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3권 22화
희미한 안개 속 어스름한 아침 햇빛을 받으며 숲 속에서 걸어나오는 진호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답고 몽환적이었다.
원주민, 아니 숲의 요정 엘프 같았다.
아침부터 예상치도 못한 인생 샷을 찍게 되었다.
한편안으로 들어온 진호는 일어나긴 했지만, 멍 때리고 있는 출연자들에게 인사를 하곤 아침 준비에 들어갔다.
보따리가 풀리며 온갖 과일과 큼직한 버섯들이 나오자 출연자들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아니, 왜 이렇게 빨리 일어났어? 일어나 보니까 없던데?"
"제가 잠이 별로 없어서요."
"…… 진짜 특이하네. 아, 덕분에 잘 잤다."
사람들이 바닥에 깐 야자섬유를 툭툭 쳤다.
야자나무 겉에 마치 엉킨 실처럼, 옥수수수염처럼 걸려있는 야자 섬유. 푹신하고 따뜻한 것도 모자라 불씨로도 쓸 수 있는 만능 사치품이었다.
진호가 고집해서 뜯어온 것들이었고, 서정문은 무조건 기억하겠다며 뚫어지게 쳐다봤었다.
"아침 메뉴는 뭐야?"
"버섯 구이와 과일요."
"도와줄까?"
"아니에요. 금방해요. 걱정 마시고 씻고 오세요."
머뭇거리던 그들은 생리 현상처리와 씻기 위해 움막을 나섰다. 거듭된 출연에 100밀리리터의 물로 세수를 할 줄 알게 된 그들이다.
한결 개운한 얼굴로 돌아온 그들은 꼬챙이에 꽂혀 익어가고 있는 버섯과 껍질마저 벗겨 낸 과일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이구, 진호가 아주 엄마네, 엄마야."
산군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엄마."
고개를 든 진호는 그의 눈에서 린 장난기에 피식 웃고는 한쪽 무릎을 세우며 허리를 폈다.
시선은 다시 버섯을 보았다.
"왜."
짧은 한마디지만, 사람들은 순간 놀랐다.
무심하면서도 짜증이 서린 높은 톤의 목소리와 몸에서 뿜어지는 기백, 자세 모두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아니, 정말 엄마가 눈앞에 있었다.
'어머?'
'얘 봐라?'
출연자들 모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콩트 시작이었다.
순간 농후한 연기에 밀렸던 산군이 모른 척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이게 뭐야. 고기 없어?"
"그래, 고기 없어? 내가 벌어다 주는 돈이 얼만데 말이야."
재밌어 보였는지 서정문도 합세 했다. 사람들은 진호를 보았다.
"……후우우."
작은 한숨 소리가 움막 안을 크게 울렸다.
움찔! 분명 콩트임에도 산군과 서정문은 심장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식과 남편이란 존재는 화난 엄마 앞에선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스윽! 진호의 고개가 들렸다.
'흡?'
"죽을래?"
피곤과 짜증이 덕지덕지 붙은 눈 가. 아침 밥상에서 반찬 투정했을 때 만날 보던 어머니의 눈빛이었다.
입이 다물어진 산군이 서정문을 툭툭 쳤다.
"아니, 그래도 내가……."
"네가 뭐?"
진호는 빈 꼬챙이를 숟가락처럼 들었다.
순간 둘은 한마디만 더 꺼냈다간 밥상이 엎어지든지 머리가 터지든지 둘 중 하나가 될 것 같은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다.
"죄송합니다!"
"미안!"
"닥치고 처먹어."
"옙!"
산군과 정문이 씩씩하게 앉는 것으로 콩트가 끝났다.
"……푸하하핫!"
"하하하하!"
진호와 출연자들, 스태프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연기가 아주 리얼하던데? 어머니셔?"
"와, 소름. 나 진짜 내 엄마가 앞에 있는 줄 알았잖아."
"아, 아뇨. 절대 아닙니다. 절대 아니에요. 무, 무슨!"
덜컥 하얗게 질린 진호가 다급히 손을 젓자 다시 웃음이 터졌다. 여정호 PD는 입이 찢어질 듯 미소를 지었다.
아침부터 엄청난 분량이 나왔다.
