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4권 25화
* * *
진호는 다음 날, JH로 향했다. 다미앙도 함께였다.
다미앙과 양진혁 사이에 꽤 설전이 벌어졌고, 결국 두 회사는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게 됐다. 서로 만족한 결과였다.
계약을 채결한 다미앙과 양진혁은 악수를 나눴다.
"저희 진호 씨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제 직원들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 끝났죠? 가자, 진호야!"
"네! 그럼 수고하세요, 다미앙 씨!"
진호는 레오를 따라 JH의 제1 녹음실로 향했다.
"일단 이거부터 들어 봐."
"뭐가 그렇게 급해요. 오늘 시간 많아요."
"크흠."
"자, 이거부터 드시면서 심호흡하세요."
손수 만든 쿠키와 음료를 넘겨준 진호는 기계 앞에 앉으며 헤드셋을 썼다.
"이걸 누르면 되죠?"
"응."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버튼을 눌렸다.
레오는 쿠키를 아삭 깨물며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후우."
진호의 한숨 소리가 녹음실을 크게 울리자 레오는 덜컥 심장이 떨어지는 걸 느꼈다.
"나, 나빠? 그렇게 안 좋아?"
헤드셋을 벗은 진호는 낯빛이 어두운 그를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뭘 그렇게 실망해요? 엄청 좋은데."
"그런데 왜 그렇게 반응해! 놀랐잖아!"
"너무 좋아서 힘이 빠진 거예요. 와, 형이 이런 곡도 쓸 줄 아는구나."
'더 원'의 이미지처럼 파격적이고 강렬하지 않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레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 그래? 하하. 그게 딱 3시간 만에 나온 거야. 제목은 '만약 너 라면'. 프랑스어로 si tu. 네가 프랑스어 잘하니까 프랑스어로 지어 봤어."
제목도 좋았다.
"가사 나왔어요?"
"거의 나왔어. 이건 일단 초본."
가사를 읽어 본 진호는 곧 빠져 들었다.
머릿속에서 방금 들은 음원과 가사가 버무려지기 시작했다.
"……미쳤는데요?"
지금 당장이라도 녹음해 보고 싶었다.
현역 아이돌 중 최고의 프로듀서도 앞에 있다.
레오의 어깨는 이제 더 이상 펴질 수 없을 만큼 펴졌다.
"그래도 지금은 안돼. 가사를 더 다듬어야 해."
진호는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짓이 줬다가 뺏는 거였다.
'이건 뭐 당나귀 앞에 드리워진 당근 낚싯대도 아니고.'
눈앞에 있는데 먹지 못하는 그 심정이 의도치 않게 이해되었다.
"자, 그럼 JH 안내해 줄게. 전에는 여기 녹음실만 봤었지?"
"오."
앞으로 사무실 크기를 늘리다 결국 건물을 사게 됐을 때, 많은 참고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구석구석 살펴본 진호는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가장 눈길이 갔던 건 역시나 식당이었다.
식당 때문이라도 입사하고 싶다는 말이 나을 만큼 잘 나온다는 JH의 구내식당.
직접 밥을 먹어 보니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확실하게 이해가 되었다.
"여기 직원들은 좋겠다."
아버지 이형만이 직장 생활 중 가장 고민하는 건 점심 메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긴 한 달 내내 매일매일 메뉴가 다르다.
'아, 승부욕 생기네.'
진호도 쉬는 날 회사에 있으면 직원들에게 식사를 차려 주기 때문에 묘한 호승심이 생겼다.
'좋아. 내일부터는 인도 요리도 추가한다.'
"연습생들도 좋아하지. 아, 연습생들 보러 갈래?"
"그래도 돼요?"
"걔들도 좋아할 거야. 네 팬 많거든."
"오. 사진 찍어야겠네요."
"그래 주면 고맙지. 마음에 드는 애 있으면 뺏어가도 돼."
순간 훅 끌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데, 무슨.'
그래도 기대감이 들었다.
옛날에는 실력파만 뽑았는데, 지금은 비주얼까지 좋기로 유명한 JH 엔터테인먼트다.
