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라이프 5권 9화
* * *
저녁이 됐다. 낮 촬영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제부터 낮에 목표물의 위치를 확인한 도둑들이 각자의 욕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장면들이 펼쳐진다.
지금 찍는 장면은 미스터 장이 옛 연인 카스를 돌려보내려 무리한 요구를 하는 신이다.
미스터 장이 작은 자물쇠가 달린 백을 두드리며 말하자 그의 단호한 태도에 다음을 기약하며 몸을 돌렸던 카스가 다시 획 몸을 돌려 성큼성큼 다가가 꺼낸 면도칼로 백을 그어 버렸다.
말문이 막힌 미스터 장의 눈동자와 얼굴 근육이 복잡한 감정을 담아 흔들린다.
"오케이. 컷!"
스태프들이 막았던 숨을 쉬자 진호도 숨을 길게 토해 냈다.
"어때?"
장영진 감독이 옆구리를 툭 쳤다.
이 대사는 진호의 '절단기' 발언에 의해 나왔다.
"……으흐흐."
장영진은 그 맘 다 안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는 닦았어?"
덜컥!
진호의 몸이 굳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문이 열리며 김주아가 고개를 내밀었다.
"우리 진호 어디 있…… 여기 있네?"
목표물을 발견한 김주아의 두 눈에선 사심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감정을 유지하던 김윤식과 김수혜가 빵 터져 버렸다.
"워후. 부럽다!"
"어머, 주아는 좋겠네!"
"좋기만 할까요. 스으음."
마치 먹이를 노리는 암사자의 눈빛 같다.
"……."
"큭큭큭. 내가 정말 신경 써서 대본 썼다, 진호야. 고맙지?"
'안 고마운데요! 나는 좀 더, 좀 더 좋은…….'
"우리 애기. 올라가야징?"
"그래, 진호야. 이 감독님도 곧 따라 올라갈게! 준비하고 있으렴?"
"……네."
"푸하하하하!"
"크크크크크!"
그냥 다 미웠다.
어깨를 늘어트린 진호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왔어요? 자, 상의 벗어요."
"네."
진호는 분장 스태프의 말에 입고 있던 민소매 티를 벗었다.
"워후."
"워."
방에 있던 분장 팀과 따라온 김주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제로는 처음 본 진호의 몸은 영상으로 봤던 것보다 더 선이 굵고 아름다웠다. 얼굴이 절로 풀어 진 그들은 급격히 회의에 들어갔다.
"벌크 업을 안 해도 되겠는데요?"
"응. 그냥 피부 톤 다운시키고 물만 뿌리면 되겠다."
"어휴. 드디어 저 몸을 만지는구나. 주아 씨 진짜 부럽네."
"내가 또 이 맛에 배우 하죠! 으하하하!"
진호는 조용히 어깨를 두드려 주는 남자 스태프들의 따뜻한 손길에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자, 진호야. 분장하자."
"……네."
분장 도구를 들고 다가오는 스태프들이 마녀처럼 보였지만, 진호는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최동진과 장영진 감독이 올라오고, 오늘 이 건물에 있는 모든 배우들이 몰려왔다.
그들의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진호야! 한 번에 가자. 좋다고 막 NG 내고 그러면 안돼."
"아, 진짜 다 나가 주세요!"
"푸하하하하!"
"크크크크크!"
스태프까지 웃음을 터트렸지만, 진호만은 그럴 수 없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달아오른 얼굴이 가라앉지 않기 때문이다.
'생에 첫…….'
"큭큭. 자, 그럼 스탠바이 들어갑니다! 얼른 찍고 다음 신 가야지. 아, 갈 수 있으려나?"
다시 웃음이 터졌다.
원망하듯 최동진 감독과 장영진 감독을 본 진호는 이쪽을 보며 음흉하게 웃고 있는 김주아를 외면하며 장파오에 몰입하려고 애썼다.
'난 장파오다. 난 장파다.'
"난 장파…… 아오. 씨."
"……푸하하하하하!"
사람들은 배를 잡고 굴렀다.
정말 얄미웠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딜레이 시킬 수 없었다.
숨을 길게 토해낸 진호는 '리얼, 정글에 가다'에서 살았던 정글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장파오를 꺼내었다.
'한 번에 가자. 이건 연기야. 실제가 아니야.'
진호의 눈빛이 변하자 사람들은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눈으로 진호를 응시했다.
"자. 롱 테이크, 한 번에 갑시다. 주아 씨는 베란다에 나가시고, 진호는 자리 잡고 푸쉬 업…… 흠. 진호야, 물구나무서서 푸쉬 업 할 수 있어?"
"아, 예. 가능합니다."
"오케이, 그럼 그걸로 가자."
음흉한 눈빛 대신 예리콜이 되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은 김주아가 베란다로 나가자 진호도 물구나무를 서서 푸쉬 업 자세를 취했다.
진호 몸의 근육이 역동하기 시작 했고, 사람들은 속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액션!"