날것 그대로 내보내도 시청률이 빵빵 터질 것 같았다.
그만큼 진호의 순발력과 연기력, 존재감은 예술이었다.
일찍이 출연한 그 어떤 연기자도 보이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러면 정말 어떻게든 고정을 시켜야 하는데…….'
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 * *
아침을 다 먹자 사람들은 다시 길을 나섰다.
움막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만 지었기에 놔두기로 한 것이다.
진호의 진가는 저녁나절, 물이 나타나자 더 빛을 발했다.
사냥 실력이 서정문에 버금갔다. 흙탕물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물고기가 보이니 손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베테랑 멤버들만 모여 있으니, 순식간에 십수 마리의 물고기가 잡혔다. 그것도 모두 팔뚝만큼 컸다.
새우도 잡았다.
예능을 거의 버린 그들은 그만큼 무서웠다.
"으랏차!"
"오예!"
일반 생존이었다면 조미료와 물고기를 교환하는 윈-윈의 모습을 보였을 테지만, 지금은 극한 생존이다.
제작진은 팔뚝보다 실한 물고기들이 구워지고, 껍질은 냄비에서 수많은 허브, 약초, 버섯, 새우들과 익어가는 걸 보며 군침만 삼켜야 했다. 야생 고추로 매콤한 냄새마저 풍겼다.
분명 극한 생존이란 취지를 벗어나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이 이상 제한할 수 없다.
이미 문명의 이기를 모두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대로 둘 순 없다. 시청률이 빵빵 터질 모습들만 보이지만, 이 이상 편해지면 곤란했다. 한참 동안 머리를 모아 회의를 하던 그들은 기막힌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부터 옷을 보따리로 쓰는 걸 제한하겠습니다. 주머니도."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옷은 쓰게 해 준다며!"
출연자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하지만 진호는 아니었다.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던 그는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숲으로 들어가 덩굴을 많이 잘라 왔다.
여정호 PD와 스태프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그건 뭡니까, 진호 씨?"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바구니 만들려고요. 그 왜 다큐멘터리를 보면 원주민들이 큰 바구니 같은 걸 만들어서 짐을 운반 하시잖아요."
그 명칭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입을 벌렸다.
"푸크크크크! 그렇지! 역시 젊으니까 아이디어가 팍팍 나오는구나!"
"그럼 난 넓은 끈 만들게. 내가 새끼 줄 꼬는 건 또 잘하지."
"등이 찔리지 않게 쿠션도 만들어야지. 야자섬유 뜯어 올게."
"진호야, 같이 만들자. 내가 만들 줄 알아."
"아, 다행이네요. 제가 갈게요, 족장님."
미치고 팔짝 될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젠 정말로 제한시킬 게 없다.
스태프들은 망연자실 입을 다물어야 했다.
바구니는 체력이 가장 좋은 사뮤엘 강이 짊어지기로 했다.
대신 그의 옷과 가방은 나눠서 짊어졌다.
제작진은 극단적인 수를 썼다.
물을 하루 한 병으로 제한한 것이다.
그것도 4일째 되던 날에는 반병, 마지막 5일째에는 공급을 중단했다.
하지만 그것도 소용없었다.
진호와 멤버들이 숲에 들어가면 열매와 코코넛을 한가득 채집했기 때문이다.
어찌나 기가 막히게 찾는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데리고 온 현지 가이드와 정글 안내인이 오히려 그 포인트들을 따로 기록으로 남길 정도였다.
그에 진호는 오면서 보았던 더 많은 포인트들을 알려 주었고, 그들은 진호를 은인을 보듯 대우하기 시작했다.
슬그미니 자신들만 아는 약초나 열매들을 알려 주기도 했다.
영어를 할 줄 알아서 원활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극한이 아닌 것 같은 극한 생존은 5일차 늦은 오후에 끝을 맺었다.
"출구다! 들판이다─!"
"으아아아!"
"생존 완료!"
진호와 출연자들은 서로 얼싸 안고 방방 뛰었다.
비록 잘 먹고 잘 잤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는 맨몸으로의 생존을 끝낸 성취감이 남달랐던 것이다.
"진짜 덕분이다, 진호야."
"그래. 너 아니었으면 지금쯤 낙오한 사람도 있었을 거야."
