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4권 5화
* * *
이젠 어딜 가든 사람들이 알아봐 주었다.
이름은 몰라도 '천 년의 노래, 무이'로 알아봐 주었다.
덕분에 인터넷에서 무이가 실존 인물이냐로 설왕설래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만큼 광고 단가도 높아져 갔다.
파앙! 팡!
오랜만에 테니스 클럽을 찾은 진호는 후끈 풍겨 오는 열기에 미소를 지었다.
"오! 진호! 똑똑한 줄 알았지만, 그렇게 똑똑할 줄은 몰랐어!"
"이야,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드라마 잘 보고 있다! 이제 주연만 맡으면 되겠네!"
오랜만에 만나게 된 회원들은 진호의 성공을 마치 자신들의 성공처럼 기뻐해 주었다.
유명해졌다고 거리를 두지 않는, 변치 않은 그들의 환영이 마치고 향에 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한 그는 빈 코트에서서 몸을 풀었다.
잠시 후 약속한 상대가 나타났다. 더 짙어진 갈색 피부를 뽐내는 국내 최정상 플레이어 박현이다. 회원들과 인사를 하며 들어오던 그는 진호를 보곤 살짝 굳었다.
"몸이 변한 것 같은데? 운동 열심히 했나 봐."
"이전처럼 압도적으로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했죠."
우리 동네 스포츠 촬영 이후 진심으로 붙은 경기에서 진호는 박현이 왜 세계에서도 통하는 국내 최정상 플레이어인지를 알게 되었다.
진심이 된 그는 너무도 커다란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도저히 질 것 같지 않았다.
"호오. 그럼 일단 가볍게 한 판?"
"후딱 끝내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죠. 서브는 형님이 먼저!"
"……허!"
이내 어이없다는 듯 웃은 박현은 진호의 반대편 코트에 서서 몸을 풀었다. 사람들이 휘두르던 라켓을 멈추고 몰려들었다.
어찌 보면 테니스 클럽 최강자들의 대결이었다.
진호는 박현이 통통 공을 튕기며 최정상으로서의 프레셔를 뿜어 오자 확신할 수 있었다.
'아, 이거 진짜 사기다.'
살짝 비틀린 턱과 발끝, 어깨. [스킬 : 셜록의 후예]가 박현이 어디로 서브를 보낼지를 읽고 있었다.
[스킬 : 테니스의 황태자]와[스킬: 사상 최강의 제자]가 결합되어 차원이 달라진 동체 시력이 시간을 느리게 만들었다.
모두가 물속에 있고, 자신만이 지상에 있는 듯했다.
이런 느낌은 이미 촬영장에서도 맛보았지만, 다시 생각해도 정말 사기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높이 토스된 공이 휘둘러지는 라켓에 뭉개지며 쏘아지는 순간 진호의 몸도 벼락처럼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고무바닥이 [스킬 : 나는야, 자연의 왕자]와 감응되어 발을 밀어 주는 느낌이었다.
눈이 부릅떠지는 모습조차도 느렸다.
진호는 스핀을 먹은 공이 가라앉기도 전에 라켓을 휘둘렀다.
퍼엉!
……통. 통. 통.
사람들은 침묵에 휩싸였고, 진호는 넋을 놓은 박현을 보며 씩 웃었다.
"피프틴 러브?"
6-1의 스코어로 한 세트가 허무하게 끝났다.
이 엄청난 점수에 박현을 비롯한 회원들은 입을 다물었다.
원래 스포츠라는 게 꼴찌에게도 1위가 잡아먹히는 곳이라지만, 이건 숫제 어린아이가 성인이 되어 버린 격이었다.
그만큼 진호의 발전은 놀라울 정도였다.
박현이 허탈하게 말했다.
"예능 찍고 드라마 찍는데도 이 정도."
진호는 그 마음을 이해했다.
처음 박현은 싱겁다 느껴질 만큼 아무것도 못했다.
어떤 시도를 하려고 해도 다 읽혔다. 초등학생과 프로 테니스 선수가 서로 전력을 다한 경기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박현이 진심을 넘어 전력을 꺼내 드는 순간 서로에게 다르게 적용 됐던 시간이 비슷해졌다.
국내 최정상 플레이어에게 전력을 꺼내 들게 만들었다는 그때 그 희열은 억만금을 주더라도 절대 팔 수 없는 성취감을 안겨 주었다. 박현의 눈이 날카롭게 떠졌다.
"어느 산이냐."
"……요새 그런 농담 하면 여자 친구 안 생겨요, 형."
진호는 한심하다는 듯 보았고, 박현의 얼굴은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제야 환호성이 터졌다.
