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4권 13화
* * *
태국 공항에서 멤버 한 명이 합류하게 됐다.
제작진과는 이미 상의된 일이라고 했다.
아역 출신으로 연기 경력이 무려14년인 여배우였다.
청순하면서도 성숙한 외모 덕분에 종종 성인 역할도 해 온 그녀는 이번에 정글에 가는 멤버들 중 서정문 다음 가는 선배였다. 진호 자신과 나이로 따지면 동갑 이지만, 경력이 너무 깊어서 굉장히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제작진이 예약한 숙소로 향해야 했다.
방은 서정문과 같이 쓰게 됐다. 제작진은 무슨 일인지 정문족이라고 불리는 멤버들을 부르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이번에 모인 멤버들 모두 서정문을 어려워했다.
"산군 형이나 경만이 형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베테랑만 섭외했다가는 생존이 휴식이 될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낀 거겠지. 솔직히 너랑 나만 해도 오버 밸런스야."
맞는 말이다. 이런 둘에게 전문 도구까지 들려 줬으니, 이미 한참 오버한 상황이었다.
진호는 이제야 왜 멤버들 모두 선남선녀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분량을 정글 초보들의 실수와 분투, 비주얼로 뽑겠다는 심산이 분명했다.
"아, 빡세겠네. 누가 칼을 들고 왔기만을 바래야 하려나?"
자신이 생존지가 있는 공항에 먼저 보내 놓은 것도 칼 비슷한 물건이긴 하지만, 그래도 진짜 칼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파이팅해야지. 이제 믿을 사람이 너밖에 없다, 진호야."
"아뇨. 믿지 않으셔도 돼요. 부담스럽습니다."
"진호야!"
"으악!"
그렇게 둘은 침대 위에서 뒹굴다가 몸을 일으켰다.
"술과 맛집 투어가실래요?"
"좋지!"
저녁에 제작진이 식당도 예약했다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순 없었다. 둘은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숙소를 나섰다.
숙소는 카오산 로드라는 곳에 있었는데, 검색해 보니 주위에 맛집이 많았다.
허름한 쌀국수 맛집을 찾아 들어간 진호는 능숙한 태국어로 주문을 했고, 진호를 본 순간 넋을 잃었던 종업원은 현지인보다 더 현지인 같은 발음에 경악해 허둥지둥했다.
"캬으!"
"캬!"
맥주와 쌀국수는 의외로 궁합이 좋았다.
맥주는 특이하게도 얼음을 타 먹었는데, 먹다 보니 왜 그런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술이 술술 들어가."
"그럼 안 들어갈 때까지 달려야죠. 저도 술술 들어가요, 지금."
키득키득 웃던 둘은 갑작스런 종업원의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No! กลับไป(안돼! 돌아가!)!"
가게 문 앞에 선 더러운 개 한 마리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스킬 : 페로페로몬]의 단점이라면 이거다. 아무 동물이나 꼬드겨 버린다.
진호는 개에게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놀란 종업원이 말리려 했지만, 늦었다.
"돌아가. 친구들에게 말해서 오지 말게 하고."
쓰다듬는 진호의 손을 바쁘게 핥은 개는 한번 짓고는 아쉬워하며 사라졌다.
종업원이나 가게 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멍하니 진호를 보았다. 진호는 무시하며 자리에 앉아 물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돌아가면 반려동물 행동 교정 센터 짓는 게 어때?"
"대소변 치우다 하루 갈 것 같아서 좀."
"아, 그건 힘들지……. 아, 동물 관련 예능 많이 들어오지 않아?"
"많이 들어는 오는데……."
고정이 아니라 게스트라서 크게 끌리지 않았다.
그리고 단가도 안 맞았다. 엇비슷하면 출연했을 테지만, 3분의 1 수준밖에 안 되었다.
서정문은 그런 진호의 마음을 이해했다.
연예인은 인기가 곧 몸값이다. 그걸 대우해 주지 않으면, 굳이 출연할 필요가 없었다.
"얼른 먹고 일어서죠! 주위에 맛 집 많아요!"
둘은 젓가락을 빠르게 놀리기 시작했다.
다 먹고 계산하기 전 사근사근한 말투로 레시피도 물어봤다.
* * *
제작진은 저녁 식사를 방콕에서 유명한 현지 요리 레스토랑으로 잡았다. 진호는 그곳에서도 레시피를 물어봤다.
이후 스케줄은 자유였다.
와글와글.
해가 지자 카오산 로드가 시끄러워졌다.
거리엔 가판이 설치되고, 온갖 길거리 음식과 수공예품을 팔았다.
"진짜 잘 먹는다. 저녁을 그렇게 먹었는데도 그게 들어가?"
