님, 출발해 주세요!"
피디와 제작진은 단숨에 모델들을 휘어잡아 버린 진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 * *
memory!
들고양이처럼 분장한 늙은 여배우의 탁하면서도 서글픈 목소리가 공연장을 울린다.
진호는 그 호소력에 눈물을 주륵 흘리고 말았다.
'왜 원작을 봐야 한다고 말하는지 알겠어.'
한국에서 본 켓츠와 곡 해석부터가 다르다.
해석은 비슷할지라도 표현하는 감성이 다르다.
그 손끝과 발끝, 하물며 비틀어진 꼬리 끝마저 완전 딴판이다.
그 감동은 1차 해금 조건인 '뉴욕에서 뮤지컬 열 편 감상하기'의 카운트가 시작됐다는 생각을 저 멀리 날려 버릴 정도였다.
'진짜 왜 고르고 고르고 골라서 배우를 뽑는지 알겠네.'
모두 그냥 고양이다.
인간이나 뮤지컬 배우가 아니라 뒷골목의 들고양이들이다.
"와, 정말 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네."
한 마리의 하양이가 되어 저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진호는 들썩이는 엉덩이를 참지 못하고 결국 하양이에 빙의 되어 주먹으로 볼을 비볐다.
그 순간 흠칫 놀란 몇몇 배우가 이쪽을 보았다. 진호는 얼른 하양이를 눌렀고, 그들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가 이내 다시 맡은 연기를 했다.
진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안해라…… 그런데 진짜 미쳤네."
신경이 날카로운 것까지 들고양이와 똑같다. 스포트라이트가 비추 건 비추지 않건 그들은 각자 맡은 고양이로서 움직이고 있었다. 세계는 이런 레벨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저 정도까지 고양이에 빙의되어 있으면 페로페로몬이 통하려나?'
썩 궁금하기는 했다.
진호는 슬쩍 옆을 보았다. 무대를 뚫어지게 노려보는 아이들의 모습은 절로 웃음이 나오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뮤지컬이 끝나자 기립 박수를 친 진호는 울컥 울컥 치솟는 연기에 대한 갈망을 꾹 누르며 아이들을 데리고 피트니스 짐으로 향했다.
"하이패션 모델은 마르기만 해선 결코 성공할 수 없어. 말라도 탄탄 해야 해."
진호는 상의를 벗어 자신의 몸을 보여 주었다.
사람들은 넋을 놓았다.
"이게 세계가 인정하는 하이클래스의 몸. 너희 몸은 미들아니 주니어 클래스도 안돼. 모델에게 가장 큰 자산인 몸조차도 너흰 이 무한 경쟁의 세계에서 출발선 조차 서지 못한 거야."
"……."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질 거야. 여기 이분들이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진호는 늘씬한 몸을 지닌 남녀 트레이너들을 가리켰다.
론 잭슨과 똑같은 표정을 한 그들의 모습에 모델들은 몸을 움츠렸고, 진호는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먹었으니까 빼야지?"
"……자, 잠깐?"
'밀리미터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얘들아.'
* * *
오늘 저녁 스케줄은 댄스였다. 양진혁 사장은 미튜브에서 제법 이름을 알린 댄스 아카데미의 트레이너를 고용했다.
그다음은 유명 스포츠마사지 센터에서 마사지를 받고, 피부 숍에서 피부 관리도 받았다.
그러고 나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언제나처럼 주린 배를 부여잡은 모델들은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의 심정은 얼떨떨함 그 자체였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대우.
피부 숍의 피부 관리 비용은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우, 우리가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걸까?"
"……."
그들 자신도 분명 달에 수백만 원의 돈을 소속사에게 안겨 준다. 하지만 가수들과 비교하면 개미 눈곱만큼도 안 되는 액수다.
그런데 오늘 받은 피부 숍의 피부 관리 비용이 1회에 한화로 50 만 원이다. 물어보니 스포츠 마사지사도 셀럽들을 마사지하는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물론 좋았다. 단 하루지만 매일같이 이런 관리를 받으며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만큼 부담도 되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라서 잠 들지도 못했다.
"이러다가 떨어지면……."
2층 침대에 앉은 10명의 남녀 모델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이런 투자를 했는데도 경쟁에서 떨어진다면 소속사는 자신들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JH의 비호가 사라진 우리는 뭐가 되는 거지?'
그써 그런 모델 일도 할 수 없을 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들은 덜컥 겁이 났다.
"무, 물어볼까?"
똑똑똑.
흠칫 놀란 모델들이 문을 보았다.
"네, 나가요!"
다급히 문을 연 그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진호가 문 앞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진호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역시라는 생각을 가졌다.
"들어가도 되지?"
"네, 네!"
안으로 들어온 진호는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오늘 하루 미들 클래스 모델의 관리 코스를 경험해 본 소감이 어때?"
모델들은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미들 클래스라고요?"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어. 그리고 내가 받는 코스기도 하지."
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더 불안해졌다.
진호는 입을 열지 못하는 그들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불안해?"
"……."
"떨어지면 쫓겨날 것 같아?"
