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4권 21화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데이트 장소인 홍대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추운 날임에도 패딩보다는 코트, 기능성 의류보다는 패션 의류를 입고서 입에서 하얀 김을 뿜으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과연 홍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 발을 떼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메라와 조명 기구가 진입했다.
"헉! 이진호다!"
그 외침이 사람들을 응집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소문이 퍼진 건지 계속해서 인파가 밀려들었다. 갇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날 알아봐 주고, 촬영 때문에 사람이 몰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는 예상을 벗어난 숫자였다.
그만큼 유명해졌다는 증거이기에 뿌듯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리포터와 촬영팀을 보니 낯빛이 어두웠다.
혀를 찬 진호는 리포터를 만나면서부터 거의 눌러 두었던 존재감을 온전히 드러냈다.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홍대를 찾은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게 됐지만, 지금으로썬 이게 답이었다.
그러자 주위가 조용해져 갔다. 갑자기 커진 아우라에 리포터와 촬영팀의 눈이 동그래졌다.
"와, 저래서 CG남이구나."
누군가의 읊조림에 고개를 끄덕인 사람들은 그들의 앞길을 분분히 비켜섰다.
진호는 싱긋 웃으며 리포터를 보았다.
'아, 다시 굳었다.'
"안 가실 거예요? 저 배고파요."
"아, 네네. 가야죠. 그래야죠!"
씩씩하게 리드하려는 그녀의 모습은 약간 위태로웠다.
그래도 걷기가 편해지자 둘은 본격적으로 홍대 탐방에 나섰다. 홍대에 있는 시민들과 해피 뉴 이어를 외치는 것까지가 오늘의 스케줄이다.
급할 건 없었다.
연말이라서 도로까지 통제한 홍대는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무척이나 많았다.
진호는 절대 먹을거리를 지나치지 않았고, 자원한 시민들과 간단한 게임을 하며 사 주기도 했다. 방송국에 영수 처리할 돈이라서 거침없었다.
"저 수능 끝냈는데, 오빠 동영상으로 공부했어요!"
연예가 TV 일일 데이트의 명물 코너. 시민과의 허그다.
코너 속 코너라고 할 수 있다.
"저런. 설마 내 것만 본 건 아니지? 그거 기초용이잖아."
"그럼요! 당연히 아니죠!"
진호는 아직은 여고생인 그녀의 양 볼을 잡아 눈을 마주치게 했다. 주위에서 질투와 부러움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가 거짓말하면 바로 알아차리는 거 알지? 다시 말해 봐."
"오빠 건 힐링용!"
"그런데 성적이 좋지 않구나?"
"흐잉. 어떡하죠?"
눈동자가 불안과 초조함으로 떨리고 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재수해서 오빠 후배 돼야지. 참고로 MT 땐 오빠도 참가한다."
"지, 진짜요? 알았어요. 저 열심히 공부할게요. 대신 오빠가 힘내라고 안아주시면 안 될까요?"
진호는 대답 대신 양팔을 벌렸다. 와락! 여고생은 거침없이 안겨 왔다.
다시 부러움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설날까지만 빡세게 놀고, 그다음 부터는 공부하자. 알았지?"
"네!"
"파이팅. 오빠가 기운도 불어넣어 줬으니까 한국대에서 보자."
진호는 그녀가 힘낼 수 있도록 힘주어 등을 토닥였다.
그녀가 물러나자 다음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진호야. 지금 내가 집사 3년찬데 어떻게 하면 너처럼 집사에서 벗어날 수 있니?"
"……늦었어요. 포기해요. 이리 와요."
"어흐헝!"
그렇게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 주고 포옹을 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 덧 12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코너가 끝나자 진호와 리포터는 다시 자리를 옮겼다.
12시가 되어 갈수록 사람의 숫자는 더 많아졌다.
"생각해 보면 진호 씨는 정말 다재다능하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한 가지만 잘해도 사기인데 진호 씨는 손대는 건 모두 잘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이런 의문이 드네요. 혹시 대중들에게 보여 주지 않은 능력 같은 게 있나요?"
