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4권 3화
사건 현장 옆 옆의 사무실. 사람 몇 명이 진호가 나오는 모니터 몇 개를 앞에 둔 채 앉아 있다.
몇 대의 카메라가 그들을 찍고 있다.
"와, 얘 봐라? 벌써 카메라를 눈치챘는데?"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장영진이 혀를 내둘렀다.
이번에 크리미널 크라임 시즌4를 맡게 된 PD가 깜짝 놀라 그를 봤다.
"정말입니까?"
이제 막 계단에 올랐을 뿐이다.
"어, 눈치 챘어."
'눈치 빠르네.'
장영진은 흥미롭다는 듯 검은 원피스의 여성을 보며 의아해하는 진호를 응시했다.
"박 PD. 저 원피스 여성, 뭐 있지?"
"노코멘트입니다."
"아오, 봤어야 했는데."
성공한 영화감독으로서 많은 작품을 찍으며 온갖 사람들을 만나 오다 보니 웃기기는 했어도 그냥 괴짜이겠거니하며 유심히 살피지는 않았다.
너무 아쉬웠다.
"아, 근데 비주얼 너무 탐난다."
시청률을 싹쓸이하고 있다는 말에 찾아보았던 '천 년의 노래'에서도 연기가 아주 좋았다.
배역을 자기 방식으로 소화하는 연기가 아니라, 배역에게 나를 던져 배역 그 자체가 되는 매소드 연기. 달려라 박 과장에서의 재벌집 막내아들의 모습은 단 한 톨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랜만에 비주얼까지 갖춘 연기파 배우가 나타난 것이다.
장영진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진호를 계속 응시했다. 그러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자리에 모인 크리미널 크라임 연출진도 동요를 보였다.
"왜 저렇게 냉정해?"
일부러 피 냄새를 짙게 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상함을 느껴야 했다.
고개를 저은 PD는 버튼을 눌렀고, 그제야 진호가 놀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푸하하하핫! 한숨 쉬는 것 좀 봐!"
배꼽을 잡고 웃던 장영진은 이내 진호의 눈빛이 변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모니터에 고개를 들이 밀었다.
그리고 시작된 진호의 단서 찾기에 마른침을 삼켰다.
표정이 풍부하단 소리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극명하게 다를 줄은 몰랐다. 부끄러워하던 모습, 달관하는 모습, 추리하는 모습. 마치 세 명의 다른 인격이 있는 것 같았다.
"……얘 진짜 탐나네."
어떤 캐릭터를 던져 주어도 소화 시킬 것 같은 느낌.
거기다 눈치와 관찰력도 좋았다. 감독으로서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어? 이거 졸피뎀인데?
장영진이 급히 PD를 보았다.
PD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야, 약만 넣어 놔서 모를 텐데……."
* * *
리셋라이프 때문에 아버지친구분이 흉부외과 과장으로 계시는 병원에서 의약품 창고 관리를 해 봐서 안다.
작년에도 [스킬 :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를 얻기 위해 그 병원에서 며칠간 의약품 창고 관리를 했었다.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탐정 관련 스토리의 주인공이 한 말 때문에 너저분한 사무실에서 이질적인 무언가들을 일단 무시했던 진호는 머리가 아파옴을 느꼈다.
이상한 점은 있다.
비타민제 통에 불면증 치료에 쓰는 졸피뎀이 들어 있다는 것.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타살인지 자살인지를 확신할 수가 없다.
'단서가 부족해.'
"흠……."
'이럴 땐 움직이라고 했지.'
"다 뒤져 보자."
진호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오! 비밀번호를 풀었는데!'
결국 타살이란 것만 밝히고서는 시간이 끝나 버렸다.
사무실에 있던 총 여섯 대의 컴퓨터 및 노트북 중 딱 한 대의 컴퓨터에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우산에 적혀 있던 번호와 사무실에서 찾은 다른 번호들을 조합해 겨우 풀었는데, 그만 시간이 다 되어 버렸다.
바탕화면의 많은 아이콘 중 딱 하나 있던 문서 파일.
"아, 이거 꼭 방 탈출 게임 같네."
'한번 해 봤으면 더 빨리 풀었을 텐데.'
"그렇죠?"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이진호입니다!"
진호는 최은수 작가 일 이후 국내 감독 및 작가들의 얼굴을 외우기 위해 노력했다. 방송국 PD와 작가들도 말이다.
