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3권 19화
해변에 삼각대로 세워진 카메라 앞, 카메라가 든 가방 두 개를 끌어안은 진호는 멍하니 멀어지는 배를 응시했다.
족장 서정문과 김유빈이 해산물을 채취하고, 샤뮤엘 강이 나무를 타 코코넛과 열매들을 따오고, 허경만과 산군이 구근 식물을 가져 오면 뗄감과 집 지을 재료를 구한 진호가 요리를 한다.
출발전부터 제작진 몰래 짜 놓은 환상적인 계획이었다.
그 모든 계획이 각자 생존으로서 어그러졌다.
이제 6인은 주위 섬에서 2박 3일 동안 생존 후 정해진 시간 안에 펫목을 만들어 나와야 한다.
아무런 도구 없이, 만들어서.
왜 배 위에서 액션 캠 사용법에 대해 그렇게 가르쳤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콜록!"
진호는 카메라 가방 위에 올려진 무전기를 보았다.
힘들면 언제든 포기하라며 제작진이 주고 간 물건이다.
집어서 바위에 던진다고 해도 망가지지 않는 비싼 무전기라고 했다.
위이이이잉!
하늘엔 핼리 캠 한 대가 떠 있었다.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적당한 높이에서 이 해변 전체를 찍는 것이라고 했다.
이 외에 아무것도 없다. 스태프는 커녕, 물도 없다.
족장과 부족원이 말하길 물은 죽지 않을 정도지만, 그래도 준다고 했는데 말이다.
스태프들이 탄 배가 저 멀리에 큰 점처럼 보인다.
하얗게 물든 머릿속에서 이미 사전에 철저하게 검토한 섬이라는 PD의 말이 떠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꽤 큰 섬이었다.
"어……."
'뭐부터 해야 하지?'
막막했다.
생존 캠프에선 조난을 당하면 일단 물부터 구하라고 했다.
그래서 액션 캠이 달린 헬멧을 쓰고 숲으로 들어온 진호는 10분 간 돌아다닌 결과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큰일 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구분이 가질 않는다.
분명 캠프에선 사진으로, 영상으로, 직접 보기까지 했는데 숲에 들어오니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리얼, 정글에 가다'에선 너무 흔하게 보이던 라임도, 바나나도, 하물며 카사바도 보이지 않았다.
죄다 그냥 풀이고, 그냥 나무다.
'어떡하지?'
"……일단 도구부터 만들까?"
무심결에 내뱉었지만, 진호는 유레카를 외칠 뻔했다.
집을 만들 나무와 풀을 쉽게 베려면 도구가 필요하다.
한두 시간의 투자가 네다섯 시간의 이득을 줄 터였다.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한 진호는 사방에 널린 돌들 가운 데 쓸만한 것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칼, 도끼, 괭이, 만들게 많았다. 그런데 큰일이 일어났다.
"나가는 방향이 어디지?"
머릿속이 다시 하얗게 물들었다.
* * *
"다들 뭐 하고 있어?"
바다 위에 떠 있는 커다란 배.
여정호 PD가 무전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첫 타자로 진호가 내렸을 때, 패닉에 빠진 사람들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진호가 내린 후 배는 혼돈 그 자체였다.
그림이 미치도록 좋게 나왔다.
"정문 족장은 섬을 둘러보러 들어갔고, 사뮤엘은 나무 타고 있고, 유빈이는 바다에 들어갔어. 산군이는에라 모르겠다 누워 있고, 경만 이도 숲에 들어갔네. 이진호 배우는…… 흠, 지금도 넋 놓고 있지. 얘가 뭘 할 줄 알겠어."
헬리 캠 모니터에 그들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까지 다 그랬다.
'리얼, 정글에 가다'를 열심히 보고 왔다고 말한 모든 연예인 중 온전히 한 사람 몫을 해낸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마저도 정문 족장과 부족원, 혹은 의지할 사람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재밌는 그림이라도 나온 것이다.
이번처럼 단어 그대로 혼자 섬에 남겨지는 것은 정문 족장도 처음 겪는 일이다. 정글은 커녕 무인도가 처음인 사람이라면, 어리바리 타다가 하루가 다 갈 것이다.
아무리 먹을 것이 넘쳐 나는 큰 섬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번 1차 생존은 각자의 생존 능력에 따라 섬의 크기가 달라지는데, 정글 초보인 진호가 제일 크고, 그다음이 허경만이다.