"……."
"그럼 나한테 와. 계약해 줄게."
그들은 깜짝 놀라 진호를 보았다. 그들 눈에는 불신이 서려 있다.
"왜? 내가 너희보고 안심하라고 하는 말 같아? 멘토라서?"
……끄덕.
"아니, 전혀. 고르고 골라져 JH와 계약을 맺었고, 거기서 또 골라져 이 프로그램에 참가했기 때문이야. 너흰 재능 있어. 즉, 너희들 중 누군가 일 차에서 떨어진다고 해도 소속사는 포기 안 해. 단 며칠이라도 좁은 우물에서 나와 세계를 겪어 본 너희를 소속사가 포기할 것 같아? 그럼 나야 땡큐지."
이건 진심이다. 직원들의 능력이라면 최소 한국에서만큼은 중간 이상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지, 진호 씨!"
피디가 급히 입을 열었지만, 진호는 손을 들어 말렸다.
진호는 성공이라는 명목하에 참가자로 하여금 피 말리는 신경전을 하게 만들고 물어뜯게 만드는 이런 식의 예능이 싫었다.
그런 게 아니라도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경쟁하고 치열해질 수 있었다.
"그저 너희들은 결정하면 되는 거야. 덜 배운 상태로 멈출지, 아니면 끝까지 살아남아서 오늘 같은 대우를 당연히 누리며 살지. 경쟁? 그딴 거 하지 마. 안 해도 돼."
"……예?"
앞의 말에 생각에 잠기려 했던 모델들과 제작진은 멍해졌다. 진호는 코웃음을 쳤다.
"왜 쓸데없이 경쟁해서 심력을 소모하고, 상처 입어? 그냥 상대 보고 쉬라고 유혹해. 요령 피우라고 설득해. 숨겨 놓은 초콜릿 쥐여 주고, 만화책 하나 선물해. 없으면 나한테 와. 많이 사 놨어. 그리고 몰래 노력해. 그럼 돼."
모델들의 얼굴은 펴졌고, 제작진은 어이없어 했다.
피디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든 상대를 쉬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10명의 참가자들.
'이런 구도도 재밌을 것 같은데? 아니, 신선해!'
피디는 흥분해서 참가자들을 둘러보았고, 진호를 보며 혀를 내둘렸다.
"어차피 너희 떨어져도 한국 안 가. 아카데미에서 같이 배울 거야."
"예, 예?"
"저, 정말이요?"
"진호 씨!"
피디가 다급히 외쳤지만, 진호는 이번에도 무시했다.
"생각 좀 해라. 너희들 전부 최종 우승자 런웨이를 감상해야 그림이 사는데, 개인당 수백만 원씩 들여 한국에 보내고 다시 수백만 원씩 들여서 뉴욕에 보내겠냐? 여기서 머무는 게 훨씬 싼데? 맞죠, 피디 님?"
"그, 그건 또 어떻게 아신 겁니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잖아요. 얘들이 생각을 안 하는 거지."
진호는 한심하다는 듯 모델들을 보았고, 그들은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까 전보다는 얼굴이 백배 밝았다.
'떨어져도 그 수업을 받을 수 있다는 거야?'
진호가 말한 세계 클래스의 수업.
"대신 떨어진 놈들은 미들 클래스에서만 교육을 받는 거야. 하이 클래스 수업은 절대 못 받아. 정말 모델에게 필요한 최고 노하우만 집약된 수업을. 물론 다른 분야의 수업들도."
"……."
진호는 눈동자가 흔들리는 그들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이 정도면 동기 부여로 충분했다.
"잘 생각해. 나아갈지 멈출지는 너희가 선택하는 거야. 난 그런 너희를 서포트할 뿐이고."
의자를 원래 자리에 놔둔 진호는 문을 닫고 나갔고, 번뜩 정신이 든 모델들은 서로를 보았다.
"……하아암. 어이구, 피곤해라. 다들 안 피곤해? 안 잘 거야?"
"어디서 개수작이세요."
"누구 맥주 마실 사람? 내가 가져다줄게!"
"응, 꺼져."
서로를 노려보며 하는 그들의 대화에 피디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림이 미친 듯 살고 있다. 그런데 이게 시작이다.
지금이야 서로 어설프게 수작을 걸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수법이 다양해지고 더 은밀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판을 진호가 몇 마디 말로 만들어 버렸다.
'예능계의 블루칩이라더니…….'
판을 엎어 버리고 새로 짜 버렸는데, 그게 더 재밌다.
호불호조차 갈리지 않을 확률이 크다.
시청률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웃긴 점은 아직 진호의 진면목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거다.
진호를 예능계의 블루칩으로 만든 그 수많은 재능들. 그리고 새로운 예능마다 새롭게 튀어나왔던 장기들.
'만약 이번에도 새로운 장기를 선 보이면?'
……오싹!
마른침을 삼킨 피디는 워킹을 연습하거나 영어 회화 책을 편 모델들을 보았다.
'……얘들, 오늘 안 자겠는데?'
최소 새벽 3시까지 안 잘 거란 거에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