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3권 25화
[배우 이진호, 복근을 공개하다.]
[순수남 이진호의 반전 매력.]
[리얼정가 이진호가 출연하는 작품은?]
아침부터 인터넷이 시끄럽다. 아무리 '리얼, 정글에 가다'지만, 인지도가 부족한지라 작은 이슈만 되어도 감사한데 빨래판 복근이 실시간으로 공개되면서 인터넷이란 기름에 불을 질러 버렸다. 팬들이 모두 재준의 방송에 모이 면서 플랫폼의 신기록을 달성해서 더 이슈가 된 것도 있었다.
"안 가면 안 될까요?"
-건투를 법니다.
전화가 끊기자 진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첫 화부터 신이 있는 진호는 아침 일찍 촬영장으로 향했지만, 차를 나서기가 무서웠다.
스킬을 얻음으로써 몇 배는 더 탄력적으로 변한 근육이 자신감을 상승시켰지만 이건 다른 문제였다. 앞을 보자 정 대리가 보이지 않았다.
배우들에게 커피를 드리러 간 것이었다.
"하아. 가자, 가."
촬영장은 야외에 따로 지어져 있었다.
아직 언론에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드라마 역사상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제작비가 투입된 작품이라서 아예 세트장을 지었다고 했다.
그래서 5화까지 사전 제작을 한다고 했다.
원래는 반절을 사전 제작을 하려고 했지만, 방송국에 사정이 있다는 것 같았다.
처음 와 보는 사극 세트장은 출연하는 배우가 아니라 관광객이 되게 하기에 충분했다.
'여기도 촬영 다 끝나면 관광 명소가 되려나?'
"왔어? 크크큭. 어제 잘 봤어."
"푸하하핫! 역시 배우! 표정이 풍부해!"
"아니, 거기서도 순둥순둥하면 어떡해?"
"이야, 덕분에 우리 드라마가 방영하기도 전에 주목받았네?"
얼굴이 절로 달아올랐다.
어젯밤 '리얼 정글에 가다. 극한 생존 편' 첫 화의 마지막은 진호가 해변에 앉아 넋을 놓는 장면이었다.
흑역사가 만들어졌다.
"그거 저 아닙니다!"
웃음이 터졌다.
진호는 도망치듯 대기실 천막으로 향했다.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대기실에서도 웃음이 쏟아졌다.
꾹 참은 진호는 분장을 받으며 무이를 떠올렸다.
'음?'
대기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눈을 떠 고개를 돌린 진호는 깜짝 놀랐다.
'저분은?'
두 달 반전 사무실에 왔던 그 중년 여성이 다른 배우들에게 인사를 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들도 벌떡 일어났다.
진호를 발견한 최은수가 옅게 웃으며 다가왔다.
"무이는 다 이해했니? 사파리 투어도 갔다며?"
갇혀 있지만, 그 본질은 맹수다. 어슬렁 걷는 그 모습조차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무이는 짐승이니 말이다.
이 외에도 여러 배우들의 연기를 참고했고, 퇴역한 특수부대원을 만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진호는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는 이해했습니다, 작가님."
"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던 최은수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내 사진 봤구나?"
"네. 정말 감사합니다."
리딩 때마다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참석을 못했지만, 내심 놀라기를 바랐던 최은수로서는 약간 허탈해졌다.
그래도 리딩 모습을 찍은 카메라로 그들의 연기는 모두 검토했다. 그녀는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그래, 기대할게."
[스킬 : 연신연왕]은 이미 설정집을 통해 무이를 탄생시켰고, 그간의 노력은 무이를 더 완벽하게 만들었다.
[스킬 : 사상 최강의 제자]는 그런 무이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 맹수처럼 압도적인, 거친 살기를 표현하기에는 미흡하지만, 이는 차차 나아질 터였다. 그녀의 눈빛이 무섭지만, 믿음을 흔들기에는 부족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피식 웃으며 몸을 돌린 그녀는 다른 배우에게 다가갔고, 나이 든 배우들이 눈을 빛냈다. 최은수 작가가 아무나에게 이런 말을 던지지 않는 걸 알기 때문이다.
'리딩 때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나?'
'하긴 리딩이 전부를 보여 주지 못하긴 하지.'
나이 든 배우들은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최은수 작가가 나간 것을 확인한 진호는 분장을 마저 받았다.
이윽고 주연 배우들이 도착하면서 촬영이 시작되었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다 보니 날은 점점 저물어 갔다.