먼저 손을 내밀어 박현을 일으킨 진호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형, 습관 있는 거 알아요?"
"그럴 리가."
스포츠에서 습관은 곧 약점이다. 그래서 철저히 지워 왔던 그다. 진호는 믿지 못하는 그에게 오늘 발견한 습관들을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이런 씨. 팔꿈치 각도 3도 이런 걸 경기에서 어떻게 구분해!"
맞다. 그 먼 거리에서 순간적으로 휘둘러지는 팔꿈치가 원래보다 3 도 내려갔다는 건 구분하기 힘들다.
하지만 진호는 당당했다.
힘들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난 구분했잖아요."
"……."
"눈이 구분하는데, 기계가 구분하지 못할까요. 아마 누군가는 형의 밸런스가 무너졌다는 걸 알아차리고 준비에 들어갔을걸요?"
"돌겠네."
이걸 교정하거나 이용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하지만 해야 했다.
"그냥 너 프로 해라. 아시아게임 금메달이면 면제다."
순간 혹했다.
군대, 대한민국 남자로서 예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음. 아직 계약이 2년 남아서. 그건 그 이후에 생각해 볼게요."
솔직히 당장이라도 프로의 세계에 뛰어들어 세계적인 플레이어들과 겨뤄 보고 싶다.
순수하게 그들과 볼을 나눠 보고 싶다.
하지만 그 감정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모두 팽개치고 도전할 만큼 간절한 건 아니다. 물론, 기회가 생긴다면 하겠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친선 경기 같은.
거기다 지금은 무리다.
박현이 전력을 꺼내 드는 순간 알게 됐다.
'지금보다 근육을 0.2배 이상 늘리지 않으면 힘들어.'
지금부터 근육을 늘리려면 액션 스튜디오에서 스킬을 얻기 위해 헤쳐 왔던 지옥은 천국처럼 느껴지는 트레이닝을 해야 한다.
생각만 해도 토가 나올 것 같았다.
"그래. 우리나라에서도 그랜드 슬램을 달성할 플레이어가 나을 때가 됐지. 믿는다! 서른 이전에만 프로 돼라!"
"믿지 마시고, 기대하지도 마세요."
신뢰 가득한 눈빛을 코웃음으로 넘긴 진호는 땀을 닦기 위해 몸을 돌렸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박 검사님?"
박서연 검사가 놀란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둘은 자리를 옮겼다.
박서연 검사가 감사의 인사로 밥을 산다고 했다.
진호는 그녀의 두 눈에서려 있던 경계심에 거절했지만, 박서연 검사가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래서 박현 선수와 약속이 있어서 힘들다 말했더니 기다린다고 했다. 밥이나 술 약속이면 자신이 산다고 했다.
진호는 경기를 하다 보면 돌아가겠거니 생각하고 2세트를 시작했다. 결국 세트 3 대 1로 승리를 거뒀다.
경기 내용은 제법 치열했다.
박현의 컨디션이 정상이었다면 엄청난 체력전인 매치 포인트 싸움이 됐을지도 몰랐다.
그런 국내 최정상 플레이어와의 전력을 기울인 플레이는 진호에게 꽤 많은 것을 안겨 주었다.
두둑한 자문료도 받았다.
단점과 습관을 다 외우지 못한 박현 때문에 그의 코치와 따로 이야기를 나눠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그녀는 돌아가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고집 있는 거고 나쁘게 말해도 고집 있는 거네. 순댓국도 좋은데.'
클럽근처에 순댓국 맛집이 있다.
이런 레스토랑은 맛은 좋아도 양이 무척이나 적었다.
청담동이라 값도 어마어마했는데, 창가이기까지 했다.
'아, 하긴 우리 클럽에 다니지.'
회원 대부분이 사장님 소리를 듣는 만큼 연회비가 엄청나다.
"박 검사님이 클럽의 회원일 줄은 몰랐어요."
손목에 찼던 보호대와 라켓이 좀 낡았다.
꽤 테니스를 쳤다는 소리다. 이보다 더 놀라운 점이 있다.
'술 끊었네?'
얼굴에서 술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언제부터 다니셨던 겁니까?"
"1년은 넘었죠."
"박현 선수와는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그건 개인 프라이버시라서요."
왜 취조를 받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진호는 살짝 억울했다. 대충 예측은 됐지만, 이해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 수고하세요. 기다려 준 건 미안하지만, 먹은 걸로 칠게요."
'대한민국 모든 남자가 자기에게 관심 있는 줄 아나. 도움 줬는데, 이러면 안 되지.'
밀어내는 사람과 친해질 이유는 없었다.
