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3권 10화
비정한 배신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주인공을 무심히 바라본다. 그의 머릿속으로 주인공이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딱 두가지만 알면 돼. 나한테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이 뭘 필요해 하는지.
그 순간 장면이 전환되고, 주인공의 오른팔이었던 구진이 조직의 보스에게 술잔을 받는다.
-제게 이 사람이 필요했고, 이 사람이 형님의 목숨을 필요로 했습니다. 형님이 죽은 이유는 그게 전붑니다. 그러니 억울해하지 말고 가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커다란 TV 화면이 어두워진다.
"……후우우."
끝났다.
드디어 200편의 영화를 모두 보았다.
진한 만족감이 느껴지면서도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좀 달라진 게 있나?'
진호는 방금 전 본 영화의 마지막 대사를 떠올렸다.
"그러니 억울해하지 말고 가십시오……에이."
전혀 똑같지 않다. 캐릭터의 감정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역시 2차 해금까지 해야 하나 보네."
약간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서 더 기대되었다.
2차 해금은 상황이 끝난 후가 아니라 상황이 닥친 그 순간 해금되니 말이다.
쓰레기를 챙겨 밖으로 나온 진호는 오늘도 공부를 하고 있을 창식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 갔나 보네."
진호는 기다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또 오면 되니까."
지금 당장은 영화의 '영' 자도 보기 싫지만, 창식을 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올 수 있었다.
히죽 웃은 진호는 몸을 돌렸다.
"다녀왔습니다."
"누구세요? 누구신데 함부로 제 집에 들어오시는 거죠?"
어머니 나진희의 목소리가 싸늘 하다.
각오는 했지만, 심장이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진호는 신발을 벗지도 않고 무릎을 꿇었다.
"중간 중간 기별을 했음을 참작 해 주옵소서, 어마마마."
"저희 집엔 아들 없어요. 딸도 없어요. 자식 없어요."
딸이 되려고 했는데, 막혔다. 역시 어머니였다.
"너무한 거 아냐? 나 외박해도 이해한다고 해 놓고!"
"시끄러워!"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듯싶었다.
"으흐흐. 우리 여사님께서 왜 이러실까? 중간 중간 집에도 들렀잖아요. 응? 응?"
"멈추세요. 들어오면 신고합니다."
"끄응."
진호는 얼굴에서 장난기를 버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진짜 어쩔 수 없었어요. 나한테 꼭 필요한 일이었단 말이에요."
진호는 정말 진심을 담아 말했다.
"됐고, 나가. 이럴 거면 집에서 나가."
그렇게 말했으면서도 슬쩍 눈치를 보는 어머니의 모습은 참 귀여웠다.
"진짜 나가? 나 독립해?"
"야-!"
"사랑합니다!"
진호는 어이없어하는 어머니를 보며 씩 웃었다.
"어휴. 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고집이 센 건지."
"외할아버지 뒷목 잡게 한 엄마?"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와!"
진호는 재빨리 신발을 벗고 들어가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
"하지만, 애기 가졌다고 거짓말 쳐서 아빠랑."
짜아악!
"아아악!"
"시끄러워! 얼른 들어가서 씻어!"
"옙!"
재빨리 화장실로 달려가 씻고 나온 진호는 가스레인지를 모두 활용해 음식을 만드는 어머니의 옆 모습을 보며 히죽 웃었다.
"또 아들이 갈비찜 먹고 싶어 한 거는 어떻게 알고."
"네 아빠 거야. 넌 국물도 없어."
"네이."
히죽 웃은 진호는 거실 소파에 앉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예, 진호 씨. 무슨 일이십니까? 아직 레슨 시간이 되려면 멀었는데요.
"네, 다름이 아니라 이번 작품 오디션을 볼 수 있을까요?"
2차 해금 조건은 오디션을 보기다.
-……아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진호 씨는 이미 배역이 확정됐습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작은 우려라도 치우고 가는 게 좋죠. 보게 해 주세요."
스토리 [매소드의 신]의 주인공은 200편의 영화를 보면서 배우의 꿈을 키우다가 기회가 닿아 참가한 오디션에서 압도 하는 연기가 무엇 인지 보여준다.
그리고 오디션이라면 그 어떤 방식이라도 상관없었다.