주변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글쎄요……."
"꺄아아아!"
진호가 의미심장하게 웃자 사람들은 자지러졌다.
리포터는 걸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오. 아직은 알릴 단계가 아닌가 보군요. 하지만 연예가 TV 리포터로서 포기할 수 없죠."
"하하. 어떻게 하면 리포터님의 입을 막을 수 있을까요?"
"개인기요! 개인기를 보면 저도 입을 다물 듯하네요. 다들 보고 싶으시죠?"
"네─!"
"꺄!"
"우와아아아!"
사람들이 강력하게 원했다.
온몸을 불태울 듯한 시선은 난처 하면서도 짜릿하게 했다.
진호는 일단 한발 빼는 척하며 생각했다.
"음. 저도 하고 싶은데, 기타가 없네요. 제게 개인기라고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인데……."
"여기 있어요! 기타─!"
'쿨럭!'
재빨리 고개를 돌린 사람들이 분분히 길을 렀다.
진호도 외침의 근원을 찾았다가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밴드였다. 제대로 준비해 왔는지 드럼이고 베이스고 일렉 기타고 다 있었다.
'어쩔 수 없네.'
"저기 저분이 기타를 빌려 주신다고 하네요."
"네. 저도 들었습니다, 리포터님."
씹어 뱉는 듯한 말에 주위에서 웃음이 터졌다.
진호도 장난이어서 싱긋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살짝 놀랐다. 그들의 앞에는 핸드폰 한 대가 삼각대에 고정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시간 채팅도 올라오고 있었다.
"어? 인터넷 방송을 하시는 분들이세요?"
"인터넷 방송도 하는 거죠. 친구 재준 씨도 가끔 들르세요!"
놀란 진호는 밴드의 멤버들을 보았다. 다 남자였다.
"혹시 여성분이 멤버로 있으세요?"
"어떻게 아셨어요?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못 왔어요."
"친구니까요."
"……풋!"
"크크크!"
밴드 멤버들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우우웅! 우우웅!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빼든 진호는 상큼하게 웃으며 전원을 꺼 버렸다. 그리고 밴드가 방송용으로 쓰는 핸드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응. 안 받아."
내막을 눈치 첸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아, 근데 이러면 더블 출연인가? 괜찮나요?"
연예가 TV 촬영팀이 잠시 고민 하다가 오케이를 했다.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기타를 넘겨받은 진호는 손가락을 풀며 기타 줄을 튕겨 보았다.
딩딩딩.
'이런 식으로 세팅되어 있구나.'
속주에는 어울리지 않게 조율이 되어 있다.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여러 노래들을 떠올리며 응집한 사람들을 보았다.
'아니, 잠깐?'
진호는 다시 관객들을 보았다.
'백 명이 훌쩍 넘지?'
백 명이 아니라 천명도 넘어 보였다.
그것도 모자라 아직도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다.
[스킬 : 마음을 울리는 노래]의 2 차 해금 조건이 떠올랐다.
* * *
2차 해금 조건은 '길거리에서 노래하며 관객 백 명 모으기'다.
천 명도 모자라 계속해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 지금 얻자.'
결정한 진호는 다시 관객들을 보았다.
노래를 고르기 위해서다.
'곧 있으면 새해니까 희망 관련 노래를 하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가지자 방금 전 시민과의 허그에서 한 상담이 떠올랐다.
수능을 치른 여고생은 대학 진학을. 고양이 집사는 자신의 처지를. 직장인은 고된 야근을. 아주머니는 자식을. 학생은 성적을.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사연과 고민이 있었다.
그건 춘자 할머니와 어르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쯤 연탄에 의지해 혹독한 추위와 외로움에 싸우고 있을 그분들.
'그 노래밖에 없구나.'
자연스럽게 노래할 곡이 떠올랐다.
"그럼 시작할게요."
사람들이 입을 다물자 마이크 앞에 선 진호는 눈을 감으며 연주를 시작했다.
"어?"
"이곡은?"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진호를 보았다.
알 듯하면서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곡이었다.
