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3권 20화
"……."
배 안이 조용하다. 출연자의 컨디션을 무시하더라도 일찍 헬리 캠을 보낼 걸하며 자책하면서도 그 외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서다.
독을 먹었단 걸 이렇게 태연하게 말하는 출연자는 여태까지 처음이었다. 서정문도 숨겼으면 숨겼지, 이렇게까지 괜찮아 하지 않는다. 아니 심각하면 오히려 누구보다 빨리 말한다.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짐의 무게를 알기 때문이다.
"스무 살의 패기인 거야, 아니면 소속사의 명령인 거야? 얘 소속사가 어디라고?"
"HU 에이전시입니다."
조연출이 HU 에이전시와 진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만큼을었다.
PD와 스태프들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소속사의 명령도 아니란 소리잖아."
아무리 인기가 중요하다지만, 잘 나가는 모델에게 이런 미친 짓을 시킬 소속사는 없었다.
"허어."
여정호 PD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녹화 본을 확인해 봐야 알 테지만, 방금 전 대화만 놓고 보면 개그 캐릭터가 캐리 캐릭터가 된듯하다.
해산물을 채취하는 속도. 20분 만에 카메라 가방 절반을 채웠다. 무인도 2일차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림을 위해서라면 가방 속이 망가지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
게에 어머나! 고둥에 아싸! 그런 감탄만 하다 시간을 잡아먹는 연예인을 수두룩 보아온 여정호 PD는 진호가 그저 그런 연예인이 아님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거 재밌게 됐네."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 이진호 배우가 조금이라도 휘청거리면 바로 출발해."
"예!"
* * *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이번 생존에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아무래도 '뗏목 만들기'였다. 나무를 잘라 넝쿨을 엮어 만든다고 해도 그 부력이 체중을 버틸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런 문제를 제작진이 모를 리 없었다.
끝에는 무조건 포기 선언을 하게 만드는 게 제작진의 시나리오인가 싶었는데, 눈앞에 있는 물건들을 보자 그들의 의도가 단숨에 이해가 되었다.
마지막 4차 해금 조건인 '구황식 물 먹기'를 위해 다시 들어온 숲 안에 부표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것도 교묘하게 수풀 더미에 가려 놓았다.
카사바나 마, 칡, 야생 마늘 비슷한 거라도 찾기 위해 숲을 이 잡 듯 뒤지지 않았더라면 절대 찾지 못했을 것이다.
"어? 오! 이게 이렇게 풀리나?"
한 번 운이 풀리니, 계속 풀리는 지 부표 근처에 침넝쿨이 있었다. 한 뿌리만 캐면 몇 날 며칠을 먹을 수 있다고 캠프에서 알려 준 것이다. 칡은 그냥 나무뿌리로 보는 서양 사람의 가르침이라고는 믿을 수 없어서 기억에 남아 있던 생김새였다.
진호는 재빨리 넝쿨을 더듬어가 뿌리를 찾아 돌괭이로 캐기 시작 했다.
퍽! 퍽! 퍽!
"어라?"
땅을 조금 팠을 뿐인데 칡뿌리가 발견됐다.
돌칼로 긁어 보니 침 특유의 냄새가 확 풍겨 왔다.
"……원래 칡뿌리는 땅속 깊이 박혀 있지 않나?"
뭐가 뭐든 일단 행운이었다.
냉큼 칼을 이용해 분지른 진호는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끄득! 칡즙이 입안을 향긋하게 물들였다.
그 순간이었다.
'어?'
뭔가 달라졌다.
스킬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고개를 모로 기울인 진호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알게 되었다.
"……."
보였다. 구분이 되었다.
마치 RPG게임의 채집 퀘스트처럼 뭐가 어떤 것인지 구분이 되었다. 물론 빛이 나거나 이름표가 있는 건 아니지만, 뭐가 뭔지 확실하게 구분이 되었다.
보이지 않던 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시각장애인이 눈이 떠진 것 같은 감동이 온몸을 휘몰아쳤다. 보인다는 것은 이렇게나 행복하고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진호는 신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건 카사바. 저건 바나나. 저건 망고. 저건 도마뱀.'
오늘 오후 간식은 바나나와 카사바, 해산물 찜이 될 것 같았다.
