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3권 23화
8. 위험한 남자
파리에서 스케줄은 피에트로 CEO와 팀 존스를 만나게 되면서 좀 길어지게 되었다.
팀 존스는 변한 진호를 보더니 충격 받은 얼굴로 절대 어디 가지 말라는 말을 남기며 디자인실로 달려갔고, 피에트로는 그보다 환할 수 없는 미소로 저녁 식사에 초대 했다.
이후 팀 존스를 기다리며 파리 관광을 하느라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그사이 모든 촬영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여정호 PD는 공항을 나서자마자 누군가에게 동영상과 사진을 보냈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곧바로 핸드폰이 울렸다.
"예, 여보세요."
-얘 누구야.
다짜고짜 묻는 말에 여정호 PD는 씩 웃었다.
"내가 고정으로 만들려는 애. 마음에 들어? 누나 이런 애 찾았잖아. 여자처럼 섹시하면서도 남자답게 사나운."
-그걸 말이라고! 후우. 그래서 나로 하여금 걔에게 은혜를 입히시겠다?
"어쩌겠어. PD라서 그런지 생각 나는 게 이런 방법뿐인데. 싫으면 마세요. 누나 아니어도 추천할 사람 많아요. 아니, 내가 이번에 찍은 편이 송출되면 섭외가 폭주할 걸? 이번 편 완전 대박이야."
예능 PD라지만, 드라마 영화 작가를 모르는 건 아니다. 다 알음알음 알게 되는 게 이 바닥이다.
그는 지금 자신과 친한 최고의 드라마 작가에게 진호를 추천한 것이다.
-알겠으니까 닥치고 이름이나 말 해.
"이진호. 페이탈북에 계정 있으니까 살펴보시고. 그 사진은 거기서 퍼 온 거니까."
-알았어.
뚝 전화가 끊겼다. 여정호는 옅게 웃었다.
"이번 편 방영되면 진호 엄청 바빠지겠지?"
"당연하죠."
"그 전에 정문 형이나 유빈이가 말하고 다닐걸요?"
"그렇지. 그러다 제대로 된 작품 하나 찍으면 더 바빠질 테고."
주위 스태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방법 쓴 게 맞네."
"최고십니다. 존경합니다."
"다다음 편 확실히 짜 놔. 그 미튜브 야생 생존남에 대해 상세하게 살피고. 여건 되면 그 사람하고 미팅도 잡아."
고정은 못 시키더라도 6개월 후 촬영할 다다음 편엔 진호가 무조건 필요했다.
"예!"
"가자, 일단 푹 쉬자."
"수고하셨습니다!"
함박웃음을 지은 스태프들은 대기하고 있는 방송국 차량에 올랐다.
* * *
파리에서 돌아온 진호는 쉬지 못했다.
한국내 스케줄도 있지만, 오픈한 미튜브 채널에 새로 운영상도 업데이트해야 했기 때문이다.
띠리링!
대여한 녹음 부스가 조용하다.
-오케이. 나와도 돼.
"넵."
부스 안에 설치된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오니 엔지니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요, 형?"
"너 정글 가서 산삼이라도 캐 먹었냐?"
"아, 음이 좀 깊어지긴 했죠?"
스킬 때문도 있지만, 자연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심상이 깊어졌다. [스킬 : 나는야, 자연의 왕자]는 여러 스킬에 영향을 주어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냥 깊어진 수준이 아니잖아, 인마! 이건 못해도 300만 각이야!"
"에이, 또 오버하신다. 원래 명곡인 노래가 이번에 느낀 점과 잘 맞아떨어진 것뿐이에요."
이번에 녹음한 곡은 사이먼&가 펑클의 엘 콘도르 파사 기타 커버 곡이다.
이번 녹음은 진호 자신이 생각해도 역대 최고였다.
진호는 콧노래를 부르며 미튜브에 접속했다.
"아싸. 50만 돌파. 50만 명만 더 구독하면 골드 버튼이다."
벌써 5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구독 버튼을 눌러 주었다.
주마다 각기 한 편씩 기타 커버 곡과 조리 강습 영상을 올린 덕이다.
기타 커버곡 댓글은 향수를 떠올리는 삼사, 오십 대 남성이 여성에 비해 7 대 3 비율로 많고, 조리 강습 영상은 10대부터 40대까지 여성이 압도적이었다.
사람은 역시 잘생기고 봐야 했다. 미튜브 광고 수익이 굉장히 두둑 했다.
진호는 재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님아. 미튜부 구독자 수 몇 명?"
-꺼져.
뚝!
"크크크크크!"
인터넷 방송은 재준이 먼저 데뷔 했지만, 지금 인기는 진호 자신이 많았다.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자, 여기."
"옙!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USB를 들고 나오니 차에선 정 대리가 눈을 감고 있었다.
"가요, 정 대리님."
"회사?"
"네."
차는 출발했다.
