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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89화 (89/424)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4권 14화

김세연은 칼을 가져왔다.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글도였다.

"후욱. 훅. 야, 소풍이라며."

이 가는 소리가 살벌했다.

"이 정도면 소풍이지. 운동 좀해. 아, 물가다."

냉큼 발을 돌려 2분 정도 걸어가니 제법 큰 계곡이 나왔다.

콰과과과!

대략 무릎 정도로 오는, 휘몰아치는 계곡물에는 수많은 먹을거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수원 및 식재료가 단숨에 확보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버섯부터 야자수, 나무 열매, 허브 등등 온갖 식재료가 있었다.

"와, 물이다!"

진호는 김세연의 뒷덜미를 낚아 챘다.

"여보세요. 놀아도 집은 짓고 노셔야죠. 여성용 집까지 지으려면 시간 없어요."

여성용 집. 나름 리얼정가의 애청자인 그녀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여태까지의 리얼정가는 여자들만을 위한 집을 지을 만큼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할 일 있어? 나무 베러 온 거 아냐?"

"왜 없어? 저기 덩굴들 보이지?"

"어, 설마."

"3미터 길이로 다 잘라 와. 아, 저쪽은 뱀 있으니까 가지 말고."

"뭐, 뭐? 뱀?"

"구렁이라서 물려도 죽지는 않을 거야. 아마도."

진호의 얼굴을 본 김세연은 소리를 빽 지르며 그의 배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억!"

김세연은 씩씩거리며 돌아섰고, 진호는 배를 문지르며 어이없어했다.

"장난 아닌데……."

"지, 진짜 있어요?"

"네, 카메라 감독님도 조심하세요."

'나랑 같이 있는 걸 봤으니까 쉽게 물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일단 경고는 해 놨기에 가지 않을 터였다.

진호는 가위, 바위, 보를 시작하는 두 카메라맨을 무시하며 집 기둥으로 쓸 나무를 찾기 시작했다.

역시 철제 도구는 위대했다.

푹푹 박히는 도끼날은 1시간 만에 손목만한 굵기의 나무를 20그루나 베게 했다.

진호는 그걸 김세연이 잘라 온 덩굴로 묶어 어깨에 짊어졌다.

"웃차!"

김세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힘세다?"

"운동하는데 이 정도는 기본이지. 그보다 그거 들 수 있겠어?"

그녀의 발치 앞에는 성인 몸통보다 두껍게 쌓인 동굴이 놓여 있다. 못해도 그녀의 몸무게만 할 터였다.

진호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게 누가 무식하게 그만큼 베어 오래냐? 놔둬. 갔다가 다시."

"괜찮아. 들 수 있어."

'음?'

순간 이를 악문 그녀의 눈에 독기가 올랐다가 사라졌다.

'하긴, 공주 취급이 몸은 편하게 해도 마음을 좀먹기는 하지. 난 회사 아니면 아무것도 못하는 멍청 인가 싶은.'

웬만하면 혼자 하려는 진호 자신도 가끔 직원들의 과한 보호에 그런 감정을 느끼는데, 아역부터 시작해 14년 동안 연기를 해 온 그녀라면 더 심할 터였다.

지금 그녀는 그런 네거티브한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무언가라도 해보려 하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존중해 줘야 했다.

"오, 김세연. 상남자다?"

"야, 너 정말 나에 대한 취급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진호는 코웃음을 쳤다.

"나한테 여자 대접 받고 싶으면 연하 아님 연상이어야 해. 동갑은 동성이야."

"……진호야. 우리 촬영장에서 만나자. 꼭."

그녀의 웃는 미소는 아주 살벌했다.

씩 웃은 진호는 발을 성큼 내디뎠다.

"가자."

"가, 같이 가! 으음!"

진호는 일부러 보폭을 크게 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어떻게든 쫓아 왔다.

'분량 만들어 줘야겠다.'