[스킬 : 연신연왕]
[배우에게 하나의 영화는 하나의 그림이고, 하나의 캐릭터는 하나의 물감이다. 그 물감이 겹치지 않으니 같은 그림이라도 다른 그림이 된다.]
* * *
고풍스럽기보다는 세련된 느낌이 강한 일식집의 어느 룸.
오늘 미팅을 위해 찾은 강찬성 PD와 김숙경 작가가 약속 시간보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숙경아, 정말 개를 써야겠니? 촐싹거리게 잘생긴 애들 많잖아."
"하지만 걔만큼 잘생긴 애는 없지. 그리고 걔 어디가 촐싹거리게 생겼어? 선하게 딱 생겼지. 그나저나 캐릭터 이해 떨어지는 거 아냐?"
"연기 경력이 없잖아. 그럴 거라면 튼튼한 기획사 끼고 있는 애들이 훨씬 낫지. 협찬 끌어오기도 편하고."
"오빠, 로비 받아?"
"인마!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는 거야! 날 뭐로 보고!"
"근데 왜 그림이 좋아지는 걸 반대해?"
"기본이 없잖아! 기본이!"
"누군 날 때부터 기본 있었나. 그리고 자신이 있으니까 이렇게 미팅을 먼저 청했겠지."
"이게 그냥 미팅이냐? 여기 얼마 짜린지 몰라? 넌 작가란 애가 왜 배우 연기력을 신경 안 써!"
"내가 그런 것 같아? 정말 신경 팍팍 써 줘?"
강찬성 PD는 입을 다물었다. 작품에 애착이 강하기로 유명한 김숙경이 캐스팅에 마음먹고 간섭을 하는 순간 골치 아파지는 건 이쪽이었다.
"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곧 문이 열렸다.
입을 다물었던 둘은 안으로 들어 오는 진호를 보곤 순간 멍해졌다. 9등신은 될 법한 기럭지에 고급스런 슈트. 온갖 미남 미녀를 봐 온 그들이라도 순간 눈이 부실 만큼 빛나는 외모. 그냥 좋은 교육 받아 온 부잣집 아들이었다.
진호는 그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진호입니다!"
"치프 매니저 다미앙 토마소입니다."
"……어, 그래. 앉아요."
냉큼 자리에 앉은 진호는 둘을 빤히 바라봤다.
'와, 이분이.'
진호는 냉정한 표정의 김숙경을 보며 눈을 빛냈다.
"왜 그렇게 보죠?"
움찔! 김숙경의 눈빛이 매서웠다. 진호는 잠시 변명을 생각하다가 이내 진심을 말하기로 했다. 변명을 한들 속을 것 같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너무 신기해서 그랬습니다."
"……신기?"
"그 많은 성격의 캐릭터, 그 많은 대사를 매번 다르게 창조하시지 않습니까?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할까 싶어서…… 실례가 됐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김숙경 작가는 순간 멍해졌다. 일반인이 작가를 볼 때의 시선. 연예인들은 '어떻게 이런 대사를 써?'정도의 칭찬만 할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신인이라고 해도 작가란 당연한 존재였다.
'얘 재밌네?'
그녀는 느슨해지는 얼굴 근육을 재빨리 수습했다.
"어디까지 먹힐까도 대본이 있지 않나요?"
"아뇨. 상황만 주어질 뿐 대사 같은 건 없었습니다."
"하긴 그 현장의 성격상 통제될 수가 없었을 테죠. 그럼 음식이 나오기 전에 준비해 온 것 좀 볼까요? 아니면 일어나게."
얼굴에 꽂혀 캐스팅하긴 했지만, 진짜 아니다 싶으면 정말로 포기 할 생각이었다.
차갑고 시린 칼이 심장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이쪽에서 초청한 자리였다.
도망칠 수 없었다.
진호는 입을 열었다.
그 순간이었다.
쿵!
몸과 머리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머리가 뜨거워지고, 몸이 통제를 벗어나 움직였다.
입이 멋대로 열려 수없이 외운 대사들 읊어 냈다. 당혹스러우면서도 머릿속 한구석은 한없이 차가웠다.
'이게 재벌 2세의 생각인가?'
왜 이때 이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지금 웃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아니, 이해를 넘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게 이런 것인가 싶었다. 굉장히 기이한 경험이었다.
'난 박강호야. 당신들은 누구지?'