집이나 도구, 음식뿐만이 아니다. 3일째 되던 날, 다시 폭우가 쏟아졌다.
진호가 미리 알아차리지 않았다면, 비교적 체력이 약한 이들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또 도마뱀이나 뱀 등 위험 요소를 먼저 발견했다.
다행히도 이 정글에는 물리거나 만지면 즉시 죽는 독사나 독 개구리 등 독을 품은 동물이나 식물은 없다.
여기에 혈청을 가진 의사들이 따르기에 안전하다지만, 한 번 물린 순간 요양이 필요해서 낙오될 수 밖에 없다.
진호란 존재가 없었더라면 최소3명은 생존 아웃됐을 것이다. 구덩이나 나무뿌리, 돌도 먼저 발견해서 위험을 거의 제거하다시피했다.
현지 코디네이터와 사전 회의를 통해 제일 안전한 길을 골랐는데도 위험한 상황이 자주 발생해서 제작진은 그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비가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들었다.
"흐흐흐. 아니에요. 모두가 힘을 합쳤기에 무사히 완주할 수 있었던 거죠."
진호는 쑥스러워 머리를 긁었고, 사람들은 그런 진호를 기껍게 보았다.
한결같아서 참 좋았다.
"이로써 2차 생존을 무사히 끝마쳤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
출연자들은 다시 환호성을 터트렸다.
"이제 여러분은 메디컬 진료 후 약간의 휴식을 취하신 뒤 마지막 생존을 하시게 될 겁니다. 그리고 사전에 말씀드린 대로 진호 씨는 더 이상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출연자들이 아쉬워하며 진호를 보았다.
진호도 잔뜩 아쉬워했다.
"죄송합니다. 스케줄이 있어서요."
"스케줄이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즐거웠어."
"같이 갔으면 좋을 텐데……."
이미 사전에 통보가 된 상태이기에 그들은 아쉬움을 감추며 진호의 몸을 토닥였다.
그 울림이 찡한 감동을 주었다. 함께해서 너무 즐거웠고, 함께해서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
"저도 감사했어요. 그래도 바로 가는 게 아니니까 저녁에 파티해요."
"당연하지!"
"맥주! 소주!"
"삼겹살! 키야아!"
분위기는 다시 밝아졌다.
이틀의 휴식 후 정문과 부족원들은 마지막 생존지로 떠났다.
어느 큰 섬에 있는 원주민 마을이라고 했다.
제작진이 주는 완주 선물이다.
정문족은 그곳에서 이틀을 보낸다.
"아오, 나도 가고 싶었는데."
이번 촬영을 위해 한 번 미뤘기에 더 미룰 수가 없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다미앙 씨. 정 대리님. 제가 그쪽으로 간다니까요."
"그럴 수 있나요."
옅게 웃은 다미앙이 진호를 살피다 깜짝 놀랐다.
아니 경악했다.
섬과 정글에 있었는데도 타기는 커녕 물광만 내는 피부 때문이 아니다.
"변하셨군요."
"그래요? 어디가요?"
다미앙은 입을 꾹 다물었다.
불과 2주 전만 해도 자유분방 천진난만 그 자체였다면, 지금은 마치 바람처럼 한계가 없이 자유롭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 당장이라도 날개를 단다면 하늘 높이 날아오를 것 같다. 그런데도 눈을 감으면 진호가 앞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듯하다.
오싹!
"성장하셨군요."
퇴보가 아니다.
쓸데없이 낭비되던 에너지가 모두 갈무리된 것이다.
진짜 톱 모델처럼 말이다. 분위기에 의해 핏도 미세하게 변했다. 더 아름답게 말이다.
'대체 얼마나 성장해야 만족을 하려는 건가.'
"그런가요? 흠."
잠시 몸을 살피던 진호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다미앙이 놀란 이유를 알 듯했지만, 모른 척했다.
"가요. 얼른 뜨거운 사우나에 몸을 푹 담그고 싶어요."
팬션 욕조에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지만, 그것과 이것은 달랐다. 사우나뿐만 아니라 얼큰한 한식도 먹고 싶었다.
"진호야, 파리나 우리 경유지에 사우나 있어?"
"어, 없어요?"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렇죠?"
환하게 밝아진 진호는 공항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