서정문은 길거리 가판에서 산 꼬치를 입에 문 진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제가 가장 출연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여권에 도장 받는 그 먹방 프로그램이에요. 정말 신기록 경신 할 자신 있는데……."
"그러지 마. 이미지 망가져."
"그 이유 때문에 회사가 반대하고 있죠."
방송이 아니라 모델 일 때문이다.
많이 먹는 모델은 몸이 커질지 모른다는 시한폭탄처럼 인식되어 버리니 말이다.
풀이 죽은 진호는 스트레스를 풀고자 전투적으로 중지 크기의 꼬치를 물어뜯었다.
카오산 로드의 진짜 볼거리는 야시장에 있었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열리는 야시장이다 보니 온갖 신기하고 재밌는 것들이 많았다.
진호와 서정문은 정글에서 막 입을 겸 태국에 왔다는 흔적을 간직 하고자 티셔츠 몇 개를 샀다. 서정문의 아내를 위한 결혼기념선물도 샀다.
여기서도 진호의 미모는 빛을 발했다.
"캬, 이걸 이렇게 싸게 사네."
티셔츠 다섯 장을 사는데 딱 만 원이 들었다.
처음 장당 250바트, 한화로 약 8, 000원정도인데, 진호가 살살 애교를 부리자 2, 000원까지 낮아지게 되었다.
진호는 엄지를 치켜드는 서정문을 향해 브이를 그려 주었다. 그러다 얼른 몸을 비틀었다.
"옷차."
"ระวังตัวด้วย(조심해!)!"
어이가 없었다.
"아니, 자기가 앞을 안 보다 부딪칠 뻔해 놓고…… 응?"
치미는 부아를 누르며 멀어지는 현지인 청년의 등을 노려보던 진호는 미간을 좁혔다.
"족장님, 저기."
"어? 세연이네?"
14년차 배우 김세연이 어떤 태국인 청년들과 함께 있었다.
안쪽을 가리키며 웃는 태국인 청년들과 눈빛이 초롱초롱한 김세연을 보니 무언가를 싸게 팔고 사려는 듯싶었다.
서정문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진호는 아니었다.
'아, 저러다 큰일 나겠다.'
거의 반사적으로 발이 떼어졌다. 성큼성큼 걸어간 진호는 세연의 팔을 잡아 등 뒤에 숨기며 태국인 청년들을 노려봤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방금 전부딪칠 뻔한 태국인 청년도 노려봤다.
"อย่าทำอย่างนั้น(그러지 마.)."
진호의 입에서 태국어가 흘러나 오자 남성들이 깜짝 놀랐다.
진호는 계속 태국어로 이야기했다.
"이 사람, 한국에서 유명한 배우야. 이렇게 예쁜 거 안 보여? 무슨 일 생기면 이곳 경찰들이 모두 움직일걸?"
흠칫!
"허, 헛소리! 왜 우리 손님을 뺏는 거야!"
'손님일 수도 있겠지. 바가지를 엄청 씌울.'
사내들의 얼굴과 몸엔 엄청난 욕심이 서려 있었다.
진호는 1, 000바트 한 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이거 먹고 사라져. 그러지 않으면……."
진호는 마음속에서 무휼을 꺼내었다.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사나운 기세와 눈빛.
"나도 더 이상 말로 안 해."
"헉!"
사내들은 하얗게 질리며 주춤 물러섰다.
"카악, 퉤! 내놔!"
1, 000바트를 낚아첸 사내들은 시장 골목 속으로 사라졌고, 진호는 그제야 숨을 크게 내뱉을 수 있었다.
무이, 무휼은 다시 고개를 숨겼다.
"푸하. 다리 떨려 혼났네!"
심장이 벌렁거려서 미칠 것 같았다.
친구 재준과 싸운 적은 있어도 다른 사람과의 싸움은 처음이었던 지라 혹시라도 주먹질할 상황이 벌어질까 굉장히 조마조마했었다. 진호는 눈이 동그래져 있는 김세연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외국에선 동향 사람이라도 따라가지 말아야 해요. 특히 혼자라면 더더욱."
"하, 하지만 여기는……."
안다. 카오산 로드는 방콕에서도 치안이 좋기로 손꼽힌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매치기 같은 게 없을 리 없다.
밀라노와 파리 같은 대도시도 소매치기로 유명하니 말이다.
"앞으론 다른 사람하고 같이 다녀요. 설사 안 친하다고 해도."
콧방귀를 뀐 진호는 어느새 다가와 김세연 옆에서 있는 서정문을 보았다.
"가요, 족장님. 내일 비행기 탈 때까지 달려야죠!"
"어? 어, 그래. 술. 마셔야지! 달려야지! 잠은 비행기에서!"
뭔가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던 서정문이 활짝 웃으며 진호의 등을 두드렸다.
수고했다는 뜻이 가득 느껴져 절로 입꼬리가 움직였다.