서정문은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는데 3분도 안 걸리는 작은 섬이다.
"아, 그림 좋네."
카메라 가방을 끌어안은 채 정신줄 놓은 진호의 표정은 압권이었다. 몇 번이고 다시 돌려 보고 싶을 정도다. 아마 계속 그런 모습이 보일 터.
이번 편에서 개그 담당은 산군이나 경만이 아니라 진호였다.
도중에 버티지 못하고 포기해도, 끝까지 생존해도 그림은 잘 나올 것이다.
"이걸 어떻게 편집하지?"
사람들은 여정호 모그에게서 한 발 물러났다.
"아, 언제든 5분 내로 도착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놔요. 아무리 철저하게 수색했다지만, 언제 다칠지 모르니까요. 20분마다 연락하시는 거 잊지 마시고. 아시겠습니까?"
"예!"
"어? 이진호 움직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헬리 캠 화면으로 향했다.
* * *
"흠."
결과물을 본 진호의 눈빛이 가라 앉았다.
'역시 스킬을 얻어야 하려나?'
어찌어찌 돌아와 만들기는 했는데 이게 돌인지, 돌칼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그래도 돌을 깨고 갈다 보니 머릿속이 많이 정리되었다.
99개의 스토리 가운데, 진행 도중이거나 시작에 조난을 당하거나 무인도에 버려지는 스토리가 몇 개 있다. 그중 현상황에 어울리는 스킬이 딱 한 가지 있다.
그 스킬의 1차 조건은 내일이면 해금이 된다.
'무인도에서 하루 동안 혼자서 생존하기.'
진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평생 얻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 했는데…….'
무인도다. 말 그대로 아무도 없는 섬이다.
조난을 당하지 않는 이상 올 일이 없는 곳이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다미앙도 절대 혼자 가는 걸 용납하지 못할 터였다.
아니, 무서워서라도 혼자 올 수 없다.
이번에도 그렇다.
무인도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다.
그래서 얻을 수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얻어야 했다. 무조건 얻을 수밖에 없다. 무인도에 혼자 남겨져서가 아니라 이대로 어찌어찌 생존해서 멧목을 만든다고 해도 2차 생존부터 난항을 겪게 될 것이다.
정문 족장과 부족원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 분명했다.
'2차 생존 목표인 정글 가로지르기는 한 곳에서 하루 이상 머무르지 않는다고 했어.'
즉 걷는 도중 먹을거리를 구해야 하고, 조리를 해야 한다. 어쩌면 조리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먹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이 프로그램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런 건 재미없지."
아무것도 못한 채 어리바리 타며 열심히 하는 모습만 보이다가 돌아가는 건 사양이었다.
제대로 재밌게 놀다가 돌아가고 싶었다.
그럼에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2차 조건 때문이다.
'독 먹고 살아남기…….'
독성의 농도는 상관없다.
진호는 주머니에 넣어 둔 화려한 색깔의 열매들을 떠올렸다.
뭐가 뭔지 구분이 가지 않는 숲 속에서 어찌나 그리 잘 보이던지. 보자마자 어떤 것인지 알 정도였다.
일단 혹시 몰라 가져왔지만, 쉽사리 손이 가질 않았다.
고정인 줄 알았는데 가끔 내려오거나 따라다니는 핼리 캠 때문에 꺼내지 않고 있는 상태다.
-칙! 진호 씨, 괜찮아요?
벌써 몇 번째라 능숙히 무전기를 든 진호가 버튼을 눌렀다.
"네, 괜찮습니다."
-지금 포기하셔도 됩니다. 여기에 고기, 김치, 라면 많아요.
악마의 유혹이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무전기를 내려놓은 진호는 다시 열매들을 보았다.
많이 섭취하지만 않으면 큰 피해는 없지만, 약간의 복통이나 마비는 각오해야 하는 열매들.
'그래, 얻자.'
"너희들은 내일."
진호는 돌칼과 돌도끼를 들고 일어났다.
일단 저녁 찬 바람을 피해야 했다.
* * *
"허우우."
진호의 눈이 퀭하다.
죽다 살아난 것까지는 아니지만, 굉장히 짜릿한 경험을 했다.
혀가 마비되고, 몸에 열이 오르는 것도 모자라 아랫배가 요동쳤다. 안 그래도 새로운 환경과 물 때문에 몸이 예민해진 상태다.
만약한 움큼씩 더 먹었다면, 계속 들이켠 코코넛 물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탈수로 몸을 가누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이…… 오전 8시네.'
