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4권 23화
"에휴. 어쩐지."
-미안.
"괜찮아요. 내가 형 마음 몰라요?"
동생을 좀 더 나은 길로 인도하고 싶은 형의 마음.
진호는 녹음 부스를 빠져나갔고, 양진혁이 맥주 캔 하나를 내밀었다. 하양이는 레오가 데려온 초코와 놀고 있었다.
"힘들지? 제가 원래 좀 답답해. 완전 꼰대야, 꼰대. 공과 사도 구분 못하고. 이거 마시고 풀어."
흠칫 놀란 레오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 아니야. 난 어디까지나 네가 네 호흡으로 노래를 불렀으면 하는 것 때문에 그런 거야. 너 잘 불러. 우리 소속사 그 누구보다 감정이 좋아."
"그래요?"
입술이 슬쩍 올라갔다.
"응. 진짜로."
레오는 진심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원곡 가수를 따라 하려는 것만 빼면 정말 엄청난 감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나쁜 음질로도 귀를 사로잡아 버렸던 몰입도.
이건 그 기타 실력처럼 타고난 거다.
그래서 그때도 놀라 전화를 했던 거다.
'원곡 가수를 따라 하는 건 초보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 이걸 고쳐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으면?'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저 사람 말 듣지 마라. 너 꼬드기려고 나 까는 거야."
"야! 내가 언제!"
"알아요."
"응?"
진호는 식겁하며 이쪽을 본 양진혁을 향해 웃어 주고는 맥주 캔을 땄다.
꿀꺽꿀꺽!
"캬─!"
추운 겨울, 따뜻한 공간 안에서 좋은 사람들과 마시는 맥주는 정말 각별했다. 안주는 귤이었다.
"아, 알았어?"
"사장님이 어제 뭘 했는지도 알 걸요."
레오의 말에 진호는 씩 웃었다.
"그리고 저 계약 조건 8 대 2예요."
"에이. 텄네."
양진혁은 가볍게 툴툴거렸지만, 속마음은 찢어질 듯 쓰렸다.
진호는 가수로서 모든 걸 갖췄지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다. 조금만 커팅해도 찬란한 자태를 뽐낼 천 캐럿 다이아몬드.
그게 날아가게 됐지만, 이상하게도 나쁜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치열하고 더러운 연예계에서 사업가로 살아오며 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행동을 해 왔는데도 말이다.
그는 곧 왜 그런지를 깨달았다.
'미워할 수가 없어.'
진호에게서 풍겨 오는 편안한 분위기와 향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향수가 아닌 몸에서나는 인간 본연의 향기.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노력해도 마음이 무장 해제되어 버린다. 죽부인처럼 끌어안고 자면 숙면을 취할 것 같기도 하다. 그는 그것이 [스킬 :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의 효과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스킬 해금을 위해 만들어 전신에 발랐던 아로마 오일의 효과. 피로와 긴장을 푸는데 특급 효과를 내는 오일의 향이다. 진호의 몸에서는 언제나 그 향기가 나고 있었다.
양진혁은 레오와 이야기를 나누는 진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뭐, 됐나?'
적이 아닌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역시 모델 에이전시라서 그런지 계약이 좋네."
모델 에이전시는 매니지먼트 성향이 강하다.
"사장님은 안 그러세요?"
진호가 알기로 JH도 모델 파트를 따로 운영하고 있다. 피팅, 도메스틱 브랜드 등 꽤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을 터였다.
"어떻게 그래? 피트니스, 식단 관리, 차량 운행, 스케줄조인 등등 돈 들어갈 곳 천진데. 모델 수명이 긴 것도 아니고."
"어…… 그건 아닌데요. 노년에도 활동하는 분들 많아요."
"하지만 한국은 수명이 짧지."
"확실히 그렇기는 하죠."
일부 성공한 하이패션 모델이나 연예계로 방향을 튼 모델을 제외한 일반 모델들의 수명은 극히 짧다. 서른, 아니 이십 대 중반만 넘어가도 찾는 곳이 거의 없어진다.
"하지만 이건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죠."
양진혁의 눈이 빛났다.
현재와 과거 통틀어 남자 모델 중 가장 성공한 모델이 눈앞의 진호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준비성의 문제죠. 어떻게든 수명을 늘리려면 무대를 바꿔가야 하는데, 정말 기본인 영어조차도 잘못하잖아요."
양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델 파트에서 계속 올라오는 안건 중 하나다.
"솔직히 제가 현장 연출가라고 해도 통역 데리고 다니는 모델은 쓰지 않으려고 할걸요?"