어차피 구르다 보면 만들어지는 게 '리얼, 정글에 가다'의 분량이지만, 다른 이들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반응이 오는 그녀가 재밌기도 했다.

그렇게 공터에 도착한 진호는 한숨을 내뱉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힘들게 땅 파는 서정문을 돕는 시늉을 하지만, 딱 거기까지인 연예인들. 솔직히 그들 중 두 명만 진심으로 도왔어도 지금쯤 파 놓은 흙이 가슴까지는 왔어야 한다. 설상가상 삽까지 다른 사람이 들고 있었다.

그나마 두 명이 보이지 않는 게 아무래도 먹을거리를 탐사하러 떠난 듯했다.

쿠웅!

어깨에 짊어지고 온 나무 뭉치를 내려놓자 시선이 몰렸지만, 진호는 무시하며 크게 입을 열었다.

"족장님, 나무 왔습니다! 집 지어요!"

"오케이─!"

환하게 밝아지는 그의 얼굴이 참 안쓰러웠다.

* * *

"와."

"우와."

말하는 병풍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호는 그들을 무시하며 김세연을 부려 먹었다.

"세연아, 덩굴! 세연아, 거기 잡아! 그래, 잘한다! 세연아, 나무!"

그녀는 이름이 불릴 때마다 이를 악물었지만, 그래도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날이 저물기 전에 그럭저럭 머물 만한 집 두 채를 지을 수 있었다.

나란히 선 정문과 진호는 그걸 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이걸 내가 만들었다니…… 내가……."

옆에 선 세연은 감동하고 있지만, 둘의 입장에서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물이었다.

"언제 비올 것 같아?"

"내일 아침요. 한 9시쯤?"

"점심 먹을 식재료까지 쟁여 놔야겠네."

"그래서 전 그 식재료 가지러 다녀오겠습니다. 그사이에 주방 좀 지어 주실 수 있으세요? 나중에 그릇도 구워 보게요."

이런 공터에서 맨몸으로 집 짓는 미튜브 영상을 보며, 가장 해 보고 싶었던 게 그릇을 만드는 거였다.

"가지러 가는 거냐……크크큭. 알았어, 다녀와. 나도 그 영상들 봤어."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아니, 최고였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세연아, 가자!"

"아, 진짜!"

김세연은 짜증을 부리면서도 따라나섰고, 그렇게 둘은 스태프들과 함께 다시 숲 속으로 사라졌다. 서정문은 엉거주춤 일어난 연예인들을 보며 혀를 찼다.

'이번 편에서 제일 분량 많은 건 김세연이겠네.'

딱 봐도 진호가 챙겨 주는 게 보였다.

그와 더불어 진호도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부리는 상남자.

20대 초반이기에 더 순수하게 보일 테고, 호불호가 갈리더라도 호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그는 고된 건지 넋을 놓고 있는 연예인들을 보며 혀를 찼다.

'조금만 부지런해도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을 텐데. 쯧쯧쯧.'

다들 인기에 목마른 연예인들이라 안타까웠다.

도울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미 '노예 김세연'이라는 캐릭터가 생겨난 뒤다. 신비한 이미지인 배우가 노예처럼 부려지는 거다. 이들은 늦었다.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10일 동안 함께 살아야 하는지라 뭐라도 해 줘야 했다.

고개를 저은 그는 남자 아이돌 두 명을 불러 주방 밑 가마터용 집을 짓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주변 탐사 및 식재료 확보를 위해 숲으로 보냈다.

* * *

팔이 크게 휘둘러진다.

그러면 물고기 한 마리가 푸드득 허공을 날았다.

김세연과 따라온 스태프는 입을 벌린 채 발치 앞에 쌓이는 물고기를 봐야 했다.

스태프들은 약 반년 전과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진화한 진호를 보며 경의마저 느껴야 했다.

그들은 조용히 무전기를 들었다.

"정호 형. 진호가 미쳤어요."

'페로페로몬 최고다.'