오늘도 고생하는 직원들을 위해 유명 빵집에서 마카롱과 쿠키를 사서 회사에 도착하니 직원들이 열렬히 반겨 주었다.
진호는 USB를 마케팅 실장에게 넘겨주었다.
"그럼 들어가서 대본 검토하고 있을게요."
"아, 진호 씨. 이거 받아요. 최은수 작가님 거예요."
진호의 눈이 흔들렸다.
최은수. 연기자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다.
"최대한 빨리 읽어 주고 답해 주세요. 배송 사고인지 원래는 열흘 전에 와야 했던 거예요. 진호 씨가 다 읽으면 우리도 그때 검토할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잰걸음으로 연습실에 들어가니 한구석에 놓인 소파 앞 테이블엔 대본이 쌓여 있었다.
'리얼, 정글에 가다'를 찍은 이후 대본이 쏟아지고 있었다.
첫 화 방송이 시작되려면 아직도 두 달은 남았는데 말이다.
'진짜 누나 형님들한테 밥 사야겠네. 스태프들도.'
대본을 보내는 사람마다 그분들이 칭찬을 해서 보내는 거라고 했다.
진호는 최은수 작가의 대본을 옆에 내려놓았다.
"뭐, 이것도 단역 같은 조연이겠지."
그녀 못지않은 명성을 가진 작가 들이 보낸 작품도 쌓여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배역은 모두 단역 같은 조연이었다.
어느 드라마 어디서나 볼 법한 흔한 배역들.
대작가의 작품에 출연하는 건 분명 영광된 일이고 이슈도 받을 테지만 조금 더 색감 있는 역할을 해 보고 싶었다.
'재미없어.'
고개를 저은 진호는 가장 위에 놓인 대본을 들어 펼쳤다.
하지만 얼마 읽지 못하고 덮어야 했다.
"……후우."
왜인지 계속 최은수 작가의 대본에 눈길이 갔다.
구미호 도령이라는 유치한 제목임에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쯧. 조금만 읽어 보자. 빨리 읽어 보라고 했으니까."
들어 펼치니 역시나 표시된 역할은 조연이었다.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기대감을 버린 진호는 소파에 등을 묻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잠시였다.
스륵. 스륵! 촤락. 촤락!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등을 편 진호는 대본에 파묻힐 듯 고개를 숙였다.
* * *
탁!
팬이 놓이는 소리가 사무실 같은 공간을 울린다.
마른 몸매에 신경질적인 인상의 장년 여성이 고개를 들자 사무실 안에 있는 이들이 모두 고개를 숙인다.
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이진호. 아직 연락 없어? 못해도 열흘 전에는 받았지 않아? 송달 사고 난 거야? 아님…….나 까인 거야?"
사람들이 헛숨을 삼켰다.
한 남성이 급히 고개를 들었다.
"여, 연락해 볼까요?"
"어디다?"
"태, 택배 회사에……."
"머리가 나쁘면 눈치라도 있어라, 좀! 글만 잘 쓰면 뭐 해!"
"죄, 죄송합니다!"
"어휴. 내가 앓느니 죽지."
한숨을 내뱉던 최은수 작가는 서늘한 사무실 분위기에 머리를 긁었다. 또 애먼 사람에게 짜증을 부리고 말았다.
작품을 시작하면 이게 문제였다.
"나 나갔다 올게. 그동안 나 씹고있어."
"다, 다녀오십시오!"
"안 씹는다는 말은 안 하지."
콧방귀를 뀐 그녀는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빠져나온 그녀는 도로 앞에 섰다.
곧 검은색 벤 한 대가 앞에 정차하며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스르륵! 탁!
"어디로 모실까요?"
"아무 데나. 머리 식힐 거야."
"양평으로 출발하겠습니다."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도 차가 부드립게 출발했다.
최은수는 창밖을 바라보며 엄지를 깨물었다. 일이 풀리지 않거나 스트레스가 쌓일 때 나타나는 그녀의 버릇이다.
"아 씨. 진짜 짜증 나네. 나 정말 까인 거야, 뭐야? 내가 자기를 위해 어? 표시도 해 놓고 어?"
분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팔걸이를 내려쳤다.
'설마 다른 작가 작품을?'
울컥 조바심이 들었다.
"차 돌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갈까요?"
"이진호 사무실 알지? 거기로 가."
"예."
U턴을 한 차는 빠르게 달려 진호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 도착 했다.
"나 마시는 커피 사 와."
차에서 내린 최은수는 쿵쿵거리며 계단을 올라 문을 거칠게 열었다. 갑자기 열리는 문에 시선을 돌린 직원들이 경악하며 일어났다.
"서, 선생님!"
"이직했나 봐, 장 실장. 자기네 배우 어디 있어?"
"아니, 그게……."
"응, 그래. 저기 연습실이라고 적혀 있네. 저기 있지?"
"서, 선생님!"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문을 벌컥 연 그녀는 순간 굳어 버렸다.
후욱!
'흡!'
순간 숨이 답답해지고 심장이 서 늘해졌다.