그렇게 날이 어두워질수록 심장이 쿵광쿵광 뛰었다.
이제 곧 첫 등장 신이다.
최종 점검도 끝냈으니 더 이상 걱정은 없다.
차가운 검 손잡이를 잡으니 머리가 식었다.
진호는 눈을 감았다.
'이름이 없으니, 정도 없다.'
그래서 무이다.
이름이 있었으나 빼앗겼고, 주워졌으나 정을 버리라 강요받았다. 누군가를 죽이는 것만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수단.
울컥울컥 살의가 차오르자 심장은 더 거세게 뛰었다.
"누구냐!"
드디어 기다린 대상이 나타났다.
"백윤 대감이시오?"
감겼던 눈이 떠진 순간 사람들은 헛숨을 삼켰다.
그건 분명 사람이 아닌 짐승의 눈이었다.
* * *
검이 휘둘러진다.
지나는 사람 없고 주위 집들 모두 불이 꺼져 어두운 길, 사납게 할퀴는 검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갔다. 검은 달빛에 부서지고, 피는 흩날리는 꽃잎이 되었다.
"으악!"
"아악!"
촤악!
얼굴에 피가 된다.
대신 마지막 숨소리가 사라졌다. 피비린내 나는 거리에는 적막만 가득할 뿐이었다.
귀를 기울였지만, 목격자는 없었다.
스르릉, 탁.
임무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완수되었다.
내려 비추는 달빛 사이로 아찔한 미소를 피워 낸 무이는 검은색 죽립을 고쳐 쓰며 몸을 돌렸다.
조용하다.
누구 한 명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누군가는 방금 자신이 본 게 환상은 아닌지 눈을 비비기도 했다. 분명 잔혹한 살인 장면인데, 진호의 요염한 미소를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침나절 놀림을 피해 도망치던 진호의 모습은 단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잔재주가 아니라 실전에서 얼마나 잘하나 지켜보기 위해 찾았던 나이 든 배우들마저 마른침을 삼켰다.
피가 된 하얀 얼굴에 새빨간 입술.
진호의 무이는 위험했다.
"오케이, 컷!"
"후아!"
"후우."
참았던 숨들이 터졌다.
바닥에 누워 있던 단역 및 스턴트 배우들도 몸을 일으켰다.
"워,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아니 검이 왜 그렇게 살벌해? 타이밍 놓칠 뻔했어."
그들의 너스레가 집중을 깼다. 하지만 진호의 표정은 무슨 일인 지 펴지지 않았다.
몸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였다. 그건 굉장한 쾌감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들어.'
몸을 더 움직일 수 있었는데, 와이어가 잡아당겼다.
그 때문에 몰입이 몇 번 끊길 뻔 했다.
실제로 순간 몸을 가누지 못해 NG도 났다.
그래서 무심코 검을 더 사납게 휘둘렀다.
리허설에서 휘두르는 검과 무이가 돼서 휘두르는 검은 너무도 큰 차이를 보였다.
스킬의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일 수 있었다.
'와이어 없이가 보자고 할까?'
5미터를 날아가는, 첫 검을 휘두르는 걸 제외하곤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봤어. 연구 많이 했네."
아침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킨 최은수 작가가 다가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은 것 같아 굉장히 뿌듯했다.
움직임은 움직임이고, 캐릭터는 캐릭터다.
"감사합니다!"
"방심하지 말고 잘해. 앞으로 계속 지켜볼 거야."
톡 어깨를 치는 손길엔 따스함이 서려 있었다.
연기를 못하는 사람에겐 가차 없지만, 연기를 잘하는 사람에겐 그렇게 따뜻할 수 없는 작가가 최은수라는 말이 떠올랐다.
"옙!"
"나 가요. 갑니다. 영화도 아닌데, 작가는 이만 퇴장해야지. 아주 가끔씩만 들를게요."
"안녕히 가십시오!"
최은수 작가가 사라지자 진호는 모니터 앞에 앉은 PD에게 갔다. 모니터에선 방금 전 연기가 재생 되고 있었다.
진호는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음."
'역시.'
몇몇 움직임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모두 와이어가 방해했던 움직임이다.
"왜, 문제 있어? 굉장히 좋은데? 아주 좋아. 정말 한 작품만 한 거 맞아?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슈도 만들어 주고 말이야."
PD는 만족스러워하지만,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생에 첫 서브 같은 조연인데. 스킬도 얻었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테니스 만화 속 캐릭터들의 말도 안 되는 몸놀림을 그대로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더 빠르고 강하게 검을 휘두를 수 있지만, 그건 상대 배우들 때문에 참기로 했다.