진호 자신도 그랬다.
처음 디올 옴므 패션쇼에 섰을 때, 현장 스태프와 프랑스어로 대화를 하지 못했으면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을 거다.
"그 정도야?"
"20초 안에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스태프, 아니 헬퍼와도 대화가 실시간으로 안 된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요."
헬퍼는 옷을 입는 걸 도와주는 보조 스태프다. 주로 알바생이다.
"……확실히 그렇겠네. 언어적 문제는 윤주 씨나 혜진 씨 등을 통해 듣긴 했지만. 흠."
JH의 태생이 아이돌인지라 아무래도 생각에 한계가 있었던 듯하다. 아이돌은 그 나라 언어를 인사만 할 줄 알면 충분했다.
"그리고 옷 소화력도 모자라요. 골격부터 다르니까."
"음? 그것도 알고 있지만."
이렇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모른다는 거다.
진호는 명확하게 알려 주기 위해서 상의를 벗었다.
양진혁과 레오, 엔지니어, 정 대리 모두 눈을 부릅떴다.
아름답다. 그 생각만 들었다.
"여기 승모근의 기우는 각도, 어깨의 길이, 어깨 근육의 곡선 등. 사장님도 아시겠지만, 패션은 밀리미터의 세계예요. 단순하게 말라서 드러난 근육이나 쥐어짜서 만들어진 근육은 의미가 없어요."
"……."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들이 탄수화물을 멀리하며 죽을 둥 말 둥 운동하는데도 그렇게 자주 바뀌고, 한국에도 유명한 미란다 커가 하이패션에서 실패한 이유가 뭐겠어요."
진호는 다시 옷을 입었다.
"일반인은 캐치할 수 없는 0.1 밀리미터, 몸의 곡선이 달라졌기 때문이죠. 그걸 유지하는 모델만이 성공하는 것이고, 지금 제 몸이, 몸 자체로만 놓고 평가했을 때 하이클래스 레벨이에요."
"으음……."
진호가 방금 말한 것들은 모두 모델 파트에서 강조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보고 나니 자신이 약간은 안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준수한 수익은 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신장이 길고 비율이 좋다고 다가 아니라는 거군."
"네. 그저 당연히 갖춰야 할 무기들 중 하나일 뿐이죠. 레오 형의 리듬감이나 감성, 연기 재능처럼요."
"어흠."
진호는 씩 웃었다.
"고맙다. 덕분에 많이 도움 됐어."
"아니요. 저도 안타까워서 그런 거예요."
JH 소속 모델들은 모두 선남선녀다.
하지만 대중에게 그리고 패션계에서도 존재감이 희박하다.
진호도 좋은 사람인 레오와 양진혁이 있는 JH 라기에 알아봤던 것 뿐이다.
세계적 패션위크에서 한국 모델을 잘 찾아볼 수 없어서 좀 외로운 것도 있다. 물론 참가하는 다국적 모델들과 잘 놀지만 말이다.
지이잉! 지이잉!
"응? 잠시만요."
"괜찮아. 그냥 여기서 받아."
"감사합니다."
진호는 통화를 연결했다.
"왜?"
-어디야!
재준이었다.
"녹음실."
-푸하하하하! 오늘도 남자랑 있구만! 하이고 안타까워라.
"술방 중이냐? 이 시간부터?"
-아뉜데? 아뉜데?
-안녕하세요!
절로 몸이 굳어 버리는 아리따운 여성의 목소리들.
주먹이 쥐어졌다.
놀리려고 전화한 게 분명했다.
'이 자식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반박할 수가 없어서 더 화났다.
그 순간 번뜩이는 생각이 든 진호는 입술을 비틀었다.
[스킬 : 마음을 울리는 노래]와 [스킬 : 연신연왕]의 시너지는 아주 재밌는 개인기도 만들어 낸다.
"네, 안녕하세요. 재준이 잘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저도 여성과 있으니까 너무 아쉬워 말라고 전해 주세요."
-뭐? 여자? 누구?
'물었다.'
진호는 핸드폰을 멀리 떨어트려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가져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재준 씨."
녹음실을 울리는 나른하고도 고운 여성의 목소리.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다. 정 대리는 자신도 모르게 물러서다가 이 쪽을 향한 핸드폰을 고정시킨 삼각대를 넘어트릴 뻔했다.
그걸 못 본 진호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스킬 : 마음을 울리는 노래]가 [스킬 : 연신연왕]과 만나자 모창 뿐만 아니라 성대모사도 가능케 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어? 어?