그 외침은 귓속으로 빨려 들어왔다가 사라져 버렸다.
공간이 적막에 빠져들자 진호는 팔을 굽혔다 폈다.
마치 다리에 줄이 묶여 천장에 걸린 듯 그의 몸이 내려갔다가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훅! 훅! 훅!"
덜컹!
문이 열리며 김주아가 들어왔다. 고개를 돌린 진호는 갑자기 베란다에서 나타난 예리콜을 보며 살짝 놀랐다.
"오, 우리 새끼. 헛짓 안 하고 운동하고 있었어?"
자신을 남자로 보지 않는 듯 장난스러운 말투.
그렇게 어필했음에도 서슴없이 말을 하는 그녀.
'씨.'
울컥 가슴에 불이 타올랐다.
탁 몸을 일으킨 진호는 긴 머리 칼의 그녀를 쫓으며 입을 열었다.
"야."
"응?"
몸을 돌린 그녀의 눈빛은 남자 방에 들어왔음에도 무방비했다. 그게 더욱더 화나게 했다.
진호는 그녀의 뒤통수와 허리를 거칠게 잡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허…… 읍?"
입술에 닿는 기대 그대로의 보드랍고 말캉한 입술.
맨 가슴에 닿는 말캉한 가슴.
"으음?"
입안에서 울려 퍼지는 예리콜의 목소리가 이성의 끈을 끊어 버렸다. 진호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움직이며 그녀의 입술을 더욱 파고 들었다.
"음. 흐음."
가슴을 여유 가득 톡톡 두드리는 손톱이 아주 길었던 시간이 끝났음을 알렸다.
쪼옥!
"후우."
진호는 어떠냐는 듯 예리콜을 보았다.
살짝 당황해을려다보며 입술을 훑는 그녀의 모습이 굉장히 만족감을 안겨 줬다.
'눈동자도 크네.'
"하아아. 넌 분명히 내가 당황할 거라고 생각할 거야."
코웃음을 친 그녀는 여유로운 듯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니야. 왜? 어려서부터 종종 이런 일을 겪었기 때문이지."
혀가 길다.
언제나 자신을 남자로 보지 않았던 예리콜이 당황한 모습은 굉장히 귀여웠다.
그녀가 몸을 돌렸다.
"너 이 쉑. 키스할 때 입술에 힘 좀 빼라."
비웃는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벽에 팔을 기댄 진호는 그런 그녀의 등을 보며 입술을 매만졌다. 입가가 꿈틀거리며 펴졌다.
첫 키스의 추억은 쌉쌀한 포도 맛이었다.
"오케이. 커엇!"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터지자 사람들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배우들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에이. 첫 키스가 아니었네."
"우리 진호. 키스는 언제 해 봤을까? 응? 이 삼촌한테만 말해 봐."
"난 그 연애 반대야!"
밖으로 나갔던 김주아까지 돌아와 외쳤지만, 진호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첫 키스.'
장파오에게서 벗어난 진호는 멍하니 입술을 쓸었다.
사람들이 왜 키스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심장이 거세게 박동하고 온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뭐랄까, 굉장히 설레면서도 부끄러웠다.
김주아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어라?"
"오호?"
실망했던 배우들의 눈빛이 변했다.
그들은 최동진 감독을 보았다.
"감독님. 좀 약하지 않았어요?"
"그러게. 상남자 장파오가 너무 얌전하네."
순간 머릿속에 벼락이 친 진호는 급히 배우들을 보았다.
"자, 잠깐?"
안 된다. 한 번 더 하면 수치사 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 한통속이었다.
최동진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은 열의로 빛나고 있었다. 약간은 어설펐던 장파오의 키스. 너무 좋았다. 하지만, 더 좋은 장면이 나올 수 있었다.
"그렇지. 상남자 장파오치고는 좀 약했지. 진호야, 이번엔 키스가 끝날 때 주아 씨 아랫입술을 쭉 빨아 봐. 주아 씨, 괜찮지?"
"저야 땡큐죠! 진호야, 물지만 마?"
"아, 안 물어요! 잠깐만요! 에이, 이건 아니죠!"
"자, 스탠바이합시다!"
"감독님!"
진호의 외침은 그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재촬영은 확정되었다.
* * *
오늘 찍을 모든 촬영이 끝났다.
안젤리카가 맞은편 건물 옥상에서 감시하는 것까지 말이다.
숙소로 돌아온 최동진 감독은 오늘 찍은 장면을 모니터링하면서 푸크크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맥주 캔을 들고 오던 장영진 감독이 의아해했다.
"이거 봐, 형."
모니터를 본 장영진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될 대로 되라 체념한 진호가 찍혀 있었다.
"이게 다섯 번째 NG였나?"
"주아만 계 탔지."
모든 NG는 진호가 아니라 김주아가 냈다.
키스하던 중 웃음을 터트리거나 진호의 옆구리를 간질이거나, 자세가 이상하다고 고친 적도 있다. 덕분에 이 장면만 7번을 찍어야 했다.
