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95화 (95/424)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4권 20화

연탄 5, 000장이 필요한 분들에게 모두 배달됐다.

배정받은 일곱 채를 1시 안에 끝내 버린 진호는 다른 출연자들 몫까지 도와준 것도 모자라 제작진이 예상한 1차 촬영 종료 시간을 2시간 일찍 앞당겨 버렸다. 사람들은 진호를 괴물 보듯 응시 했다.

제작진이 섭외한 목욕탕에서 어르신들과 씻고 옷을 갈아입은 진호는 2차 촬영지인 경로당 앞 평상에 앉아 옅은 미소를 지었다. 몸이 개운하니, 정신도 절로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그의 옆에 김세연이 앉았다.

샴푸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진호의 질문에 김세연이 씁쓸히 웃었다.

"다 같이 목욕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아."

아역으로 데뷔 이후 언제나 TV에 비춰진 그녀다.

진호 자신도 목욕탕에 가면 알아 보고 무리한 요구를 해 오는 사람이 있어서 불편한데, 그녀라면 더 심했을 터였다.

"그보다 너 내일 스케줄 있어?"

"당연히 있지! 예쁜 미녀와 일일 데이트!"

김세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너 연애해?"

"……아니, 스케줄."

진호의 얼굴에 우울함이 번져 갔다.

하지만 곧 떨쳐 냈다.

'연예가 TV'라는 장수 프로그램 속 코너인 일일 데이트.

연기대상에서 3관왕을 하면서 섭외가 되었는데, 전에 하던 리포터가 일신상의 이유로 관두면서 새로운 리포터로 교체되었다고 했다. 아주 엄청난 미인으로 말이다. 그렇다. 미인이다. 이게 중요했다.

연말, 그것도 저녁에 미녀와의 데이트다. 그것이 설혹 방송이라도 생애 첫 데이트.

진호의 머릿속에 온갖 망상이 생겨났다.

"푸하하하핫!"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어이그. 우리 진호 애기구나?"

둘의 모습을 찍고 있던 스태프들과 김세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호는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팔을 툭 쳐 냈다.

"그러는 자기도 모태 솔로면서."

"아, 아닌데?"

진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한 것 같지만, 아닌 게 맞았다.

이곳에 설치된 카메라를 의식해 연기하는 것이었다.

배신이었다. 그런데 부러웠다. 왜인지 움츠러드는 어깨에 진호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경로당 안으로 들어갔다. 김세연도 따라 들어왔다.

안쪽에 따로 만들어진 부엌에는 온갖 식재료가 쌓여 있었다.

진호는 칼 하나를 집어 들며 김세연을 보았다.

배신자는 그에 맞는 처벌을 받아야 했다.

"저 바스켓으로 물 떠 와서 저기 대야에 부어. 가득."

"……너 진짜 촬영장에서 만나자."

이를 부득 간 김세연이 바스켓을 들고 나갔지만,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 진호는 양파를 잡았다.

'그럼 시작해 볼까?'

* * *

스킬과 경험이 빚어 낸 요리 솜씨는 이곳에서도 빛을 발했다. 어르신들은 맛난 음식과 연예인들의 재롱잔치에 몇 개 없는 이를 드러내며 즐거워하셨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나자 어르신들이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어 말없이 빠져 나갔다. 진호는 다급히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런 진호의 행동에 아차 한 연예인들도 황급히 신발을 신었다.

"춘자 할머니, 슈퍼 할머니."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어르신들이 눈을 크게 떴다.

"뭐 하러 나와."

"집까지 바래다 드리려고. 어둡잖아요."

"됐어. 어여 집에 가. 추워."

밀어내지만, 올라가는 입꼬리는 숨길 수 없었다.

진호는 두 할머니의 양팔에 팔짱을 꼈다.

다른 연예인들도 각자 한 분씩 팔짱을 꼈다.

"자, 갑시다!"

"어메메!"

진호는 그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보폭을 줄여 걸었다.

하지만 길지 않은 길이라서 곧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진호는 어둠으로 가득한 골목 속 춘자 할머니 집 앞에 섰다.