"진호야. 레오 오빠. 나 화장실 좀."
"응, 다녀와. 저쪽."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재준이 벼락처럼 말했다.
-누, 누구야!
진호는 터지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입을 열었다.
"너가 알면서도 모르는 사람. 끊는다."
-자, 잠깐! 여자가 너랑 왜 거기 있어! 설마 둘이 있냐!
"그건 네 상상에 맡길게. 수고."
전화를 끊은 진호는 아예 핸드폰도 꺼 버렸다.
"짜식이 어디서."
그래도 우울하기는 했다. 자괴감도 살짝 들었다.
한숨을 내쉰 진호는 아차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통화가 길었…… 응? 왜 그러세요?"
"진호야. 방금 그 김세연 목소리 다시 내 봐."
"어? 알아차리셨네요?"
"아무튼!"
"으흠흠. 이렇게요?"
다시 울리는 나른하고도 고운 여성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정 대리는 다급히 핸드폰을 들었다.
"티, 팀장님! 지, 진호가 성대모사도 합니다! 여잔데 완전 똑같습니다! 스캔들 막겠습니다!"
* * *
진호는 다급히 동영상을 편집해 미튜브에 올리는 정 대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괜히 레오 형을 언급한 게 아닌데.'
그래도 걱정해서 하는 행동이라서 막지는 않았다.
양진혁이 기꺼운 미소를 지었다.
"좋은 직원이네."
"네. 제겐 과분할 정도로 좋은 분 이죠."
"로드라고?"
"드라이빙 매니저요. 월급을 JH 소속 실장급 매니저보다 많이 받을걸요?"
"안 뺏어가, 인마."
"으흐흐."
"그래서 네가 계속 원곡 가수처럼 불렀구나. 본능이네, 이건."
'아니 그건 아닌데.'
몇 번 연습해 감만 잡으면 금세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홍대에서 그대여를 부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성대모사만 할 수 있어?"
"아뇨? 모창도 하죠."
"한번 해 볼 수 있어?"
'음? 왜 또 나를 욕심내지?'
아깐 포기한 듯싶었는데, 아닌 것 같았다.
"아, 잘 부르면 가이드를 맡길까 해서 말한 거야."
진심이었다.
"가이드라면, 그 가이드 녹음요?"
"응. 몇 명만 따라 할 줄 알아도 네 감성과 곡 해석력이면 충분히 맡길 만하지."
그제야 양진혁의 의도가 무엇인 지 알 수 있었다.
'재밌겠는데?'
속으로 씩 웃은 진호는 목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이대로 널 보낼 수는 없다고."
녹음실을 울리는 대가수의 목소리.
그뿐만이 아니다.
절제된 자조적인 슬픔이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양진혁과 레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잘못 판단했다. 가이드 따위로 썩힐 만한 재능이 아니었다. 엔지니어와 정 대리는 다시 입을 벌렸다.
* * *
그날 술자리는 재준이 방송을 일찍 끝내고 달려와 레오, 양진혁과 안면을 트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며칠이 지났다.
그날, 결국 녹음은 없었다.
대신 그날의 일을 메이킹 필름처럼 흑백으로 편집해 미튜브 채널에 업데이트했는데, 이게 의외로 평이 좋았다.
가장 평이 좋은 건 진호의 여자 성대모사였다.
중간 중간 부른 짤막한 모창도 좋아해줬다.
녹음실에 있었던 사람들의 넋을 빼놓은 것처럼 미튜브 유저들의 넋도 빼놨다.
레오의 팬들까지 달려와 감상해 주니 조회수가 미친 듯 올랐다.
"하아."
회사 연습실 소파에 앉은 진호는 대본을 옆에 던지며 한숨을 내뱉었다.
딱 '이거다'라고 꽂히는 작품이 없다.
아니 그런 작품은 솔직히 많은데 모두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언제 찍을지 기약이 없는 것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장영진마저 연락이 오질 않으니 더 몸이 처졌다.
"이렇게 계속 쉴 수는 없는데……."
배우로서 물이 들어온 상태다.
비록 그 물의 깊이가 그리 깊지는 않다 하더라도 옆에 쌓여 있는 대본들의 탑이 지금이 기회가 왔다는 걸 말해 주고 있다.
그렇다고 아무 작품이나 할 수는 없다.
주연도 아닌 조연이 반짝했다가 사라질 수는 없으니 말이다.
우우웅! 소파에 둔 핸드폰이 울었다.
고개를 돌린 진호는 피식 웃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게 이런 것인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