하지만 진호는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손 때문이었다.
"친하지 않다고 해도 같이 다니라고 했죠?"
'……그게 나는 아닌데.'
그래도 뱉은 말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어이구. 우리 많이 먹는데 괜찮아?"
"주량은 걱정 마세요! 저도 성인이에요!"
"나야 젊은 술친구가 늘면 좋지! 진호도 괜찮지?"
'전 이 사람한테 관심 없어요. 엮으려고 하지 마세요, 족장님.'
얼굴에 그런 내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나이가 무려 두 배 이상 많은 어른이 해맑게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네."
"으하핫! 진호라면 이럴 줄 알았어! 역시 우리 진호! 가자!"
진호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으며 걸음을 옮겼고, 김세연은 그런 진호를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 *
술집에서 별다른 일이 생기지는 않았다.
12시가 넘어 술집들이 문을 닫으면서 술자리를 진호와 정문의 방으로 옮겼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술 때문인지 서로 친해질 수 있었다.
진호와 서정문, 김세연은 급하게 달리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두 불과한 얼굴로 비행기를 타야 했다.
몇 시간을 날아 생존지가 있는 공항에 도착한 그들은 오프로드용 자동차를 타고 정글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덜컹, 덜컹!
"진호야…… 나 해장……."
"재료 없다."
"너무해……."
진호는 하얗게 질린 김세연을 한심하다는 듯 보았다.
"팔은 놔라. 알코올 쓰레기."
"왜? 불끈불끈해?"
"아니, 불쾌해."
진호는 진심을 담아 팔을 털었고, 옆으로 내쳐진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
"정말 아무 감정 없으니까 '날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라는 눈빛은 짓지 마."
"와, 자존심 상해."
"그러든가 말든가."
키기긱! 드디어 차가 섰다.
차에서 내리니 코와 입으로 정글의 향기가 한껏 빨려 들어왔다. 고향에 온 듯한 기분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날씨 좋고!'
집을 다 지을 내일 오전쯤 비가 올 듯싶었다.
"우욱! 우웩!"
'아나…….'
재준보다 더 손이 가는 친구는 처음이었다.
"에휴. 내가 어쩌다 이런 거하고 친구를 먹어서."
"저리 가. 보지 마."
"토하기나 하세요. 얼른 가서 집 지어야 해,
"웨에엑!"
그래도 다행이라면 그녀뿐만 아니라 신입 부족원들 모두 오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거다.
진호는 하늘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아. 시작부터 빡세네."
이번 촬영, 정말 보모가 될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출연자들이 진정되고 나자 이동이 시작됐다.
거의 2시간여 걸어 도착한 이번 생존지는 대체 어떻게 찾았는지부터 궁금한 직경 30여 미터 정도의 공터였다.
'아, 사람이 살았던 곳이구나.'
아주 미세하지만, 그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윽고 각자의 생존 도구가 나눠졌다.
진호는 주지 않으려는 제작진을 향해 강하게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어우우!"
"캬아! 그래, 이거지!"
옆을 보니 서정문이 벌목용 도끼 한 자루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건축 관련 자격증이 있는 서정문에게 벌목용도끼는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그건 진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얼른 주세요."
제작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아. 진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진호 씨가 이걸 가지는 건 정말 반칙인데…… 진호 씨 우리가 조미료 줄 테니까, 응?"
"그간 정글의 생태계에 대해 정말 많이 조사했으니까 마음만 받을게요."
"아오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인지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진호는 넘겨받은 도구의 케이스를 벗겼다.
"으흐흐."
검은 광택의 그것은 한 자루의 접이식 특수 삽이었다.
그것도 날카롭게 날이 세워진 삽 머리 한쪽이 톱으로 변형된.
정글 맞춤형 생존 도구였다.
"진짜 반칙인데……."
"흐흐흐. 전 분명히 약속대로 하나의 도구만 가져왔습니다."
"끄으응."
"오. 이게 그거야?"
서정문이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네. 특수 제작한 물건이라 차가 올라가도 버틸 만큼 내구도가 좋아요. 나중에 산이나 바다로 여행갈 때 쓰려고 사둔 건데, 이렇게 쓰이네요."
서정문의 눈이 더욱 빛났다.
진호는 삽을 욕심내기 시작한 정문의 시선을 무시했다.
"제가 배수로 팔까요, 아님 나무 베어 올까요?"
서정문이 대답 대신 도끼를 내밀었다.
"한 명만 데려갈게요. 주변 탐색도 할 겸."
"괜찮겠어?"
"충분해요. 세연아, 옷 두껍게 입어. 소풍 가자!"
"어? 어!"
진호 자신보다 예능 초보인 친구. 1초라도 분량을 더 늘려 주고 싶었다.
"자, 잠깐, 진호 씨! 어허! 카메라랑 같이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