과제가 생길 때마다 남자처럼 쉰 내 풀풀 풍기며 돌아다니는 대학 여자 동기들과는 달리 꽃향기가 날 게 분명했다.
여자연습생의 연습실 문을 열 때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꺄악!"
"엄마야!"
'크헉!'
꽃향기가 나지 않았다.
춤 연습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앳 된 얼굴들은 참 예쁜데, 냄새는 예쁘지 않았다.
진호는 자신도 모르게 방향제를 찾았다.
모든 걸 알고 있는 레오가 연습실 한 곳에 놓인 방향제를 들고 와 진호의 주위에 뿌렸다.
척! 칙! 칙!
여자연습생들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꽃 냄새는 안 나지?"
"하하하."
차마 빈말이라도 꽃 냄새라고 포장할 수 없는 냄새였다.
"얘 알지?"
"네!"
여자연습생들은 마치 군대처럼 군기가 바짝 들어 대답했다.
"사진 찍고 싶으면 옷 갈아입고 와. 다른 팀들에게도 전해."
"네!"
"와아아!"
여자연습생들이 우르르 몰려나 가자 레오는 일단 창문부터 열었다. 진호도 같이 열었다.
"이해해. 지금은 방학이라서 아침 8시부터 연습했으니까 땀 냄새가 심할 수밖에 없어."
놀라운 말이었다.
"몇 시까지 연습하는 거예요?"
"10시."
더 놀라운 말이었다.
"그리고 여기가 A팀. 거의 데뷔 조라고 생각하면 돼."
"아, 그 시스템에 대해서는 장 실장님에게 들었어요."
대형 기획사는 A부터 D까지 클래스를 나눠 월말마다 평가해 승급시키기도 하고, 하위 클래스로 내려 보내기도 한다고 했다.
굉장히 치열하고 혹독한 시스템.
다시 한 번 대형 기획사와 계약을 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이 되면서도, 연습생들이 흘리는 땀과 눈물을 보자 절로 더 열심히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배우 연습생은 키우지 않나 봐요?"
진호가 알기로 JH에는 배우 파트도 있다.
"키우지. 방금 걔들 사이에 섞여 있었어. 연기자라도 춤 정도는 출 줄 알아야 한다는 게 우리 사장님 생각이거든."
"아하."
이해가 갔다. 양진혁은 소속 배우가 오디션에서 어필 할 수 있는 무기를 하나라도 더 장착시키려는 거다.
JH라고 해서 소속 배우를 모두 주연이나 조연으로 꽂아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좋은 분이네요."
"안 그랬으면 재계약 안 했지."
맞는 말이다.
이윽고 옷을 갈아입은 연습생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그 짧은 사이에 화장을 했는지 얼굴이 하얗고 입술도 붉었다.
딱 학생들이 잘하는 화장법이었다.
진호는 그들과 일일이 사진을 찍고 사인도 해줬다.
대부분 가까이 오는 것도 수줍어 하는 아이들이라 참 귀엽고 예뻐서 진호는 그들에게 피자와 치킨을 쐈다.
피지컬 트레이너의 눈이 도끼날 처럼 떠졌지만, 진호의 장화신은 고양이 같은 눈빛에 큰 충격을 받고 물러나야 했다.
진호와 레오는 그들 사이에 앉아 피자와 치킨을 뜯었다.
"저기……."
"응, 말해."
"오빠는 한국대 수석 입학을 하셔 놓고 연예계로 오셨잖아요. 그 이유가 있어요?"
연습생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진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역시 답은 재밌었기 때문이지. 사진을 찍히는 게 좋았고, 런웨이를 걷는 게 좋았어. 수많은 관객들이 나를 보며 환호해 주던 그 희열. 공부는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여긴 20대가 아니면 힘들 것 같아서 도전한 거야."
"그, 그렇게 데뷔하셔서 계속 성공하고 계시잖아요."
"성공은 무슨. 아직 자리도 못 잡았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진호는 그제야 연습생의 눈을 똑 바로 봤다.
