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94화 (94/424)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4권 19화

7. 연탄

2019년도 이제 이틀만 남았을 뿐이다.

진호는 장영진이 보내온 대본을 다시 읽으며 생각에 잠겼다.

"대본은 마음에 드는데, 캐릭터가……."

보디가드다.

천 년의 노래에서 맡은 무휼과 비슷한 캐릭터다.

다른 점이라면, 가제 '보디가드 J'는 현대물이라는 것.

장르도 액션이다.

이것이 마음에 걸려 아직도 확답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연이 다 보니 사랑이 얽히고설켜 있다. 키스신도 있다.

"어흐흐."

우우웅!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바라본 진호는 의아해했다.

의외의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

"네, 경만이 형."

어디까지 먹힐까에서 동고동락했던 허경만이다.

-어디니, 우리 진호?

"집이에용."

-스케줄 없어?

"내일은 있어요. 흐흐흐."

아주 바람직한 스케줄이었다.

새해 카운트다운을 스케줄을 진행하며 외칠 판이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해 줄 수 있는 스케줄이다.

-오늘은 없단 말이네?

"그렇죠?"

-그럼 형이 있는 곳으로 올래? 막걸리나 한잔 하자.

'이 시간에?'

이제 오전 8시다.

"어딘데요?"

문자로 보내 준다고 한경만은 전화를 끊었고, 이윽고 주소가 도착했다.

"응?"

익숙한 주소였다.

리셋라이프에서 노래 관련 스킬을 얻기 위해가 봤던 곳이다.

"여기엔 뭐 없는데?"

술집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있는 건 구멍가게 하나뿐이다. 이곳에서 큰길까지 나오려면 무려 20분이나 걸어야 한다.

"……아!"

진호는 피식 웃었다.

현재 시간은 아침 8시. 연말. 바로 예측이 갔다.

진호는 고민할 것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슈퍼 할머니는 잘 계시나 모르겠네."

* * *

차를 몰아 도착하니 역시나 카메라와 조명들이 있었다.

그 안쪽에 모여 카메라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연예인 중 허경만이 놀라 달려왔다. 카메라도 쫓아왔다.

"진호야!"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타기나 해요. 저거나 혼자 못 들어요."

진호가 뒷좌석에 쌓인 박스들을 가리켰다.

모두 가볍게 들 수는 있지만, 허경만이 괘씸해서 거짓말을 했다.

"응? 이, 이건 뭐야?"

"손난로와 따뜻한 커피요."

"……헐?"

"이 아침에 이런 곳에서 막걸리를 마시자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진짜 거짓말 못하네. 얼른 타요."

"어, 응! 응!"

진호는 빈자리를 찾아주차하고는 허경만과 함께 박스들을 들고 다시 촬영장소로 복귀했다.

"와!"

"우와!"

진호의 외모에 넋을 놓았던 연예인들은 박스들에서 튀어나오는 손난로와 커피숍 커피에 환호성을 질러야 했다.

제작진은 감동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진호는 가슴을 편 허경만을 보며 입술을 이죽거렸다.

"사기꾼은 저쪽."

"사랑한다!"

"거부합니다."

이후 다른 연예인들이 속속 도착 했다.

대부분 제작진을 보고 나서야 속은 것을 알아차렸다.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진호는 그중 나중에 도착한 사람을 보곤 놀랐다.

"어?"

상대도 이쪽을 보며 놀랐다.

"어? 진호 네가 여긴 왜 있어."

"그러는 세연이 넌 여기 왜 있냐?"

'리얼, 정글에 가다'를 함께 찍은 김세연이었다.

"너도 속았구나."

"응……."

둘은 씁쓸히 웃었고, 진호와 세연을 부른 두 연예인은 슬그미니 고개를 돌렸다.

이내 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자연예인들이 같이 움직이려고 해서 조금 곤란 하긴 했다.

김세연과는 아쉽게도 다른 팀이 되었다.

"어디어디 가면 돼요?"

허경만이 주머니에서 주소들이 적힌 쪽지를 꺼냈다.

"음, 김춘자 할머니와 김근영 할아버지. 그리고……."

"아, 춘자 할머니. 기름보일러로 바꾸신다더니 아직 안 바꾸셨나 보네."

출연자뿐만 아니라 제작진도 놀라 진호를 보았다.

"너 이분들 알아?"

"대충?"

'어떻게?'

라는 눈빛들이 보내져 왔지만, 진호는 무시하며 지게를 짊어졌다.

"연탄 올려 주세요. 최대한 많이."

40장의 연탄을 올린 진호는 좁고 울퉁불퉁한 골목길을 성큼성큼 나아갔다. [스킬 : 사상 최강의 제자]의 균형 감각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 사람들은 쫓아오는 것만도 벅차 했다.