[스킬 : 페로페로몬]이 물고기마저 꼬드겼다.

안 그래도 [스킬 : 나는야, 자연의 왕자] 때문에 경계심이 없어진 물고기들이 자기 동료가 옆에서 사라져도 무시한 채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양심의 가책이 조금 생기긴 했다.

"휴우. 이 정도면 충분하나? 아, 세연아. 너도 잡아 볼래?"

"그, 그래도 돼?"

"들어와."

카메라 스태프와 함께 들어온 그녀가 멍하니 물었다.

"야, 너 무슨 밀림의 왕자 타잔이나 모글리 같은 건 아니지?"

"……미쳤냐?"

뜨끔했지만, 진호는 모른 척 연기 했다.

그녀의 말처럼 그런 급이 되기는 했다.

"누구나 몇 번 연습하면 하는 걸로 오버하지 말고 물에 손이나 담가 봐. 조금 더 깊이."

진호는 그녀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세심하게 가르쳤다.

"급하게 하지 마. 천천히. 그래, 일단 잡으려고 하지 마."

"흑?"

"방금 물고기 느꼈지?"

김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을 스치는 이상야릇한 감촉. 손목 까지 저릿저릿하고,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지금!"

반사적으로 손을 쥔 그녀는 경악 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물고기가 손안에서 퍼덕거리고 있었다.

노란색 비늘과 미끄러운 감촉은 징그럽다는 생각보다는 신기하다는 생각을 먼저 들게 했다.

진호는 물고기를 놓지 않는 그녀를 보며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변하려는 의지가 있다고 해도 웬만한 사람은 물고기를 만지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올. 재능 있는데?"

"……내가 좀! 원래 이래!"

환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는 무척이나 빛났다.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은 진호는 그녀의 손에서 물고기를 빼앗아 물으로 던졌다.

"이제부터 혼자 해 볼래? 난 버섯이나 그런 것 좀 캐 오게."

"알았어. 다녀와!"

"팔의 반경을 벗어나면 건드리지 마."

"알았다니까!"

'아주 맛이 들렸네.'

고개를 저은 진호는 다른 먹을거리를 찾으러 떠났다.

입이 7개다. 보통 양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반절의 스태프가 급히 뒤를 따랐다.

이윽고 물소리만 들리게 되자 허리를 편 김세연은 진호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눈을 빛냈다.

"카메라 오빠. 진호 쟤, 원래 저렇게 착해요?"

연기 경력만 14년이다.

진호는 얄미울 정도로 퉁명스럽고 막 대하고 있지만, 그게 괴롭히는 게 아니라 배려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카메라맨은 잠시 갈등하다가 입을 열었다.

촬영 중 함부로 말을 해선 안 되지만, 입이 근질거렸다.

"착하죠. 성실하고, 책임감도 강하고. 만날 저런 게스트만 왔으면 소원이 없을 정도예요."

"그래요?"

그녀는 눈을 빛냈다.

태국에서부터 지금까지. 진호의 모든 행동이 가식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소리였다.

처음이었다. 배우 김세연이 아니라 김세연 그 자체로 봐 주고 대해 주는 사람을 만난 건 말이다. 그녀의 눈이 강한 호기심을 머금었다.

"근육 좀 만질 수 있냐고 물어볼까?"

얼굴이 장난기로 물든 김세연은 식겁하는 스태프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슬그미니 허리를 숙였다.

* * *

한편, 생존지에서 정문이 주방을 짓고 있는 것을 촬영하던 여정호 PD는 머리를 긁었다.

"박 작가. 방금 그 말, 이해 가?"

진호와 김세연을 따라나섰던 스태프들이 보내온 '진호가 물속에 손을 넣으면 물고기가 알아서 잡힌다.'라는 내용의 무전.

"저번 극한 생존 때보다 더 잘 잡나 보죠. 그 진호 친구가 찍은 인터넷 방송 있잖아요. 엎드린 상태에서 반동 없이 물구나무 서는 거. 운동 열심히 한 것 같더라고요."

