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4권 24화
"네, 감독님."
-일단 미안하다는 말부터 할게.
"……안 됐나 보네요. 대본은 정말 재밌었는데."
주연으로서의 자신의 모습도 기대했었다.
-보류야. 아무리 설득해도 드라마 감독으로서의 날 못 믿는 거지. 그래서 그런데, 아마 지금쯤 대본 하나가 도착했을 거야.
똑똑 두들겨진 문이 열리며 얼마 전에 채용한 신입 직원 중 한 명이 들어왔다.
신입이라고 해도 이 바닥 경력이 5년을 넘긴 베테랑이다.
"장영진 감독님께서 보내오신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진호는 택배 박스를 열었다.
"더 씨프?"
-읽어 보고 연락 줘.
"네, 그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대본을 펼친 진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감독님 스타일이 아닌데?"
딱 두 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흠."
진호는 일단 계속 읽어 보기로 했다.
그러다 곧 빠져들었다.
탁!
"허. 스케일 미쳤다."
딱 든 느낌이 그랬다. 대작의 느낌이 물씬 났다.
배역은 많은 조연 중 한 명이다.
아니다. 이 작품에서는 주연 조연 따질 것 없이 모든 캐릭터가 살아 있다. 관객들 전부가 모든 배우를 기억할 것 같다. 따지자면 모두가 주연이다.
맡아 줬으면 하는 배역도 보자마자 딱 내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차."
진호는 얼른 전화를 걸었다.
-어땠어?
"일단. 이거 감독님이 찍으시는 거 아니죠?"
-동진이 알지?
"최동진 감독님요?"
만화 원작을 기반으로 한 도박 영화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감독이다. 이후 연달아 찍은 두 작품의 성적이 좋지 않아서 현재까지 소식을 들을 수 없는 분이었다.
-연출은 걔가 할 거야. 각본은 내 거.
그게 더 놀라운 말이었다.
"감독님 스타일이 아니었는데요?"
-동진이랑 술 마시면서 썼어. 코드네임 제이도 그렇게 탄생한 거야.
"아아, 어쩐지."
-할 거야?
"해야죠."
이 정도 스케일에 각본은 장영진이고, 메가폰은 최동진 감독이다. 안 하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하겠습니다. 장파오, 하게 해 주세요."
본명조차 나오지 않는 화교 출신 좀도둑 장파오.
-오케이! 기다려. 보름 안에 나머지 배역까지 확정시켜서 연락 준다. 이번에는 믿어도 돼!
그 말은 곧 자신이 첫 번째라는 소리였다.
역시 이 바닥은 연기, 인맥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 얼른 나이 먹고 싶다.'
솔직히 가장 욕심 난 건 미스터 장. 이 영화의 주연이었다.
그런데 배역의 나이가 50대 중반이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진호는 몸을 일으켰다.
"장 실장님─!"
작품을 정했으니 말해 줘야 했다.
크랭크 인까지 몇 달이 걸릴지 모르지만, 벌써부터 심장이 뛰었다.
* * *
사각!
툭 볼펜을 던진 레오는 방금 전 작곡한 곡을 피아노로 쳐 봤다. 그의 작업실에서 잔잔하지만 너울이 계속 치는 선율이 울렸다.
"정말 못 참겠네."
그는 컴퓨터에서 USB를 뽑아 몸을 일으켰다.
애마인 스포츠카를 타고 도착한 곳은 그의 회사인 JH엔터테인먼트였다.
바로 대표이사실로 향한 그는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간식을 먹는 중이었던지 떡을 입에 가져가던 양진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크 몰라?"
"됐고. 이것 좀 들어 보세요."
레오는 챙겨 온 USB를 내밀었다.
"프로젝트 레오 폴더에서 '만약 너라면'이에요."
켜 놓은 노트북에 USB를 꽂아 폴더를 클릭하니 다섯 개의 곡이 있었다. 레오가 말한 제목의 파일을 클릭하자 잔잔하면서도 애달픈 통기타 선율이 울려 퍼졌다.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가이드조차 없는 음원.
하지만 그는 알아차렸다.
"이거 너희 거 아닌데?"
하우스를 기반으로 둔, 장르를 특정하기 힘든 크로스 오버는 뒤로 하더라도 레오가 리더인 그룹 '더 원'의 스타일처럼 톡톡 튀거나 거칠거나 자유롭고 파격적이지 않다. 하지만 귀에 박혔다.
콧노래가 흘러나오지는 않지만, 몸이 절로 리듬을 탄다.
돈 냄새가 훅 풍겨 왔다.
"꿈 깨세요. 진호 줄 거예요."
"아, 왜!"
"사장님은 진호의 진짜 실력을 보고도 왜라는 말이 나와요?"
"……."
모창을 통해 드러난 진호의 진짜 감성.