해가 뜨지 않는 새벽에 일어나 먹고 바닥을 구르다 다시 잠들었다.
'이번에도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 과는 다르게가 큰 역할을 했어.'
[스킬 :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는 잠을 적게 자도 몸에 활력이 넘치게 만드는 스킬이다. 즉, 자는 동안 몸의 회복력을 극도로 활성화시키는 스킬이란 소리다.
"끄으으! 어흐. 죽다 살아났네."
방송을 위한 멘트를 친 진호는 몸을 일으켜 어젯밤 정성스럽게 만든 쉘터를 나왔다. 그래 봤자 바람도 제대로 피하지 못하는 삼각형 움막일 뿐이다.
위이잉 어젯밤 배로 복귀했던 헬리 캠이 저 멀리서 다가왔다.
-칙! 잘 잤어요?
"네. 잘 잤습니다."
-목소리가 지금도 안 좋은데요? 어젯밤에 잠을 많이 설친 거예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감기 증상 있는 거 아니죠?
아침 7시. 헬리 캠을 보내도 되냐고 제작진에서 연락이 왔고, 진호는 거의 이겨내 가는 독 기운에 보내지 말라 말했다.
누구의 도움 없이 독 기운을 이겨 내야 하기 때문이다.
리셋 라이프를 할 때도 약이나 약초를 찾아 먹었다가 다음 조건을 해금하지 못했기에 내린 조치였다.
무시하고 왔다고 해도 집안에 있어서 잘 살피지 못했을 테지만 말이다.
진호는 솔직하게 말했다.
어차피 카메라를 수거해 가서 살펴보면 알 일이니 말이다.
"아, 새벽에 일어나 배 좀 채운다는 게 독이 든 열매를 먹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상했거나. 어제 따 놨거든요."
-예?
무전기 너머로 부산해지는 소리가 들렸다.
"걱정 마세요. 뭔지 몰라 조금씩만 먹어서 지금은 멀쩡해요."
-여정호 PD입니다. 지금 가겠습니다.
"아뇨,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큰일 날 소릴! ……아니, 상관없나?'
'혼자서'라는 단어가 붙는 해금 조건은 더 이상 없다.
잠시 고민하던 진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일까지 혼자서 해 보고 싶습니다. 다른 분들도 모두 혼자서 고군분투하고 계실 텐데, 저만 도움을 받고 싶진 않습니다. 2차 생존에서 한 사람 몫을 해낼 수 있도록 여기서 제 한계를 시험하고 싶습니다. 뭐 고작 3일이니 한계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요."
-그것과 이것은 다른 이야깁니다.
"정말로 아프게 된다면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진 저 혼자서 해 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증상은 어땠습니까?
진호는 가감 없이 말했고, 무전기 너머는 다시 시끄러워졌다.
-지금은 괜찮습니까?
"말짱합니다. 지금 해산물 잔치를 열려고 준비 중입니다. 아마 조금 이따가 제거 보시면 굉장히 놀라 실 겁니다."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건투를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3차가 고둥같은 복족류, 갑각류, 어류 먹기.'
어젯밤 스킬 해금을 위해 정체가 확실한 코코넛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그런지 배가 밥을 달라고요동치고 있었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겠네."
진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류인 물고기를 잡기가 좀 힘들었지만,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카메라 가방으로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치어 한 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상의 없이 혼자 무인도에 낙오시켜 버린 제작진을 향한 작은 심술이었다.
그래서 따라온 헬리 캠에 브이도 그려 주었다.
밀물이라 들어온 큰 물고기들을 잡기 위해 야심차게 들고 간 돌칼을 묶어 만든 돌창은 결국 쓸모가 없었다.
정말 운 좋게도 '풍당풍당' 이상한 소리가 나기에 고개를 돌렸다가 둥둥 떠다니는 문어도 발견해 잡은 것이 너무도 큰 성과였다. 처음에는 그냥 갈색 천인 줄 알았는데, 잡고 나니 빨판이 팔을 휘감았다. 무척이나 소름 돋는 경험이었다.
이 정도면 '리얼, 정글에 가다' 부족원 전부가 세끼 식사도 할 수 있는 량이다.
진호는 생존 캠프에서 배운 대로 만든 나무껍질 냄비를 만들어 육수로 쓸 코코넛 물을 부었다.
그의 입가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 초장."
초장이 없다는 게 좀 아쉽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