[스킬 : 나는야, 자연의 왕자]
[위대한 탐험가 곰 형님께서 가라사대, 쉿! 저 앞에 뱀입니다. 지금부터 제 소중한 단백질 공급원이 돼 줄 놈이죠.]
* * *
샤악! 샤악!
부표를 얼기설기 엮은 펫목이 힘 찬 노질에 나아간다.
진호의 얼굴은 굉장히 밝았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 그런지 뗏목은 쑥쑥 나아갔다.
쿵! 스으으!
"수고하셨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닥터!"
배 위에 있던 스태프들이 부산스러워졌다.
독이란 건 다 나은 듯 싶어도 잠복해 있다가 나중에 터질 수 있기에 그들의 움직임은 굉장히 빨랐다.
진호는 그런 그들을 향해 등 뒤에서 옷으로 만든 보따리를 내밀었다. 만약 제작진이 옷이 든 배낭도 주었다면, 더 많이 담아 올 수 있었을 터라 좀 많이 아쉬웠다.
"1차 생존 끝낸 것 맞죠? 이것 좀 받아주세요."
"맞습니다만…… 이건 뭔가요?"
"싱싱한 재료들이 엄청 많더라고요. 그것도 100퍼센트 자연산. 그냥 나올 수 없더라고요, 흐흐흐."
몸을 멈춘 스태프들은 멍하니 진호를 보았다.
성인 몸통만한 보따리.
정말 이런 출연자는 처음이었다.
"누나! 경만이 형! 산군 형!"
배에는 김유빈, 허경만, 산군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링거를 맞기 시작한 진호는 놀랄수밖에 없었다.
'족장님이 가장 먼저 나오실 줄 알았는데.'
"어허형! 진호야!"
"억?"
"죽을 뻔했다며! 괜찮아? 살아 있어?"
"괜찮아요. 어떤 건지 몰라서 손톱만큼만 먹어서 독이 심하게 오른 건 아니에요."
"조심 좀 하지!"
"조심했으니까 이 정도로 끝난 거죠. 그러는 형은 왜 이렇게 말랐어요?"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허경만은 3일 사이에 볼과 눈이 홀쭉해져 있었다.
"……코코넛과 고둥 말고는 먹을 게 없더라."
'많던데.'
너무 많아서 뭐부터 먹어야 할지가 정말 고민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보니 산군도 볼이 홀쭉했다.
김유빈은 피부가 좋지 못했다.
"그런데 진호야, 정말 독 먹은 거 맞아?"
"산군 오빠!"
"아니, 그렇잖아! 피부가 너무 좋잖아! 피부에서 아주 광이 나네! 잘생긴 놈들은 3일 동안 고생하며 씻지 않아도 잘생긴 거냐!"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산군의 두 눈엔 짙은 안도가 서려 있었다.
"흐흐흐. 산군 형님. 저 스물한 살입니다."
"아오 씨! 얄미워!"
브이를 그린 진호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침 해 뜨자마자 오신 거예요?"
셋의 낯빛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오늘 생존 포기했어."
"뗏목은 어떻게 만들었는데, 타니까 가라앉아서. 역시 나무가 너무 얇았나."
"나도."
"어? 섬 안에 숨겨진 부표들은 찾지 못하신 거예요?"
"뭐? 그런 게 있었어?"
"네. 엄청 꽁꽁 숨겨 두셨던데…… 솔직히 3일 만에 오직 나무로만, 사람이 탈 만한 뗏목을 만든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죠."
정말 아무것도 안 먹고 뗏목만 만든다고 치면 이틀 정도 걸릴 터였다.
"정호 형-!"
후다닥 달려나가는 셋을 멍하니 보던 진호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뒤로 누웠다. 눈이 솔솔 감기는 게, 방금 먹은 약에 수면제 성분이 섞여 있는 듯싶었다.
정문 족장과 사뮤엘이 뗏목을 타고 도착함으로써 1차 생존이 완벽하게 마무리되자 출연자들은 이틀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
작은 리조트를 통째로 빌렸다.
"괜찮아?"
"너무 자서 머리 아파요."
걱정 가득했던 서정문과 여정호의 얼굴에 선한 미소가 번진다.