"그래요, 반가워요. 장영진이에요. 역시 젊은 사람이라서 머리가 좋네. 난 컴퓨터 비밀번호는 감도 못 잡았는데."
"하하."
초면에 너무 칭찬을 해 주고 있었다.
진호는 커피를 내밀었다.
"얼음이 좀 녹았습니다."
"어휴,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아, 이쪽은 시즌4 담당 PD."
진호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나니, 모니터 안에서 스태프들이 움직이는게 보였다.
스태프들은 현장을 빠르게 원상 복구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 괜찮아요? 지금쯤이면 이야기나 촬영이 중반까지 전개되면서 비중도 높아졌을 건데. 이거 못해도 6시간 정도 촬영해요. 촬영장까지 왔다 갔다 할 시간을 생각하면, 어휴."
장영진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역시 감독이라서 그런지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그의 말처럼 극중 이야기가 중반으로 향하면서 무이의 비중이 늘어나게 됐다. 모두 구미호를 정도전에게로 이끈 여주이자, 무이로서는 어릴 때 헤어진 동생 때문이었다.
무이의 주인은 정도전이 왕으로 만들려는 이성계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
이미 4화쯤 만난 무이와 여주는 이후로도 계속 만났다.
단, 서로가 모시는 주인을 모르는 채였지만, 12화쯤 이 사실을 알게 된 무이는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게 된다.
총 38화 증 이제 20화를 찍은 것에 불과하지만, 비중이 높아진 만큼 촬영장에 붙어 있어야 할 시간도 많아졌다.
그래도 일주일에 하루도 시간을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는 분들도 계시는데 이 정도 가지고요."
실제로 주연 배우들은 촬영장에 잘 있지 못할 정도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여유로웠다.
"오. 듣던 것처럼 성실하네."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윽고 다른 연예인이 도착했다.
이번엔 걸그룹 멤버였다.
진호는 모니터 앞에 자리 잡은 사람들 사이에 껴서 모니터를 보았다.
-어? 주무시나? 이 냄새는 뭐지?
삐이이잉! 삐이이잉!
-아아악!
카메라가 있는지도 모른 채 들어온 걸그룹 멤버가 경기를 일으키자 웃음이 터졌다.
진호도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 * *
컴퓨터 비밀번호를 푼 사람은 진호가 유일했다.
모두 비밀번호를 풀어 보려다 포기한 후 다른 단서를 찾아 움직였다.
진호가 찾지 못했던 단서를 찾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대단하네.'
최소 데뷔 5년 이상 된 사람들이라서 여성을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게 못 푼 이유다. 진호 자신에겐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던 게 그들에겐 스쳐 지나가는 일상이었던 것이다.
분명 재미는 있었지만, 앞으로 매 회 최대상금 600만 원을 걸고 추리 및 연기대결을 펼쳐야 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약간 경각심이 들었다.
"흠. 아, 일단은 정 대리님부터."
분명 알고 있었다.
배신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었다.
"네, 정 대리님. 어디세요?"
진호의 목소리는 굉장히 나긋나긋했다.
* * *
첫 화 촬영까지 2주 정도 걸린다고 했다.
아직 출연자들 간의 스케줄 조정이 다 끝나지 않아서라고 했다. 뭔가 이상해서 회사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방송국과 소속사 간의 기 싸움이라는 것 같았다.
덕분에 시간을 벌게 된 진호는 추리 관련 스킬을 얻기 위해 움직였다.
굳이 스킬을 터득하지 않아도 요령만 깨친다면 '크리미널 크라임'을 찍는데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았지만, 관련 스킬을 자세히 생각 해 보니 의외로 도움이 되는 부분이 많았다.
"여길 다시 왔네."
진호는 높은 건물을 바라보며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서울서부지방 검찰청.
검찰청이 스킬을 얻는 장소인 스토리는 두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검사 관련 스토리고, 다른 하나는 지금 얻을 [스킬 : 셜록의 후예]의 스토리다.
1차 해금 조건은 추리 소설 100 권 읽기고, 2차 해금 조건은 사람 천 명의 직업 맞히기였다.
진호는 방송국이라는 꼼수를 써서 하루 만에 해치웠다.
방송국에는 거의 연예인과 관련자 아니면 방송국 직원 밖에 없으니 말이다.
무이가 제법 유명해진 덕분인지 로비에 앉아 있으니 많은 이들이 다가와 알은 척을 해 주어서 쉽게 끝낼 수 있었다.