슈퍼 할머니는 먼저 데려다 드렸다.

춘자 할머니가 진호의 손을 잡아 쓸어내렸다.

"오늘 고마워. 그란디…… 이젠 오지 말어. 바쁘잖여."

다시금 뜨거운 게 목에 걸렸다.

"그래요. 알았어요. 새해에 찾아 올게. 그때 어디 놀러 갈지 생각해놓으세요."

"그려그려. 내 언제 올까 기다리고 있을게."

말은 그렇게 하지만, 포기한 게 눈에 훤히 들어왔다.

하지만, 진호는 내색하지 않고 씩 웃어 주고는 몸을 돌렸다.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걸음을 빨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시 가로등이 있는 적막한 거리로 나오자 진호는 핸드폰을 들었다.

"네, 장 실장님. 부탁드릴 게 있어요."

진호의 일그러진 눈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친 진호는 어두운 밤하늘을 보며 싱긋 웃었다.

"집에 가자."

"진호야."

몸을 돌린 그는 살짝 놀랐다.

김세연이 그곳에 있었다.

* * *

다음 날 저녁.

촬영장소가 가까워지자 정 대리가 다시 한 번 주의를 주었다.

"물어본다고 절대 아무렇게나 대답하지 마."

"알았어요."

"막 애교 떨어도 절대 헤벌쭉하지 말고, 헛소리 허세 부리지도 마."

"걱정 마세요."

"막 안긴다고 너도 같이 안지 말고. 매너 손 알지?"

"알았다니까요."

벌써 몇 번째 듣는지 몰랐다. 아무리 좋은 말도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들으면 지치는 법이었다.

진호는 정 대리를 보며 말했다.

"정 대리님. 저 못 믿어요?"

"믿지! 당연히 믿지! 내가 내 배우 안 믿으면 누가 믿어! 그런데 네가 모태솔로라는 것 때문에 못 믿겠다."

"저도요."

진호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 분명 예쁜 미녀가 슬그머니 팔짱을 껴 오면 있는 말 없는 말 다 해 버릴 게 분명했다.

이런 식의 촬영은 처음이라서 더 불안했다.

미녀와의 밀착 인터뷰. 서로 사이에 테이블이나 거리를 둔 채 마주 보며 하는 인터뷰와는 레벨이 달랐다.

'아오! 내가 왜 허락했을까!'

미녀라는 말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다.

"진짜 어떡하면 좋죠?"

"지, 질문 리스트 다 외웠지!"

"예!"

"분명 그쪽에서 리스트에 없는 질문을 해 올 수 있어. 그땐 일단 시간을 끌어. 그리고 생각해. 진호 너라면 할 수 있어!"

"……옙!"

심호흡을 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진호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제가 어제 말한 건 어떻게 됐어요?"

"길거리 공연?"

[스킬 : 마음을 울리는 노래]의 2 차 해금 조건은 길거리 공연이다. 원래 노래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던 주인공은 이를 통해 지나는 사람을 붙들고 몰입시키고, 감정을 공유하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아직 내부 회의 중인데, 아마 며칠 내로 결정 날 거야. 이제 넌 그저 그런 연기자가 아니다 보니 기획을 짜려는 것 같아."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그런데 갑자기 왜 길거리 공연을 하려는 거야?"

"제 기타 실력을 자랑하고 싶기는 한데, 사람을 모아서 할 수는 없으니까요. 영상이 아니라 사람들과 직접 호흡하고 싶다고 할까?"

정 대리는 살짝 놀랐다.

"너한테 그런 욕심이 있는 줄은 몰랐네."

"이런 욕심 없는데 어떻게 연예인 해요?"

"……그건 그렇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진짜 헛소리하면 안돼!"

굳세게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문을 열고 내렸다가 놀랐다.

바로 카메라가 들이밀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메라가 있어서 모여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가 환호성을 질렀다.

"꺄아아!"

"이진호다!"

"오오오!"

놀랐다가 이내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편 진호는 밝게 웃으며 인사해 오는 리포터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난 안 될 것 같아요, 정 대리님.'

