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3권 12화
리딩은 단 한 명을 제외하면 성공적으로 끝났다.
리딩이 끝나자마자 김혜림은 도망치듯 뛰쳐나갔고, 사람들은 2차 리딩을 기약하며 흩어졌다.
시간이 흘러 10월, 사람을 잡을 듯 무더웠던 날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급격히 추워졌다.
여름다음 겨울이냐고 원성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진호는 그동안 많은 화보와 파리 패션위크에서 크리스챤 디올의 모델로 참석하는 등 제법 바쁜 스케줄을 보냈다.
"으흐흥."
빌딩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차 안, 스타일리스트 최 실장이 콧 노래를 부른다.
그동안 많은 스케줄을 소화했지만, 대부분 그쪽 스타일리스트에게 진호를 넘겨야 했던 그녀로서는 오랜만에 일을 하게 돼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서른셋이란 나이에 맞지 않게 소녀처럼 좋아하는 그녀를 보며 앞으로 많이 의지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거둔 진호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후우우."
드라마 첫 촬영이다.
긴장감 때문인지 빠르게 뛰는 심장이 손끝 발끝으로 미약한 짜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끼이익! 몸이 급격히 쏠렸다. 앞을 보니 빨간불이었다.
"야! 뭐 하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짜증이 진해졌던 진호는 하얗게 질려 있는 정 대리의 얼굴을 보곤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니, 로드 매니저만 5년간 하셨다는 정 대리님이 저보다 더 긴장 하시면 어떡해요."
"미, 미안. 이직 후 첫 촬영이라서 그런가 봐."
'그러니까 그 어디에서 긴장을 하시는데요?'
8살 많은 형임에도 귀여워 웃음이 삐죽 튀어나왔다.
"여기 초콜릿 좀 드세요. 릴텍스. 릴텍스."
"고, 고마워."
신호가 바뀌고 차가 다시 출발하자 최 실장이 슬그미니 다가왔다.
"저 곰탱이도 쓸모가 있네?"
"큭큭.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네요. 다미앙 씨가 스카우트한 이유가 있었어요. 역시 운전병 출신."
크게 말했다가는 울 수도 있기에 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윽고 도착한 촬영장은 굉장히 시끄러웠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녘임에도 그동안 찍은 예능이나 스튜디오 촬영 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의 스태프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주차장에 주차된 차량들도 으리으리 했다.
차에서 내리기 전 최 실장이 입을 열었다.
"리딩장에서는 흐지부지 넘어갔지만, 아마 오늘은 견제가 들어올 수도 있어. 다들 첫 촬영이라 신경이 예민할 테니까. 배우 스태프 모두 "
"그래서 이걸 준비한 거잖아요."
진호는 커다란 비닐 백 두 개에 가득 담긴 샌드위치를 두드렸다.
"사람은 원래 배부르면 너그러워지는 법이에요."
"하아. 내가 왜 이제야 너를 만났을까?"
"갑작스레 웬 아부?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흐흐흐. 내리죠. 정 대리님 좀 부탁할게요."
"아, 아니야. 당연히 내가 해야지!"
드르륵!
차에서 내린 진호는 가장 가까이 있는 스태프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진호입니다. 힘드시죠? 이것 좀 드시고 하세요."
깜짝 놀란 스태프는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진호는 다음 스태프를 찾았다.
"어이쿠, 고마워요. 내가 해 줄 건 없고, 조명은 제대로 때려 줄게."
"흐흐흐.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아, 도와 드릴게요."
"됐어! 그러다 몸 상하려면 어쩌려고!"
"함께 옮기면 빨리 끝낼 수 있잖아요. 그래야 빨리 찍고 빨리 퇴근 하죠."
"하핫! 그럼 거기 들래?"
"넵!"
배우만이 아니라 스태프도 앞으로 몇 달간 함께해야 할 사람들이다. 괜히 어색한 관계로 남을 필요가 없었다.
이런 진호의 행동은 새벽 찬 바람에 움츠리던 스태프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데웠다.
젊은 스태프 몇 명은 핸드폰을 꺼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PD님. 작가님."
"어이구, 빨리도 온다."
"아까부터 계속 노려봤는데 말이야."