머리 한쪽에선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다른 쪽은 그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굉장히 기이하면서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진호는 멍해지는 두 사람의 눈을 보며 확신했다.
'2차 해금 완료.'
* * *
후들! 다미앙이 재빨리 진호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와, 이거 위험한 스킬이네.'
내 머리와 몸속에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들어온 느낌.
굉장히 이질적이면서도 굉장히 중독되는 느낌이었다.
"이래서 연기를 하는 거군요."
'마치 리셋 라이프 같아.'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 산다.
내가 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걸 내 뜻대로 한다.
그런데 핸드폰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것이 비록 대본이란 인위적 세상 속이라고 해도 중독될 수밖에 없는 재미가 있었다.
'현장은 더 재밌겠지?'
"……차에 오르시죠."
"흐흐, 옙."
'운동 열심히 해야겠다.'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건 의외로 체력을 엄청나게 소모시켰다.
"저 좀 쉴게요."
진호는 대답을 듣지 않고 눈을 감았고, 운전석에 앉은 다미앙은 그런 그를 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진호 씨는 언제나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회사에서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진호의 연기는 그저 그랬다. 몸은 소위 재벌이라 부르는 이들의 분위기를 대략적으로 따라 하고 있지만, 그 발성이나 표정은 아니었다.
연기 트레이너도 약간의 우려를 표했다.
그런데 실전이 된 순간 진호는 달라졌다.
한 번에 수천 수억을 서슴없이 긁는, 톱 모델도 마네킹이 될 뿐인 VIP 패션쇼에서 본 재벌들의 그 분위기. 그 몸짓. 그 목소리.
순간 그들이라고 오해했을 정도였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진호가 그들처럼 보인 것이다.
'대체 얼마나 많은 재능이 저 몸 안에 숨겨져 있을지…….'
기대가 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씩 웃은 다미앙은 차를 출발시켰다.
한편, 먼저 일식집을 나와 방송국으로 향하던 박찬성 PD와 김숙경 작가는 10분 만에 서로를 보았다.
"솔직히 반칙이다, 걔. 아직은 미숙한 점이 보이지만……."
"20대 미남 배우들은 다 죽었다고 봐야지."
포식자가 나타났다.
생태계를 교란시킬 압도적인 포식자였다.
아직 사냥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것 같지만, 포식자는 포식자다.
"대본 리딩에서 볼만하겠는데?"
"최소한 불만은 없어지겠지."
둘은 재밌다는 듯 입 꼬리를 비틀었다.
* * *
집안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하다. 휴일이라 늦장을 부린 나진희는 식탁에 가득 쌓여 있는 무언가를 보곤 어이없어했다.
"아들 뭐 하니?"
"뇌물 포장하는 중. 맛 좀 봐 주세요."
"뇌물?"
"이제부터 몇 달간 함께할 분들인데 점수 좀 따야지. 내가 제일 막내니까."
의아해하던 나진희는 입안에 들어온 쿠키를 깨물었다가 이내 엄지를 치켜세웠다.
"역시 우리 아들. 생각이 박혔어. 진짜 누구 아들인지."
진호는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진희 이형만 씨 아들입니다. 흐흐흐."
"그렇지! 내 아들이지! 그런데 이게 다야?"
"응. 아직은 이게 최고야. 더 고급스러운 걸 만들려고 해도 손이 못 따라와."
페이스트리나 여러 디저트를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원하는 모양이나 맛이 나오지 않았다.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다.
'파티시에 관련 스킬을 얻으면 좋아지려나.'
요리에 대한 욕심이 있다 보니 다른 요리 스킬도 얻고 싶었다.
띵동!
"아, 오셨나 보다."
진호는 곡물 쿠키와 밤 양갱을 가득 담은 커다란 비닐 백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어? 장 실장님도 함께 오셨어요?"
"여러모로 중요한 날이니까요. 그런데 그건?"
"잘 봐 달라는 뇌물요."
장경아 실장은 눈을 껌뻑였다.
"커피면 됩니다만……."
"엄청 치열하다면서요. 그럼 칼로리 소모도 많을 텐데, 이런 씹는 게 있으면 좋죠. 가요. 엄마, 갔다올게."
"그래. 가면 인사 잘하고. 책잡힐 짓 하지 말고."
"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