그러나 한 소절이 지나고, 두 소절이 지날수록 더 애잔하게 증폭 되어가는 서정적인 선율을 듣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눈이 감겼다.
왜 이젠 식상해서 유명하지도 않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해 눈을 감고 들으면 윤태원이라고 불렸는지 알 것 같았다.
선율이 가슴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저 이 순간이 중요할 뿐이었다.
제목을 몰라도 상관없었다.
사람들은 숨소리마저 죽이며 귀를 열었다.
그러나 그건 그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때였다.
꾹 다물어져 있던 진호의 빨간 입술이 열렸다.
"그대여."
사람들의 귀를 꿰뚫는 한 줄기의 미성.
사람들이 눈이 크게 떴다.
고작 한 단어였을 뿐이지만 그들은 진호가 무슨 노래를 하려는 건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한국 록의 대부 김인권의 '그대여'.
'와, 목소리 좋다.'
'노래도 하네?'
"아무 걱정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사람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 갔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 동안만 그랬다. 계속해 울려 퍼지는 노래에 그들의 얼굴은 놀람으로 또 경악으로 굳어 갔다.
그뿐만이 아니다. 채팅창도 굳어 갔다.
굉장히 신비한 경험이었다.
1차 해금으로 목이 열리며 기교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면, 2차를 해금하자 성대가 저절로 노래했다. 어떻게 감정을 불어넣어야 하는지. 어디를 늘려 관객의 호흡을 뺏어야 하는지, 어디를 어떻게 흔들어 마음을 건드려야 하는지.
의식을 집중하지 않아도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노래가 불러졌다. 자기 자신이 들어도 소름이 돋고 코끝이 시큰해지는 그런 노래가 말이다.
그래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 정도는 아닌데?'
더 많이 노래를 불러 보고, 더 다양한 노래를 불러야 [스킬 : 마음을 울리는 노래]는 세계에서 잡아먹는 수준이 된다.
그런데 벌써부터 [스킬 : 옥탑방 스타]의 감수성을 뒤흔들고 있다.
'아, 연신연왕!'
언젠가 레오가 말하길 노래도 하나의 연기라고 했다.
모르는 감정을 노래하고, 겪어 보지 못한 상황을 노래하려면 결국 나 스스로를 속일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시너지를 일으켰구나.'
그제야 모든 걸 이해한 진호는 씩 웃으며 눈을 떴다.
그리고 당황했다.
조용했다. 마치 마법에 걸린 듯이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흑. 흑흑."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고, 연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 외모든 사람들은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오싹!
자신이 만든 광경이란 걸 깨닫자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어……."
마이크를 통해 울리는 얼빠진 소리가 그들의 정신을 깨웠다. 사람들은 본능이 외치는 대로 입을 열었다.
"우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
홍대가 떠나가라 터지는 함성.
순간 귀를 막았던 진호는 이내 혀를 내둘렀다.
'와.'
그들의 환호성에 몸이 터져 버릴 듯 울렸다.
온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저릿저릿!
처음으로 패션쇼에 섰을 때 관객들에게 박수와 환호를 받았던 것 과 팬미팅에서 팬들이 함성을 질러 주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희열이 온몸을 내달렸다.
"흑. 너무 반칙 아니에요?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른다면 미리 말해 주셨어야죠. 대비라도 하게. 정말 못 됐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다가온그녀의 눈은 눈물과 어떤 욕심으로 가득했다.
"하하하."
"앵콜! 앵콜! 앵콜!"
홍대가 떠나갈듯 악을 지르고 있다.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친 리포터가 짓궂게 웃었다.
"어떻게 하실래요? 팬분들이 이렇게 원하는데."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의 눈이 전신에 꽂혀 왔지만, 진호는 왜인지 겁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진호는 환하게 웃었다.
"당연히 해야죠."
"우와아아아아!"
* * *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참을 수 없었나 보다.
기타를 빌려 준 밴드는 같이할 수 있겠냐 물어 왔고, 진호는 뭘 묻냐는 듯 바로 기타를 내주었다. 그렇게 광란의 콘서트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