지금쯤 무슨 대학에 합격했을지 궁금한, 연말 홍대에서 본 여고생의 눈빛과 똑같았다. 성공에 대한 불안감.
"똑똑하니까."
[스킬 : 전국 수석]을 첫 스킬로 얻은 건 정말 신의 한수였다.
"……네?"
연습생들 모두 눈빛이 멍해졌다.
"머리 좋은 것과 연예계에서의 성공이 큰 상관 없을 것 같지?"
"그, 그렇지 않나요?"
"절대 아니야. 여기 레오 형 봐. 작곡 잘하지? 연기 잘하지? 춤 잘 추지? 춤 같은 건 한 번만 봐도 외우지? 안무도 척척 짜내지?"
진호가 하고자 한 말을 알아들은 여자연습생은 입을 다물었다.
"……."
"지금 네가 현재 뭘 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지금 배우는게 진짜 네게 되는 거야."
진호는 연습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공부를 잘하라는 게 아냐. 최소한 자신이 지금 뭘 배우고 있는지 라도 이해하면 되는 거야. 머리는 후천적으로도 똑똑해지니까. 똑똑 해지면 습득이 빨라지고, 빨리 습득하면 남들보다 더 많은 여유 시간이 생겨. 그럼 남들보다 더 생각 할 수 있지."
물론 타고난 것을 뛰어넘을 순 없을 테지만 말이다.
진호는 어느새 이쪽을 몰입한 연습생들을 향해 양 주먹을 들었다.
"똑같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 두 명 있어. 한 명은 그 재능을 믿고 노력을 안 하고, 한 명은 계속 노력하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이 익히고 있는 것을 더 많이 알게 됐어. 이 차이는 처음엔 드러나지 않아. 하지만 그게 1년이 되고 2년이 되고 5년이 되면 어떨까?"
진호는 양 주먹을 하늘과 땅으로 향하게 하며 격차를 보여 줬다. 연습생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진호는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생각한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거야. 그리고 이왕이면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좋고. 특히 외국어."
양진혁에게도 말한 외국어. 의아해하는 그들을 보며 진호는 씩 웃었다.
"너희들이 그룹으로 데뷔했어. 일본이든 중국이든 가겠지?"
연습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형 기획사에서 데뷔하는 순간 해외 진출은 약속된 거다.
"거기서 너 혼자만 그 나라 말을 한다고 생각해 봐."
"……헉?"
다른 연습생들도 눈을 동그랗게떴다.
그 순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센터가 된다.
"어때? 공부할 생각 나?"
"네!"
"그럼 강의는 여기서 끝! 맛있는 음식 놔두고 뭐 하는 거야!"
"하하하하하!"
"잘 먹겠습니다!"
* * *
식사를 마치자 진호와 레오는 그들이 연습할 수 있도록 연습실을 나왔다. 뺏어가고 싶은 인재는 보이지 않았다. 춤만 봐서 그런지도 몰랐다.
"고맙다."
"뭘요, 형이나 JH에서도 계속 주지시킨 말일 텐데요."
"그렇긴 하지만 듣지를 않아."
"강제하니까요."
아무리 즐거운 일도 강제로 하라고 하면 싫어하게 된다. 거기다 한참 반항할 나이인 십 대다.
아무리 회사가 어렵고 무서워도 진심으로 공부를 할 리가 없었다. 애초부터 공부보다는 춤과 노래에 더 재능이 많은 아이들이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건 맞지만 모두……."
"그래도 재들, 혹여 연습생에서 퇴출되어도 JH를 완전히 미워하진 않을 거예요. 학생은 학교를 미워 하지 않으니까."
학교를 구성하는 것 중 싫어하는 게 생길 뿐이다.
"이 자식이 진짜……."
"으흐흐."
"이번 명절엔 뭐 해? 시골 가?"
"아뇨? 콘서트 해요."
"뭐?"
진호는 경악하는 그를 보며 씩 웃었다.
* * *
올해 고3이 되는 강경미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우리 오빠 첫 콘서트는 커다란 화면으로 봐야 하는데…….'