원석이 아니라 커팅을 중간쯤 끝낸 천 캐럿 다이아몬드였다. 사업가지만, 작곡을 하는 사람으로서 욕심이 안 날 수 없었다.
"야, 니가 천 년의 노래 때 걔를 오해한 것 때문에 미안해하고, 또 초코를 조련시켜 준 게 고마워서 진호를 예뻐하는 건 알겠는데, 이건 오버야."
맞는 말이지만, 부족한 게 있다.
진호가 자신에게 해 준 건 고작 그것뿐만이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놀러 와 밥도 같이 먹고 같이 놀았다.
그 어떤 비밀스런 이야기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아이돌 데뷔 12년. 진짜 데뷔 20 년.
연습생 기간까지 합하면 22년.
정말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채 레오 그 자체만으로 봐 주는 사람은 멤버 외에 진호가 처음이었다. 리더로서의 압박감을 내려놓고 정말 아무 이야기나 할 수 있다면 첫손에 꼽을 수 있는 진짜 친구. 너무 예쁜 동생.
"네가 정상에 선 사람으로의 압박감 때문에 외롭고 우울증이 와서 정을 갈구하는 건 알겠는데, 이런 곡 주려면 회사 가수에게 줘야지. 넌 한국 최고 아이돌 그룹의 리더고, 작곡가 겸 프로듀서면서도 내 회사 직원이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사업적인 문제라는 거죠? 그러면 이 곡으로 HU 에이전시에서 모델 매니지먼트에 대한 노하우를 얻을 수 있다면요?"
눈을 가늘게 접은 양진혁은 떡 접시를 옆으로 치웠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패션모델과 매니지먼트라는 직종이 이 세계에 생겨났을 때부터 존재해 온 HU 에이전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그곳에서 30대의 나이에 치프 디렉터에 거론된 다미앙 토마소가 성공시킨 모델만 해도 한 트럭이 넘는다. 비행기를 길게 타 봐야 동남아가 고작인 JH 모델 파트의 직월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어제 방송 보셨죠?"
진호가 허경만에게 속아 봉사 활동을 한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됐다. 많이 편집됐지만, 진호의 착하고 성실한 성품은 거의 날것 그대로 송출되었다.
양념으로 모창 실력까지 알려졌다. 트로트라서 양념 정도일 뿐, 이미지만 놓고 봤을 때 진호보다 깨끗한 사람은 연예계를 모두 뒤져도 몇 명 없다.
"진호, 이대로 음악 예능 같은 곳에 출연해도 노래 잘 부르는 배우 정도로밖에 인식 안돼요. 하지만."
"이 곡들을 통하면 뮤지션으로도 인식시킬 수 있다."
양진혁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엔 미약한 화가 서려 있었다.
"야."
그의 눈에 지금의 레오는 한껏 오만한 존재로 비춰졌다.
"물론 제 곡이라고 해서 모두 성공하진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이건 제게도 좋은 기회예요."
"아이돌 분야에만 국한된 뮤지션이 아니라 진짜 작곡가 겸 프로듀서가 되겠다는 거구만."
"예."
양진혁은 그제야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짜식이…… 이제야 좀 내 후계자답네. 하지만 문제는 진호 곁에 장경아 실장이 있다는 거야. 너도 가끔 회의에 참석해 봐서 알지? PJY 기획부 얼음마녀 장 실장. 그 마녀가 그 점을 모르고 있을까? 거기다 장 실장만 있어? 3대 기획사에서 내로라하는 알짜배기들이 다 거기 있어. 연예인이 진호 한 사람뿐이라서 실력 발휘를 못하는 거지."
하지만 진호가 노래를 잘한다는 게 밝혀졌다.
벌써 2차 3차 플랜까지 잡혔을 것이다.
"그러게 대우 좀 하지 그랬어요."
"JH에는 주주가 많지만, 팀 이진호에는 주주가 없잖아."
레오는 가당치도 않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데요?"
사업가 마인드로 밀당하다가는 똥 된다.
"쯧. 이 썩을 놈은 잘하다가도 꼭 이런 사고를 치더라. 알았어, 인마!"
양진혁은 바로 수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예. 다미앙 토마소 씨. 저 JH의 양진혁입니다."
* * *
"역시 빠르군요."
전화를 끊은 다미앙의 말에 장경아 실장은 혀를 차며 프린트한 종이 뭉치를 뒤집었다.
새해 첫날 새벽 장경아 실장이 진호에게 한 말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깨닫고 야근을 해 가며 짠 기획이 엎어졌다.
완전히 엎어진 건 아니지만, 많은 수정이 필요하게 됐다.
회의에 참석한 기획부 직원들도 아쉬워하며 프린트를 뒤집었다.