"흐음……."

그런 것치고는 말투가 혼이 빠진 것처럼 느껴졌지만, 여정호 PD는 이내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했다.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이러다간 진짜로 휴가 온 것처럼 비춰지겠지?"

"그걸 말이라고 해요? 아, 진짜 정문 오빠나 진호나 너무하네. 이러면 생초보들 데려온 보람이 없잖아."

생초보들을 데려왔기에 집 한 채 짓는데만 하루가 걸릴 줄 알았다. 하지만 크나큰 오산이었다.

"이러면 기와 만드는 거나 토기 그릇 만드는 것도 의미 없어지는데……."

하긴 할 거다. 하지만 원하는 만큼 재미는 뽑지 못할 듯했다.

"그렇다고 나중에 써먹을 수영장을 지금 만들 수는 없고."

그의 주위에 몰린 연출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아! 이거 어때요?"

사람들의 시선이 여성 작가에게로 몰렸다.

"이번 테마가 마을 만들기잖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이번 편 제목은 정착 생존이다.

"그래서?"

"마을에 뭐가 있어요? 시골 마을에."

"……야."

"닭이 있잖아요. 오리도 있고, 개도 있고."

"자, 잠깐. 지금 그 말은……."

"네. 야생 동물을 키우는 거죠. 우리도 짓고, 달걀도 구하고."

주위에 몰린 스태프들이 질겁했다.

사탄도 '어우야 그건'이라고 말할 만큼 악독한 말이었다.

이 넓은 정글에서 야생 닭을 찾는 것부터 문제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끌렸다.

여정호 PD의 선한 얼굴이 사악함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상품은…… 삼겹살과 소금이 좋으려나?"

스태프들의 얼굴도 사악함으로 물들어갔다.

부르르!

"응?"

갑자기 든 오한에 급히 주위를 둘러봤던 진호는 이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위협이 될 만한 건 없었다.

한숨을 내쉰 진호는 잠시 멈춰서 눈을 감았다.

뒤따라온 스태프들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이제야 숲의 모든 소리가 들려오며 오롯이 홀로 숲 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해방감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짜릿했다.

'동물이 많구나.'

진호는 슬쩍 고개를 들어 옆 나무 위를 보았다.

한 마리의 다람쥐가 이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다람쥐 와는 생김새가 많이 달랐다.

진호는 나무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다람쥐가 조르르 내려와 진호의 손바닥 위에 올라섰다.

'헉!'

스태프들이 다급히 입을 막는 게 느껴졌지만, 진호는 무시했다.

"끽?"

'아, 아니 괜찮아.'

지금 다람쥐는 자신이 모아 놓은 식량을 넘겨주려 하고 있었다. 고개를 저은 진호는 스태프들을 의식해 입을 열었다.

"사람을 처음 봤나 보네요. 내 어깨에 올래?"

진호는 슬쩍 손바닥을 흔들었고, 다람쥐는 팔을 타고 달려 어깨에 안착해 허리를 세우고 주변을 살폈다. 마치 경호원처럼 말이다. 스태프들은 이제 혼이 빠진 얼굴이 되었다.

이번에도 무시한 진호는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가 깜짝 놀랐다.

'……흔적?'

동물이 지나다닌 흔적이 눈에 훤히 보였다.

그것도 너무 흐릿해 보통 사람이라면 끌고와 가리켜도 모를 흔적이 말이다. 문제는 이게 저번 정글에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 셜록의 후예 때문인가 보다.'

[스킬 : 셜록의 후예]는 살인 현장도 재현하지만, 숨겨진 단서를 찾는 것도 쉽게 한다. [스킬 : 나는야, 자연의 왕자]와의 시너지 효과가 엄청났다.

"……이거 봐라?"

아무래도 이번 생존은 예상한 것 보다 훨씬 재밌어질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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