그는 한 집 앞에서며 빨간 현관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할머니! 춘자 할머니!"

"……뉘여!"

"손자─!"

안쪽에서 후다닥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벌컥! 문을 연 작은 키의 노파는 진호를 보곤 깜짝 놀랐다.

진호는 미간을 좁혔다.

'이걸 신경 못 썼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굉장히 허름했다.

"장판은 좀 따뜻해요?"

천 년의 노래 촬영 당시 인성 문제가 불거졌을 때, 진호는 그동안 리셋라이프를 하며 신세를 진 이들의 명단을 회사 직원들에게 넘겨준 적이 있다. 직원들은 그들에게 나름의 사례를 했다고 했다. 전기장판 등등 필수품이라고 했는데, 그 안에 옷은 없었던 것 같다.

"아이고! 내 새끼! 왜 이제야 왔어? 마, 맞어. 얼른 들어와."

변한 모습을 단번에 알아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직원들이 설명을 잘한 뜻싶었다. 그래도 몇 년 전 얼마 보지 않은 자신을 마치 친손자처럼 반겨 주니, 그동안 찾아뵙지 않았던 게 후회되었다. 말뿐이 아니라, 정말 손자처럼 대해 주니 가슴이 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찾아 될걸.'

직원을 보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올 걸 그랬다.

지나가 버린 인연이라고 물품만 보내는 게 아니었다.

진호는 연탄 쌓는 창고 겸 부엌으로 향했고, 춘자 할머니는 그를 조르르 쫓아왔다.

따라온 카메라맨과 연예인들이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방송을 위해 아는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친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슈퍼 안 갔네요?"

"고마운 분들이 온다는디 어뜨케 가. 거봐. 이 할매가 그랬쟈? 니는 살만 빼면 인물이라고? 그보다 리라인지 지랄인지 하는 오락기는 이제 안 혀?"

"회사가 망해서 이제 못해요. 여기 왔던 분들도 모두 못할걸?"

"잘됐네! 아주 나이 처먹고 오락기나 붙들고 있는 게 더럽게 마음에 안 들었는디!"

"덕분에 술 많이 얻어 드셔 놓고는."

당시 스토리를 진행하기 위해 이 동네에서 머물러야 했던 기간이 무려 두 달이다. 스킬 해금이야 반나절이면 가능했지만, 주인공의 유년시절을 보내야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때문에 대부분 도중에 포기하며 다른 스토리를 찾아 떠났지만, 진호 자신처럼 진득하게 출근 도장찍던 사람도 꽤 됐다. 대부분 백수 였는데, 인정 많고 넉살 좋은 백수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술이나 반찬거리를 들고 어르신들 집에 쳐들어가 밥을 같이 먹거나 동네에 유일하게 있는 슈퍼 평상에서 고기 파티를 벌이며 어르신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당시 진호는 그들 사이에 끼어 잔 심부름도 하고 술도 얻어먹었다. 진호는 슬그미니 고개를 돌리는 그녀를 보며 쿡쿡 웃었다.

"그런디…… 다들 잘 살고는 있대?"

"잘 모르겠어요. 연락을 잘 안 해서."

진호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앞으로라도 잘하자.'

"그보다 몇 장 필요하세요?"

"올 겨울 나려면 한 이백 장은 필요하제."

이 동네 겨울은 정말 혹독하다. 전기장판이 있다고 해도 연탄을 때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 정도다.

"알았어요. 금방 다시 올 테니까 안에 들어가 계셔요. 추워."

"그려, 그려."

춘자 할머니는 잔뜩 아쉬워하면서도 잡은 옷자락을 놔 주었다.

씩 웃어 준 진호는 재빨리 집을 나섰다.

슬그미니 연예인 한 명과 카메라 맨이 남으며 진호 자신과 춘자 할머니의 과거사를 알려는 듯했지만, 무시했다.

낱낱이 밝혀진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기름보일러 한 대 놓아 드려야 하나.'

매해 겨울에 뗄 기름까지 후원한다고 해도 현재 자신에게는 부담 조차 되지 않는 액수였다.

진호는 생각에 잠겼지만, 그 발은 빠르게 걷고 있었다.

이번엔 50장을 들고 돌아오니, 춘자 할머니 집에서는 한바탕 재롱잔치가 벌어져 있었다.

할머니가 박수를 치며 웃는 모습을 보니 기뻤지만, 정작 자신을 부른 허경만이 농땡이를 치고 있으니 입꼬리가 절로 비틀어졌다.

"진호 왔네! 진호야, 너도 한 곡 해!"

진호는 순간 멈칫했다.