"원래 스페셜한 건 몰래 드려야 하잖아요. 자, 여기 제가 스승님이신 두 쉐프님의 비전을 몽땅 갈아 넣은 샌드위치입니다."
진호의 요리 스승이라 하면 황재상과 박 코흐트였다.
눈이 번쩍 떠지는 말이었다.
"계란프라이와 햄이 무려 두 장 씩이에요."
"푸하하하핫! 그래, 잘 먹을게."
"나도 잘 먹을게. 이제 배우들에게가 봐."
"옙!"
대기실은 천막이었다.
진호는 그 안으로 발을 내딛다가 순간 멈췄다.
'우와.'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주연 배우 둘 모두 눈을 감은 채 스타일리스트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데, 그 몸에서 발산되는 기운이 칼처럼 날카로웠다.
구석에 있는 몇몇 조연들의 표정이 불편해 보였다.
또 그들 중 몇몇은 '이게 배우의 대기실이다!'라는 듯 가소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이 정도야, 뭐.'
인사하며 걸은 진호는 그중 김경호에게 다가가 샌드위치 포장을 벗겼다. 케첩, 마요네즈, 메이플 시럽의 향기가 대기실 안을 가득 채웠다.
"음?"
진호는 눈을 떠 이쪽을 보는 그를 향해 씩 웃었다.
"식사하셨어요?"
순간 멍해졌던 김경호가 이내 선한 미소를 지었다.
의도하긴 했지만, 그 변화의 속도가 참 사람을 놀라게 했다.
"왔어? 승준아, 막둥이 왔다."
"헉!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 했더니! 내 거는!"
"어허.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야. 씁."
기세가 훅 꺼지며 대기실 안에 훈풍이 불었다.
정말 아침을 안 먹은 것인지게 눈 감추듯 샌드위치 여덟 조각을 해치운 둘은 의자 위에 널브러졌다.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네 촬영은 오후잖아."
고사는 어제 지냈다.
"미리 촬영장 분위기도 익히고, 선배님들이 어떻게 연기하시는지도 보려고요. 지금은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마치 그 사람에게 빙의된 듯 연기를 하게 만드는 [스킬 : 연신연왕]은 아직 골격만 갖춘 기계에 불과하다.
어떤 부품을 어떻게 넣느냐에 따라 인공지능 슈퍼컴퓨터가 될 수도 있고, 경운기가 될 수도 있다.
'아, 경운기는 아닌가?'
김경호와 이승준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캬! 우리 막둥이 말 예쁘게 하는 거 봐라. 아주 데뷔 때 나 보는 것 같네."
"얌마. 너 이제 서른하나야."
"뭐가 이렇게 즐거워?"
모두가 벌떡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선생님!"
김을수였다.
"아이고, 선생님은 무슨. 부담 되니까 앉아요, 앉아."
"아버지. 식사하셨어요?"
이승준이 은근히 눈짓을 주며 김을수에게 물었다.
"식사?"
눈짓의 뜻을 알아차린 진호가 앞으로 나섰다.
"아빠. 아침밥이에요. 이 막내가 만들었습니다."
"웨야? 또 하라는 회사 일 안 하고 딴 짓 했어?"
치켜 뜬 눈에 온기가 가득했다. 촬영 시작 한참 전부터의 스탠바이. 아니 이미 이들의 일상은 이 드라마 그 자체였다.
진호는 그게 너무도 신기하면서 재밌었다.
샌드위치를 맛본 김을수는 세 조각이나 해치웠다.
"아이구. 진호가 내 자식들보다 낫다. 부모님이 행복하시겠어."
"복학하란 이야기만 빼면 뭐…… 흐흐흐."
"크크크. 하긴 나라도 한국대 타이틀은 놓치기 싫겠다. 복학할 생각은 있고?"
"나중에 시간이 생기면 고려해 볼 생각입니다."
"그래그래. 잘 생각했어."
그렇게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덧 날이 밝고, 스탠바이 사인이 들어왔다.
그 순간 대기실의 공기는 다시 날카로워졌다.
진호는 이번엔 방해하지 않았다.
몰입을 방해하는 것만큼 민폐는 없었다.