"장 실장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저는 이게 더 좋은 기회 같네요. 레오 형도 아이돌 노래 전문이라는 타이틀을 벗을 수 있고요."
회의에 참석한 진호는 미안해하며 웃었다.
좋아하는 형이 잘되려고 하는데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줘야 했다.
"하지만 그 곡이 무조건 뜬다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치자면 섭외하려는 다른 작곡가나 모델 성공에 대한 노하우도 그렇게 대단하지 않죠. 그렇지 않나요, 다미앙 씨?"
진호의 질문에 다미앙이 날카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하우라고 해 봐야 그들도 다 파악을 하고 있는 점들뿐일 겁니다. 모델도 똑같습니다. 특출한 사람이 특출해지는 것뿐입니다. 물론 다미앙 토마소로서의 개인적인 노하우는 조금 다르겠지만 말이죠."
회의에 참석한 직원들 모두 깜짝 놀랐다.
HU 에이전시 아시아 총괄 지사에서 치프 디렉터로 거론될 정도로 대단한 커리어를 쌓은 사람이 모델을 성공시키는 게 대단하지 않다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말뜻을 이해한 진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현장."
"빙고."
사람들의 고개가 급히 두 사람을 좇았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스킨로션이 화장품의 전부인 줄 아는 남자와 따로 화장대가 존재하는 여자의 차이겠군요."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쉽게 이해 되지 않았다.
진호가 덧붙였다.
"하이레벨 쇼의 진면목부터 손끝발끝의 미세한 뒤틀림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차이. 수백, 수천수만의 모델들을 보며 쌓아 오고 정립 한 데이터의 수준이 다르다는 거 예요. 그런데 이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거라서 그분들이 모르는 거 예요. 세계적인 캐스팅 디렉터가 한국의 모델 에이전시에 취직할 이유도 없고 노하우를 알려 줄 이유도 없으니까. 다미앙 씨가 알려 준다고 해도 채 30퍼센트도 이해 하지 못할걸요?"
쉽게 말해 천재의 영역이다. 그것도 지독히 외골수인 천재.
진호 자신도 그렇다.
[스킬 : 내가 제일 잘나가]가 런 웨이와 광고 캠페인 등으로 보는 톱모델들의 모든 걸 읽어 내 습득 시키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킨다.
그런데 그렇게 습득한 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그냥 사람이 숨을 쉬는 것과 같은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분들 중 천재가 있어도 최대 50퍼센트."
"Le meilleur(최고입니다!)!"
그런 천재는 꼭 독립해 버린다.
진호는 다미앙을 보며 그에게 결정권을 맡겼다.
그 데이터는 다미앙 토마소라는 사람의 피와 땀이다.
결코 강요하거나 부탁할 수 없었다.
다미앙은 싱긋 웃었다.
"진호 씨의 가장 큰 무기가 그 명석한 두뇌라면, 제 가장 큰 무기는 오물 속에서도 빛나는 보석을 찾아내는 이 두 눈입니다. 말로 설명 못하는 타고난 재능. 그쪽에 싹수가 좋은 사람이 있으면 제 휘하로 거두면 됩니다."
그 사람을 잡고 못 잡는 것은 오로지 JH의 대우에 달렸다.
상대가 비즈니스를 걸어왔다면 이쪽에서도 비즈니스로 응하는 게 진리다.
"그래도 힘든 결정이었을 테죠. 감사합니다, 다미앙 씨."
"진호 씨가 잘되어야 저도 잘되는 거니까요. 그러나 제 노하우를 고작 노래 한 곡에 팔 수는 없죠."
"그건 당연한 일이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진호와 다미앙은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그렇게 두 회사 간의 합작 녹음이 결정되었다.
진호는 프린트한 종이를 툭툭 쳤다.
이대로 파기해 버리기에는 너무도 아쉬운 기획이었다.
"다미앙 씨. 장 실장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몰렸다.
진호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우리 이왕 할 거 판을 좀 더 키워 보는 건 어떨까요?"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했다.
비등한 조건의 거래라도 저쪽이 만들어 놓은 판에서 움직이는 게 싫었다.
"예? 어떤……."
"미튜브나 트위치에서 모창을 하는 게 의미 없어졌으니까 아예 콘서트를 하자는 거예요. 포털사이트 라이브 앱으로 설날에."
쿵! 직원들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다, 다시 한 번 말해 주시겠습니까?"
"설날에 라이브 앱으로 콘서트를 하자는 겁니다. 음향, 송신 등 모두 제대로 준비해서. 아, 예능처럼 될 수도 있겠네요."
그제야 말뜻을 이해한 다미앙과 직원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곧 눈을 빛냈다.
"타이틀은 카피 콘서트에 초대합니다. 재밌을 것 같지 않나요?"
"무척……."
직원들 모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