리포터가 아니라 아나운서였다.

아나운서급의 미모. [스킬 : 셜록의 후예]를 얻기 위해 방송국 안에서 죽치고 앉아 사람들 직업을 판단할 때 본 신입 리포터였다. 거기다 옷도 코트를 입었지만, 안은 미니스커트였다.

'어쩌지?'

* * *

당혹스러웠지만, 의식하지 않아도 사람을 읽어 버리는 [스킬 : 셜록의 후예] 때문에 곧 안정되었다.

'엄청 떨고 있네?'

환한 조명 때문에 선명히 보이는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

마이크를 부서져라 쥔 손을 보자 절로 긴장이 사라졌다.

'이분한테는 이게 데뷔 무대려나?'

처음 런웨이에 섰을 때의 긴장을 떠올리자 여유가 생겼다.

"오, 오늘 연예가 TV, 일일 데이트에서 만날 분은 연기대상 인기상, 뉴스타상, 남자 조연상 3관왕에 빛나는 신성! 마음을 훔친 자객! 요리하는 CG남! 추리 천재, 얼굴 천재, 요리 천재, 기타 천재, 조련 천재! 모델 겸 배우 이진호 씨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진호 씨!"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드는 소개 였지만, 동시에 놀랍기도 했다.

'나 별명이 진짜 많구나.'

포털사이트에 이름을 치면 연관 검색어로 나오는 단어들이긴 하지만, 사람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하긴 그러니까 여기에 출연할 수 있게 됐지.'

연예가 TV는 한 주간의 연예계 사건 중 이슈만을 골라 소개하는 방송이다. 즉, 이슈가 될 만큼 유명하지 않으면 절대 출연할 수 없는 프로그램이라는 소리도 된다. 정말 성공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김수애 리포터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그러나 리포터 본인보다는 아니었다.

그녀는 '하양이는 잘 지내나요.'라는 다음 질문도 잊어버렸다.

"저, 저를 기억하세요?"

"그럼요. 전에 방송국 로비에서 뵈었잖아요."

진호는 천천히 몸을 돌려 PD와 촬영감독 등의 스태프들에게도 일일이 이름을 말하며 인사를 했다. 정적은 더 깊어졌다.

정신을 차린 리포터가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와! 이진호 배우님이 같이 촬영 하는 스태프들의 이름을 모두 외운다는 정보를 듣기는 했는데, 이렇게 한 번 만난 사람들이름까지 다 외우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언제가 되었든 만나게 될 테니까요. 많이 노력했습니다."

구경꾼으로 응집한 수십 명의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와, 미쳤다."

"정말이야?"

진호는 무시하며 리포터를 보았다.

"그런데 오늘은 리포터님이라고 불러 드려야 하나요, 아니면 이름을 불러 드려야 하나요?"

진호의 부드러운 미소에 잠시 넋을 잃었던 그녀는 이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아, 긴장 풀렸다.'

"편하게 누나라고 부르셔도 돼요."

야유가 흘러나왔다.

"네, 그럼 리포터님."

"크크크크."

주위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는 굉장히 재밌는 경험이었다. 수십, 아니 속속들이 사람이 몰려 들면서 벌써 백 명이 넘게 모였다.

미녀와의 밀착 데이트지만, 온전히 둘만의 데이트가 아니었다. 그래서 인지 마음이 더 놓였다.

진호는 그렇지 않아도 추운 날씨 때문에 붉어져 있던 그녀의 양 볼이 더 붉어지자 재빨리 주머니에서 손난로를 꺼내어 쥐여 주었다.

"기다리시느라 많이 추우셨죠?"

"어머?"

"하나는 정이 없으니까 하나 더."

"어떡하지? 나 이 남자한테 반한 것 같아."

다시 야유가 터졌다. 데뷔 혹은 경력이 짧을 텐데도 상대를 편하게 만들어 주려는 그녀의 배려에 진호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람들로 가득한 홍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걸으실까요?"

"그거 제 대사인데……."

"아하하."

인파는 갈수록 더 모이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