살기다. 수많은 배역을 거친 연기자만이 표현할 수 있는 살기. 짐승처럼 사납고 거친 살기가 공간 안에 가득하다.
"백윤인가?"
한데 목소리는 소름 끼칠 만큼 차갑고도 나른하다.
뱀. 그래, 뱀이다.
"그럼 됐다."
머리 위로 올려 모인 양손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연습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것도 잠시였다. 깨어난 진호가 미간을 좁혔다.
"……끙. 어렵네."
살기는 리셋 라이프 때문에가 본 사파리투어에서 암컷을 두고 싸우던 사자를 흉내 낸 것에 불과하고, 목소리는 정글북의 보아 뱀을 따라 한 것뿐이다.
정보가 적다. 이런 간락적인 설명으로는 깊은 몰입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매력적이다. 캐릭터가 너무 좋다.
계속 눈길이 간 이유가 있었다. 방금 전 연기한 냉혹한 살수의 모습만이 전부가 아니다. 다채로운 감정선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중요성도 일반 조연인 줄 알았는데, 서브 같은 주조연이었다.
아니, 단역 같은 조연이라도 이건 하고 싶었다.
얼른 제대로 된 대본을 받아 보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주인공이 욕심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자. 해야 돼."
홍분해 몸을 돌렸던 진호는 문가에서 있는 최은수를 보곤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갑자기 흑역사가 만들어진 기분이었다.
진호는 작가 이름은 알지만 아직 얼굴은 몰랐다.
"크흠. 손님이시군요. 안녕하세요. 이진호입니다."
"……."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최은수를 지나친 진호는 그녀 옆에 있는 장경아 실장을 발견하곤 대본을 내밀었다.
"실장님. 저 이거 하고 싶어요."
"……네?"
"이 작품, 아니 이 배역하게 해 주세요."
무슨 일인지 장경아 실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의아함이 들 때, 최은수가 입을 열었다.
"그거 최은수 작가 작품이네."
"아, 네."
"하고 싶은 역할이 있나 봐?"
"예, 무이라고…… 그런데 누구신지."
"왜? 왜 끌리는데?"
"누가 봐도 매력적이니까요. 그런데 정말 누구세요?"
"그렇지? 알았어. 나중에 봐. 장 실장, 나 가."
히죽 웃은 최은수는 몸을 돌려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진호는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잘하셨습니다."
"네?"
마치 시험에서 백 점을 받아 온아들을 보는 듯한 눈빛이다.
"그럼 차기작은 그 작품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어, 검토부터 하셔야죠."
"물론 검토를 할 테지만, 진호 씨의 안목을 믿습니다."
뭔가 이상해 둘러보니 직원들 모두 엄지를 치켜들고 있었다.
'……뭐지?'
건물을 나선 최은수는 환하게 웃었다.
캐릭터가 칭찬 받았다.
작가에게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었다.
거기다, 그렇게 정말 가식 없이 천진난만한 눈망울로 하고 싶다고 외치는 모습은 괜스레 얼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래, 스케줄이 바빠서 이제야 본 거겠지."
듣기로 모델로서 굉장히 바쁘다고 했다.
"그래도 날 못 알아본 건 좀 괘씸하네. 흥."
그녀는 어떻게 골려 줄까 고민을 시작했다.
그런 최은수의 앞에 검은색 벤이 한 대 섰다.
드륵!
"작가님,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타십시오! 사무실까지 태워 드리겠습니다."
순간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굉장한 미남이었다.
그러나 최은수의 눈빛은 서늘해졌다.
"너 지금 뭐 하니? 나 미행했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우연히."
"야. 여태껏 이런 수작 부린 놈이 한둘인 줄 알아? 언제적 수법이니?"
"……구미호 꼭 하고 싶습니다, 작가님. 맡겨만 주십시오."
최은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세상 많이 좋아졌네. 얼굴만 믿는 놈 따위가 나한테 주인공 자리 달라고 협박도 할 줄 알고. 야, 내가 너희 사장 눈치나 보는 그저 그런 작가들 같아?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짓이야!"
"죄송합니다! 그래도 꼭 하고 싶습니다! 그런 아이돌 따위나 저런 모델 따위보다 잘할 자신 있습니다!"
"이게 정말!"
최은수는 뺨을 후려치려다가 이내 생각을 바꿨다.
"꼭 주인공 해야겠어? 무이는 어때? 그거라도 할래?"
움찔!
"……."
그럴 줄 알았다.
"니가 그러니까 나한테 배우 소리 못 듣는 거야. '따위'라고 말하는 아이돌보다 연기를 못하는 게 어디서…… 꺼져."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최은수는 무시했다.
남자 배우를 태운 차는 출발했고, 곧 매니저가 다가왔다.
"선생님."
"왔어? 땡큐. 가자."
"예."
그녀를 태운 차는 사무실로 출발 했다.
마지막 조각이 맞춰졌으니 신나게 집필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