"그리고 확실히 가르쳤고."
최영진의 말에 장영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진호는 키스 신을 찍어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찍는 건 어떠냐며 의견을 내기 시작할 것이다.
찍는 사람 입장에서는 좋을 수밖에 없다.
"진짜 형이 추천한 이유가 있었네."
처음 미팅을 했을 때, 그가 장영진에게 한 말이다.
겨우 이틀 촬영했지만, 모든 샷이 이보다 베스트일 수 없을 만큼 제대로 뽑혔다. 모든 배우들이 손끝 하나까지도 완벽히 캐릭터에 빙의 해 있었다.
모두 진호 때문이다.
같은 배우가,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배우가 동선을 지적하고 행동을 지적하고, 발음을 지적하니 모든 배우들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고 있었다.
그는 이제 진호를 온전히 인정할 수 있었다.
"아, 이러면 시간이 너무 남게 되는데……."
하루 찍으면 하루 쉬는 스케줄. 이건 촬영이 딜레이될 때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스케줄이지 정말 쉬라고 만든 게 아니었다.
"얌마, 시간이 남으면 좋은 거지. 뭘 아쉬워하고 있어?"
온전히 쉬게 됨으로써 작품을 더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엄청난 축복이었다.
"그렇지?"
"당연하지."
칙.
맥주를 딴 둘은 건배를 했다.
"크으. 좋다."
이렇게 촬영 중 한 잔 마실 수 있는 여유를 가진 게 대체 몇 작품 만인지 몰랐다.
"그나저나 우리 복덩이 진호는 뭘 하고 있을까?"
장영진은 안주를 씹으며 미소를 지었다.
"혈기 넘치는 이십 대가 첫 키스를 했는데, 뭘 하고 있겠냐?"
최동진 감독은 웃음을 터트렸다.
"흐윽! 흡! 흡!"
땀으로 가득한 몸이 움직이고 있다.
번들거리는 근육이 역동하고 있다.
"이백삼십일. 이백삼십이. 이백삼십삼. 에이씨!"
물구나무선 몸을 원래대로 되돌린 진호는 머리를 강하게 털었다. 입술이 자기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입술과 맨 가슴에 닿았던 감촉이 불쑥불쑥 떠오르기 때문이다. 입안에 남은 향기가 계속 목을 마르게 하고 있었다.
"열여덟 살 차이잖아. 진호야. 이모야, 이모. 응? 아오……!"
머리를 쥐어뜯은 진호는 화장실로 가 찬물을 틀었다.
쏴아아아아!
아무래도 찬물이 답이었던 것 같다.
입술에서 화인처럼 떠오르던 감촉들이 먼지처럼 옅어졌다.
"어우."
몸까지 개운하니 맥주 한 캔 마시고 한숨을 푹 자고 싶었다.
'흠,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입술에 힘 좀 빼라'라는 말이 이해되기 시작하더니 입술과 혀가 액체 괴물처럼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혀만 이용해서 체리의 꼭지를 매듭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덕분에 김주아에게 '사귄 년이 누구야!'라는 말을 들었다.
'이것도 지성이면 감천이다의 영향인가?'
[스킬 :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호스트로서 밤의 제왕이 되는 스토리의 스킬이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흐음, 흠."
"네, 나가요!"
'누구지?'
문을 여니 이재정과 김윤식이 있었다.
'아, 놀리러 오셨다.'
굳이 [스킬 : 셜록의 후예]가 아니어도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니 알 것 같았다.
"불끈불끈하지?"
"혈기나 발산하러 가자. 아저씨가 물 좋은 곳 알고 있다."
이 아저씨들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
물론, 남자다 보니 관심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어?'
"……카지노?"
움찔, 그들의 몸이 살짝 굳었다.
"거봐요. 내가 말했잖아요, 진호 한테 거짓말 안 통한다니까."
이재정이 손을 내밀었고, 김윤식이 아쉬워하며 500홍콩 달러를 그 손 위 얹었다.
"인마. 이 아저씨들이 놀리려고 하면 어? 모른 척 속아주기도 해야지, 어?"
"으흐흐. 죄송합니다. 그런데 괜찮겠어요?"
미국의 라스베이거스도 아닌 마카오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무척이나 많은 곳이다.
아무리 여행 비수기라고 하더라도 자칫하면 기사가 써진다.
"……조용히 놀면 되지 않을까? 베팅도 적게 하고."
진호는 그제야 알게 됐다. 김윤식, 이재정 둘 모두 카지노를 별로 안 가 봤다는 사실을 말이다. 굉장히 놀라웠다. 그리고 불안했다. 물론 가고 싶었다.
도박의 도시 마카오다.
슬롯한 번 당겨 보지 못하면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었다.
낯빛이 흐려지는 둘을 보니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진호는 씩 웃었다.
"그럼 저희 분장하고 가실래요?"
"분장?"
진호의 미소는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