"수고했어. 기억해 두고 다신 안 먹으면 돼."
"다음부터는 무조건 말하셔야 합니다. 저흰 출연자의 안전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네, 그럴게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어?"
"좋은 건 다 같이 먹어야죠. 족장님도 그래서 가져오신 거잖아요."
정문 족장도 해산물을 잔뜩 잡아 왔다.
덕분에 모든 스태프가 배 터질 정도로 풍족한 해산물 파티가 벌어졌다. 진호는 해물찜을 만들려던 걸 관두고 솜씨를 부렸다. 스태프들은 고춧가루, 된장, 쌈장 온갖 식재료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 좀 더 쉬어. 그게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정말 괜찮은데.'
진호는 리조트 수영장 옆에서 술을 마시고 고기를 굽는 사람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오늘 술은 절대 엄금이었다.
괜히 속이 쓰려진 진호는 몸을 일으켜 리조트 탐방에 나섰다.
방에 들어가 푹신한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쥔 채 뒹굴고 싶었지만, 미세하고 미묘하게 답답했다. 벽돌과 시멘트와 콘크리트, 페인트 냄새가 이국의 휴양지임에도 답답하게 했다.
아무래도 스킬의 영향인 듯싶었다.
'이 스토리의 주인공은 이 스킬을 얻은 후 방랑벽이 심해지니까. 도심을 버티지 못했지.'
그 결과 위대한 탐험가라 불리고, 여행과 서바이벌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만 말이다.
그래도 심하게 거슬려 버티지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푹신한 침대에 누우면 그렇게 잠이 올 수 없었다.
리조트 산책로에 들어선 진호는 옅게 웃었다.
마치 내 방, 내 집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 * *
이틀을 쉰 다음, 그들은 다시 바닷가로 이동했다.
울창하다 못해 빼곡한 숲이 그들을 반겼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그 누구의, 그 어떤 문명 이기의 도움 없이 지도에 표시된 목적지까지 가셔야 합니다."
출연자들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길잡이가 없다.
칼도 없고, 도끼도 없고, 끈이나 방수포도 없다.
물도 한 사람당 하루 두 병.
PD를 비롯한 스태프는 방관자고, 출연진은 모든 걸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역대 최악의 도전이었다.
누구 한 명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이것들은 써도 되는 거죠?"
모두의 시선이 돌칼 등을 들고 있는 진호에게로 몰린다.
"아니, 그걸 언제 만들었어?"
그것도 생김새가 그럴듯하다. 여정호 PD도 당황했다.
"무인도에서 생존하면서 만들었는데요? 어차피 2차 생존에도 써야 할 것 같아서 제대로 만들었죠."
출연자들이 진호의 해맑은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도 만들기는 했지만, 대충 만든 거라서 놓고 왔다.
"이야, 막내가 나랑 같은 생각을 했네."
밝은 얼굴의 서정문이 주머니에서 돌칼을 꺼내 들었다.
진호의 것보다 훨씬 그럴듯해 보였다.
그는 여정호를 보았다.
"어차피 안에 들어가면 또 만들 거 그냥 허락해 주지?"
"……알겠습니다. 생존 시작은 무인도부터 니까요."
진호와 서정문이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럼 지금부터 생존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건투를 빕니다."
입을 꾹 다문 여정호 PD가 물러나자 서정문이 지도를 펼쳤다. 출연자들이 모였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 여기."
출연자들은 상의해 가며 길을 잡았다.
"진호 네 생각은 어때?"
멤버 중 가장 걱정스러운 존재는 진호였다.
정글을 처음 와 본 것도 모자라 무인도에서 독이 든 열매를 먹었기에 더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진호가 생존하는 장면을 보지 못한 그들은 그렇게 걱정했다.
지금도 그렇다.
애가 맑아도 너무 해맑았다.
진호는 힐끔 정글을 보았다.
'일단 들어가 봐야 알 테지만…….'
"네, 저는 괜찮아요."
"좋아. 사뮤엘이 진호 좀 케어해 줘."
"오케이. 걱정 마요, 형."
'안 그래도 되는데.'
"그럼 출발하자!"
가슴에 여러가지 걱정을 품은 그들은 그렇게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