"음."

여기서 노래를 해 버리는 순간

노래 관련 스킬의 1차 해금이 카운트된다. 그때야 게임이었지만, 지금은 현실이다. 내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춘자 할머니의 잔뜩 기대 하는 표정을 보자 진호는 어쩔 수 없음을 깨달았다.

매정하게 거부할 수가 없었다.

'정말 기름보일러 놓아 드려야겠다.'

속으로 고개를 저은 진호는 허경만에게 눈빛을 주었다.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세 박자 마저 쉬고 하나 둘 셋!"

"꽃 피는 동백섬에─"

춘자 할머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건 그녀의 18번 곡이었다.

흥이 오른 그녀는 따라 불렀고, 놀랐던 연예인들은 이내 박수를 치며 환호를 했다.

* * *

"뭐? 벌써 다섯 집이 끝나?"

오늘 특집을 기획한 PD와 연출진은 깜짝 놀랐다.

오프닝 이후 본촬영이 시작된 지 이제 겨우 2시간이다. 그런데 벌써 다섯 집에 연탄이 200장씩 모두 배달되었다.

말이 한 집당 연탄 200장이지, 웬만한 사람은 4개 드는 것도 어렵다. 정말 전문적인 운동선수가 아니고선 말이다.

한 팀이 된 연예인 4명이 연탄을 배달해야 하는 집은 총 7채. 녹화 시작이 10시 반이니 오후 5시가 되어야 1차 촬영 끝이다. 2차는 어르신들과 목욕, 3차는 어르신들에게 따뜻한 음식 대접이다.

-아까 보셨잖아요. 이진호 배우가 아주 헐크예요.

"부, 분량은!"

-아름답게 찍혔습니다. 이곳 어르신들을 위한 후원금 모집은 무리 없을 듯합니다. 구청에서 복지 예산을 끌어 오는 것도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알았어. 수고해."

-음…….

"왜?"

-이건 상관없는 이야긴데, 이진호 배우가 노래를 잘 부르네요. 트로트라서 고음은 모르겠지만, 노래를 참 구성지게 잘 불러요. 모창도 기가 막히고. 처음엔 평범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끼 많은 사람인데 그런 재주도 없을까. 알았어."

무전을 끈 PD는 연출진을 보며 어이없어했다.

"이진호 배우가 왜 예능 블루칩이라고 불리는지 이제 알겠네."

"그러게요. 그런데 이진호 배우가 한 번에 옮기는 양을 줄여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다른 출연자들과 형평성이……."

"아차."

PD는 얼른 다시 무전기를 들었다.

* * *

좁은 동네라 같은 처지끼리 서로 기대며 살아가기에 연락망이 발달 되어 있어 찾아뵈는 어르신들마다 은근히 노래를 바랐고, 또 연예인들도 아낌없이 끼를 보였다.

스킬을 얻기로 마음먹은 진호도 적극적으로 어울리면서 스킬을 1 차 해금시켰다.

[스킬 : 마음을 울리는 노래]의 1 차 해금 조건은 '독거노인 다섯 명에게 노래 불러 주기'다.

노래를 좋아하는 어린 주인공이 게임 속 동네 어르신들에게 재롱을 떨고 모창을 하며, 가수에 대한 꿈을 키우는 유년시절이 1차 해금 조건인 거다.

리셋라이프 속 독거노인 NPC는 딱 다섯 명.

우연인지 아닌지 그 NPC들이 살 던 곳은 모두 실제론 빈집이었는데, 어린 주인공이 성장을 할 때까지 살아 있게 만들어야 했기에 정말 애를 먹었다.

게임 타임과 리얼 타임이 다르다보니 시도 때도 없이 들리고, 부족한 게 있으면 게임 내 마켓에서 사다가 채워 놓고, 우울해하면 노래를 불러야 해서 이 동네에서 거의 살다시피했었다.

누군가는 아예 텐트를 쳐서 살기도 했다.

물론 노래를 부르는 건 리셋라이프 속 주인공이었다.

진호 자신은 아무 음악 파일이나 재생하면 끝이었다. 무음도 상관없었다.

이 스킬의 해금 조건은 2차까지 밖에 없는데, 1차에서부터 성대가 변하는 게 느껴졌다.

막혀 있던 목구멍이 탁 트인 느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디를 어떻게 꺾고, 어떻게 늘려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게 됐다.

"얼씨구 좋다!"

"지화자!"

노래가 담장을 타고 넘어갔는지 슬그미니 들어오신 주위 어르신들이 합세하며 금세 춤판이 벌어졌고, 진호는 놀라는 연예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목소리를 조금 더 키웠다.

촬영 팀의 어이없어하는 눈빛도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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