김경호의 눈에 독이 차고, 이승준의 눈빛이 차가워지고, 김을수의 얼굴에 욕심이 덕지덕지 붙을 때 배우들의 이동이 시작됐다.
그들을 따라 움직인 진호는 그들이 만드는 공간에서 물러나 눈빛을 가라앉혔다.
첫 신은 함께 움직이는 김을수, 이승준과 박 과장 김경호가 회사 로비에서 마주치는 장면이었다. 예상을 벗어난 촬영 순서.
듣기로 드라마는 들쭉날쭉한 촬영 순서가 일상이라고 했다.
"자, 시작합니다! 신넘버 19-1!"
"슬레이트 치겠습니다."
따악! 검고 하얀 막대 두 개가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후끈 차가운 공기가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저 서로 지나쳐 가는 신에 불과함에도 말이다.
그들의 눈을 본 진호는 놀라고 말았다.
그룹을 무너트리기 위해 들어온 박 과장과 재벌 2세로서 모든 사람에게 떠받들리는 삶을 살아온 자존심 센 박현호. 가로막는 모든 것을 고꾸라트린 박 회장.
그들 셋의 눈빛이 서로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흔들린다.
박 과장은 목표이기에. 박 회장과 박현호는 왠지 거슬려서.
'저게 내면 연기.'
빨리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딩장에서도 엄청났는데, 지금 그들의 연기는 리딩 때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거기다.
'호흡을 뺏기 위해 싸우고 있어.'
셋 모두 각자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내가 최고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먹만 안 들었을 뿐, 싸움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러면서도 이 장면 하나에서 박 과장 박현호, 박 회장 셋의 가치관, 그들의 생각, 그들의 과거가 몽땅 이해되었다.
시작부터가 아니라 여기서부터 봐도 될 듯했다.
진짜 연기란 이런 것인가 싶었다.
'지고 싶지 않아.'
울컥 그런 호승심이 들었다.
이왕 하는 거 재밌게. 이기는 것 만이 능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재밌으려면 이겨야 했다.
진호의 눈빛은 조금 더 깊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 활활 타올랐다.
시간은 흘렀다. 야외 촬영을 마치고, 세트장 촬영이 시작됐다.
이번 드라마를 위해 지어진 세트장은 마치 이설아 뮤직 비디오 촬영 때처럼 커다란 공간에 수많은 세트가 지어져 있었다.
진호의 첫 신 촬영이 가까워졌다.
"신호 오면 바로 들어가면 돼."
차례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가슴이 답답했다.
김경호, 이승준, 김을수, 이금화, 박혜선, 김혜림 등 이번 드라마의 주역들이 세트장 안과 밖에 모여 있다.
지금까지 아무리 잘했어도 이제 못하면 말짱 황이다.
그런 긴장감이 몸을 조금씩 달구 었다.
이제부턴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존재감을 드러내야 했다.
제법 좋은 긴장감이었다.
슬쩍 웃음이 나왔다.
"긴장하지 마. 실패하면 다시 찍으면 돼. 소주 한 병 줄까?"
샌드위치의 위력이 큰 것 같았다. 스태프가 건네는 농담에 부담감이 살짝 풀렸다.
"흐흐. 괜찮아요. 후우우."
'호흡 싸움이야. 지면 안돼.'
지는 순간 그림은 어그러진다. 오늘 주연들의 연기에 휘말려 갈피를 잃어버린 조연 단역들의 모습을 보자 깨닫게 된 진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마다 NG가 났다.
그로 인해 이겨야겠다는 생각에 힘이 더 실렸다.
"몰입 좀 할게요."
"그래, 파이팅."
'난 박강호다.'
박강호에 몰입해 가자 주위 모든 소리와 배경이 사라져 갔다.
재벌가의 어리광쟁이 철부지.
다시금 입에서 마시지도 않은 술 냄새가 났다.
진호의 눈빛이 달라지자 스태프도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신호가 들어왔다.
"지금!"
드르륵! 쾅!
초점을 흩뜨린 진호는 몸을 흔들 기울이며 입을 크게 열었다.
"다녀왔습니돠─! 아버지! 엄마! 귀염둥이 막내 왔찌요!"
우렁찬 외침이 세트장을 울렸다. 그것은 진호가 연기자로서의 데뷔를 알리는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