진호는 한번 물어보자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와이어 없이해 봐도 될까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
사람들이 멍하니 진호를 보았다.
연출진과 배우들은 다시 멍해졌다.
"허 참, 이게……."
경악과 불신, 환희. 그 세 개의 감정이 모니터를 확인하는 PD의 눈동자에서 휘몰아친다.
그러나 진호는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되네. 좋았어.'
씩 웃은 진호는 몸을 돌렸다.
다음 촬영 준비를 위해 분장을 다듬어야 했다.
그런 그를 빤히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칫."
* * *
때는 인간이 만든 혼란과 탐욕으로 가득한 고려 말.
북방의 이성계가 조정에 들어올 때, 권력가들 사이로 한 가지 예언이 떠돈다.
천 년을 산 여우의 구슬을 얻는자, 나라를 얻으리.
남의 것을 하나라도 더 빼앗기 위해 안달이던 권력가들의 눈이 뒤집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 때부터 여우의 구슬을 얻기 위한 암중투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신부를 얻으러 나온 구미호로서는 횡액인 이야기지."
구미호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어이없는 일은 없었다.
이 작품은 고려의 몰락과 조선의 건국이라는 격동기에 여우 구슬이라는 판타지 같은 설정을 집어넣은 퓨전 사극이다.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구미호 한 명만이 주인공이 아니다.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이 극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일반적인 퓨전 사극이 아니란 소리다.
"아 씨! 또 분장 잘 먹혀! 너 어제 푹 잤지!"
촬영장 대기실, 배우들의 분장을 담당하는 실장이 화를 낸다.
진호는 순순히 실토했다.
"네. 3시간."
"이거 어쩔 거야!"
거울을 본 진호는 입맛을 다셨다.
긴 붙임 머리 미녀 한 명이 그 속에 있었다.
여자처럼 보이는 건 상관없지만, 여자면 곤란했다. 이런 난이도 때문에 실장이 담당하는 것이었다.
"피부를 사포로 갈아 버릴 수도 없고!"
"참아주세요! 아픔니다!"
결국 땀 좀 흘리고 오라며 쫓겨 났다.
촬영장 외곽으로 향하던 진호에게 김홍근 무술감독이 다가왔다.
"진호 씨, 지금 시간 돼요?"
"네. 괜찮습니다."
"그럼 합 좀 다시 짭시다."
"예?"
지난 두 달여간 맞춘 합이다. 최대한 화려하고 현란하게.
여기서 무언가가 추가되거나 빠지는 건 상관없다.
그러나 다시 짠다는 것은 자칫 사고를 동반할 수 있는 위험한 행위였다.
하지만 김홍근의 표정은 진지했다.
어제 무이가 된 진호의 첫 액션연기를 본 그는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와이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은 액션임에도 화려하고 현란하며 강인했다. 아니, 와이어를 벗는 순간 진호는 날개 달린 짐승이 되어 자유롭게 날뛰었다.
오히려 정교하게 맞춘 합이 맹수를 가둔 우리가 된 느낌이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한 그의 눈빛에 진호도 낯빛을 굳혔다. 그렇게 그를 따라가니, 스턴트 배우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모두 무슨 일인지 보호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진호에게도 보호구가 채워졌다.
"감독도 허락한 일이니까 한번 무이가 되어서 휘둘러 봐요."
진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합 없이요?"
"합 없이. 상황은 적 무사들을 말살하는 무이."
손에 들린 스펀지 봉이 무겁게 느껴졌다.
맞아도 안전하다지만,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걱정 마. 설마 우리가 다치겠어?"
"그래, 마음껏 들어와 봐. 이 형 종합 9단이다?"
대체 무슨 일인지 그들의 눈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배우가 스턴트를 봐주는 게 말이 돼?'
라는 김홍근의 질타에 울컥한 것을 모르는 진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쁜 일이 아니야.'
절대 아니다. 더 돋보일 수 있다.
서브 같은 주조연 역할을 맡게 되니 서브가 욕심났다.
'서브, 주연 다 해 봐야지.'
진호는 눈을 감으며 무이를 꺼내 들었다.
그 순간.
'위험해!'
이를 악문 김홍근이 눈짓을 주자 침을 삼킨 스턴트 배우들이 진호를 포위하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공간을 거친 살의로 지배한 진호의 눈이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