마지막 3차 해금 조건이 여기 서부지검과 관련 있었다.
어려서부터 읽은 추리 소설의 영향으로 추리와 사건을 좋아하던 주인공은 탐정을 꿈꾸며 자라게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하는 지인을 통해 수많은 사건 파일들을 읽으며 상황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시야와 직관력 등을 키운다. 본래라면 수많은 상황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쌓아야 하는 경험을 그는 사건 파일을 읽는 것으로 끝내 버린다.
진호는 핸드폰을 들었다.
"네, 고모부."
'3차 해금 조건은 검찰청에서 사건 파일 천 개 살펴보기.'
-어이, 조카. 도착했어? 어서 올라와. 다들 기대하고 있어.
"하하."
진호는 들고 온 선물을 한번 점검하고는 검찰청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 여자였다.
그들은 진호를 보자 얼굴을 붉혔다.
"어, 왔어?"
후덕한 인상의 50대 장년인이 손을 들어 맞이했다.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아저씨지만, 허투루 왔다가는 큰코다친다. 유도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이기 때문이다.
"잘 계셨죠?"
"그럼, 나야 잘 지냈지. 아, 이쪽은 조카 보러 몰려온 직원들. 프로들도 있어. 저녁에 드라마 볼 시간이 있는 불량 검사들이지."
"부장님!"
"어이구, 치겠다. 진호야, 내가 이렇게 산다."
차마 뭐라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그들을 향해 진호는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형사 3부서우호 부장검사님 처조카 이진호입니다. 저희 첫째 고모부 잘 부탁드립니다."
아버지와 동년배인 그가 아직도 부장검사에 머무는 건 딱히 명예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힘들기는 엄청 힘들지만, 위로는 올라가기 힘든 강력 사건만 다루는 형사 3부다.
진호는 성대히 반겨 주는 그들과 사진도 찍고, 사인도 해 주었다.
곧 부장검사실엔 둘만 남게 되었다.
"여기요."
"어이쿠, 이 비싼 홍삼을 왜 이렇게 많이 사 왔어? 아주 1년을 먹겠네."
"뇌물이죠. 아, 김영란법에 걸릴 까요?"
"괜찮아. 내가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 없음 때려 줄게."
"흐흐흐. 감사합니다."
둘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나저나 다음 작품을 이쪽 인물로 할 거야? 대본은 나왔고?"
"그때 가면 시간이 없으니까 틈틈이 익혀 두려고요. 검찰청 내의 분위기도요. 실례가 되는 건 아니죠?"
"진행하는 사건도 아닌 마무리된 사건 파일들만 보는데 실례는 무슨. 판례도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찾을 수 있고. 밖으로 유출만 하지 마."
"당연하죠."
"여기 이 노트북으로 봐."
"괜찮겠어요?"
"어딜 가나 다 바빠."
미안해 머리를 긁적인 진호는 책상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천 개를 오늘 안에 다 볼 수 있으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곧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만 부장검사실을 울렸다.
사건 파일은 거의 절도, 청소년, 여성, 가정 폭력, 병무, 안전사고 등이었다. 그리고 70퍼센트 이상이 무혐의였다.
고모부가 배려해 준 것이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어그 그! 진호야, 그만하고 술 마시러 가자!"
진호는 놀라 그를 보았다.
"또요? 이러다 정말 혼나시는 거 아니세요?"
첫째 고모는 술과 담배를 정말 싫어하시는데, 고모부는 둘 모두 좋아해서 신혼 때 엄청 싸웠다고 했다.
"이런 합법적 술자리를 뺄 수야 있나. 딱 일주일만 더 와라."
"하하하. 가시죠. 오늘은 제가 예약해 둔 곳이 있어요."
벌써 6일째다. 스케줄을 제외하고 투자한 시간이 말이다.
"……또 뭘 부탁하려고?"
역시 직업이 직업이라서 그런지 눈치가 무척이나 빨랐다.
"맛있게 드신 후에 그때 부탁드리겠습니다."
'4차 해금 조건. 사건 현장 한번 살피기.'
그것으로 그의 모든 재능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하나의 스킬로 변모하며 재능은 한층 더 성장한다. 그리고 결국 세계적인 명탐정이된다.
"메뉴가 뭔데?"
"일식요."
"아, 큰 거네. 정말 뭐야?"
"다 드시면 알려 드린다니까요."
진호는 의뭉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