모창 천재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은 진호 오빠가 오늘 라이브 앱으로 콘서트를 연다.
집 거실에 있는 커다란 TV로 봐야 하는데, 결국 시골집에 끌려와 버렸다.
'아니지?'
강경미는 시골집의 거실을 보았다.
조용했다. 성묘도 다녀오고 다른 친척집도 다녀와서 모두 방에 들어가 쉬고 있는 거다.
"으흐흐."
그녀는 슬그머니 일어나 거실에 있는 커다란 TV로 다가가 TV 소리를 무음으로 만든 뒤 들고 온 노트북을 연결시켰다.
집에 있는 TV와 노트북을 연결 하기 위해 그 방법을 숙지한 그녀는 행여나 하는 마음에 케이블을 가져왔었다.
"아, 된다. 헉! 벌써 시작했어?"
작은 소극장, 무대 위에는 진호뿐만 아니라 드럼, 기타, 전자 피아노 등이 놓여 있었다.
'와. 화질 깨끗한 것 좀 봐. 돈 쓴다더니 제대로 썼어!'
언제나 기대 이상을 보여 주는 진호였다.
지금 후원을 하지 못한다는 게 너무도 안타까울 뿐이었다.
"딸, 뭐 하니?"
"힉?"
고개를 돌리니 엄마가 한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고, 이년아."
"나 오빠 강의 동영상 때문에 반에서 10등 하는 거 알지?"
"아, 무휼이 보려고?"
"무휼이 아니라 진호. 이진호. 오빠가 오늘 라이브로 콘서트 한다고 했단 말이야. 봐, 벌써 시작했잖아. 엄마도 같이 볼래?"
"그러지, 뭐. 할 것도 없고 볼 것도 없었는데 잘됐네."
"그치? 그치?"
"소리 켜 봐."
강경미는 급히 소리를 켰다.
-그럼 지금부터 카피 콘서트를 시작하겠습니다.
'아싸! 타이밍 좋고!'
"어?"
강경미는 진호가 피아노 앞에 앉자 깜짝 놀랐다.
'진호 오빠가 피아노도 치던가?'
딩딩딩딩, 띵띵! 딩딩딩딩, 띵띵!
"어머?"
강경미보다 오히려 그녀의 엄마가 놀랐다.
"이 노래는?"
그 순간 진호의 입이 열렸다.
Mama just killed a man Put a gun against his head
"어머머! 어머머!"
전설, 퀸.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였다. 비슷하면서도 젊었다.
그 노래를 듣고 자란 세대인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강경미의 엄마는 딸의 손에서 다급히 리모컨을 뺏어 볼름을 더 높였다.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Mama life had just begun But now I've gone and thrown it all away Mama ooh
너무도 아름답게 올라가는 고음이 그들의 귀를 붙든 것이다.
"뭐 예능 해?"
"어이구, 노래 잘 부르네."
짜증 난 엄마의 눈초리를 받은 강경미는 얼른 설명을 했고, 시골 집에 모인 사람들은 심심한데 잘됐다며 엉덩이를 붙였다.
강경미도 얼른 집중했다.
'하…… 잘 불러. 어? 어?'
갑자기 누군가 마이크를 들며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얼굴.
"어? 쟤, 걔 아냐? 그 모창 잘하는 그 남자 놈."
"아, 걔네."
"응? 또 나오네? 쟤는 또 누구 야?"
'서, 설마?'
카피 콘서트. 콘서트다.
진호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같이 들어온 모창 가수들의 입도 열렸다.
I see a little silhouetto of a man Scaramouche Scaramouche will you do the Fandango
"워."
"좋다. 노래 잘 부르네!"
어른들은 흥겨워했지만,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강경미는 입을 떡 벌릴 뿐이었다.
"……미쳤다."
그렇다. 콘서트에는 게스트도 있는 법이었다.
진호는 지금 날고 뛴다는 모든 모창 가수들을 불러 모은 거다. 그녀는 힐끗 노트북의 채팅창을 보았다.
채팅창이 폭발하고 있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