일어서 몸을 돌린 진호의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아니면 언제 시간을 낼지 모릅니다. 그러니 부디 앉아주세요."
정말 고집 있는 사람이었다.
'에휴. 고모부 휘하 검사만 아니었어도.'
그녀는 형사 3부 소속 검사였다.
그래서 그때 보여준 현장도 그녀가 맡고 있던 사건이라고 했다. 속으로 혀를 찬 진호는 자리에 앉았다.
"그땐 고마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운을 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덕분에 현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습니다. 제 가치관이…… 아무튼 그에 대해 감사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지금 인사를 드리는 겁니다. 늦었지만, 한 명의 대한민국 검사로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됐습니다. 그럼 시키시죠."
진호는 멍하니 박서연을 응시했다.
'가치관이 변한 건가?'
놀라운 한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모부가 말하길 검사가 발로 뛰지 않으면 사건의 진실은 파악하기 힘들고, 억울한 피해자가 생긴다고 했다.
검사, 아니 사람으로서 본 받을 점이 많은 분이었다.
지금 자신은 한 명의 검사를 그런 검사로 만든 것이었다. 괜히 머리가 간지러워졌다.
'조금만 먹어야겠다.'
이윽고 음식이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딱 음식만 먹고 일어섰다.
"에휴. 뭘 기대한 거냐."
아닌 걸 알면서도 은근슬쩍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게 남자의 마음인 듯싶었다.
혀를 찬 진호는 몸을 일으켰다.
* * *
위이잉! 위이잉!
스케줄이 오후에 있는지라 오랜만에 늑장을 부리던 진호는 쉴 틈 없이 울리는 전화에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여보세요."
-어떻게 된 겁니까, 진호 씨.
"다미앙 씨? 아니 그보다 뭐가 어떻게 돼요? 무슨 일 있어요?"
-일단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부터 봐 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연락 주십시오.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뭐야, 대체."
의아해하며 핸드폰을 켠 진호는 쌓여 있는 문자와 메시지, 부재중에 눈을 껌뻑였다.
후다닥! 쾅!
"아들! 너 연애하니? 직업이 뭔데?"
"이 아줌마가 아침에 이상한 걸 드셨나."
"연애한다며!"
"누가?"
"네가!"
지금 자신이 자다 일어나 정신이 멍해서 환청을 듣나 싶었다.
진호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닌데? 엄마 아들은 지금도 모태솔론데?"
"못난 놈. 난 내 아들 그렇게 안 키웠다."
"연애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하라며!"
"니가 언제 엄마 말은 들었니?"
팩트가 심장에 꽂혔다.
"흐음. 그럼 이건 뭐야?"
어머니 나진희가 핸드폰을 보여 줬다.
거기엔 '이진호 열애!'라는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었다.
"그러게. 뭘까."
상상을 벗어나는 상황이 닥치니 뇌가 잠시 일하는 걸 멈추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박서연 검사와 청담동에서 밥을 먹은 게 연예부 기자에게 걸렸던 것이다. 차로 이동해 바로 건물로 올라갔다. 미행도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아서 직원들에게 들어 보니, 연예인이 가지 말아야 할 1순위 동네 몇 곳 중 하나가 청담동이라고 했다.
돌아다니는 연예인이 많아서 그 만큼 하이에나처럼 서성이는 연예부 기자가 많다며 말이다.
"정말 아니라는 겁니까?"
"네. 저희 고모부 휘하 검사인데 고모부 명령으로 제게 판결문을 전해 주시러 온 것뿐이에요."
요새 판결문을 읽으며 왜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를 추리하는데 재미를 붙였다.
그래서 어제도 늦게 잔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유명해지니 이런 일도 생기는가 싶었다.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검사라……."
다미앙은 피식 웃었다.
특종에 목마른 기자가 상대를 잘못 골라 버렸다.
사법부는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다.
"그럼 범죄 예방 홍보대사와 연관 지어 반박 기사를 내겠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죄송했습니다."
"아뇨. 다미앙 씨 입장이라면 당연한 일이죠. 괜찮아요. 그보다 그 외에 어떤 요구는 없었죠?"
기자들 중엔 약점을 잡고 돈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다는 소리가 떠올랐다.
다미앙의 입가가 잔인하게 비틀렸다.
"혹여 그랬다면 그 기자와 신문 사는 소송 비용을 감당 못하고 파산했을 겁니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직원들이 놀라 다미앙을 보았다.
하지만 진호는 아니었다.
그는 옅게 웃었다.
"무섭네요."
"늦어도 내일 안까지 진정시키겠습니다. 조용히."
다미앙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지만, 그렇기에 더 서늘했다.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