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3권 9화
어려서부터 과외에 학원에 1타 강사들의 인터넷 강의로 공부해 온 동기들이다. 강사의 수준쯤은 귀를 막고 들어도 파악할 수 있었다.
"끄음."
-그래도 3타 수준은 돼. 네 목소리 들으려고 귀를 여니까. 잘난 오빠 때문에 엇나간 우리 집 꼬맹이가 공부를 시작했고. 지금 주위에 그런 애들 많아. 그리고 학장님들과 교수님들도 학과 명예를 높였다고 좋아하셔.
"……그렇다면 다행이네."
굉장히 안심되었다.
"잠깐. 그런데 나보고 술을 사란 거였어?"
-그건…… 그게. 야, 야! 학교는 언제 올 거야? 사인 안 해줄 거냐?
"시간 내서 곧 갈게."
전화를 끊은 진호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다행이네."
좋은 마음으로 했지만, 혹여 안 좋은 소리를 들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진호 씨."
"아, 노를 저을 때인가요?"
장경아의 손엔 약간 두꺼운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다.
아마도 대본일 터였다.
"저희가 고르고 고른 작품으로서 내년 1월에 방영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출연진도 화려하며, 김숙경 작가님은."
"할게요."
10.2퍼센트라는 물이 들어왔다. 새로운 도전을 할 때가 되었다.
"배역이 뭔지도 안 들으시는 겁니까? 작가의 이력도?"
"실장님들과 대리님들이 모두 고민해서 고른 작품이잖아요. 그만큼 가능성이 있을 테니 어떤 스토리 건, 어떤 배역이건 해야죠."
'솔직히 대본을 봐 봤자 이해도 못하고.'
모르는 분야에서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할 생각은 없었다.
아닌 척 이쪽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이 감동했다. 그 동안 작가의 네임밸류가 떨어지거나 주연이 아니거나 출연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등의 온갖 이유로 일단 작품을까고 봤던 배우 나 아이돌들을 상대해 온 그들에게 있어서 진호는 천사였다.
'응?'
사무실의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고개를 모로 기울인 진호는 아차하며 입을 열었다.
"아, 그보다 미팅이 언제예요?"
"20일 뒤입니다. 그동안 진호 씨를 가르칠."
"휴. 다행이네요. 그럼 그동안 저는 연기 좀 배우러 갔다 올게요."
"네?"
"거기가 아니면 안 되거든요."
정식 연기 관련 스킬은 그곳에서만 얻을 수 있었다.
4. 재벌가 막내아들
대학로 건너편의 어느 골목 안 허름한 3층 건물.
꼭대기엔 '시네마천국'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저, 정말 여기입니까?"
"네, 그럼 스케줄 있을 때만 연락 해 주세요."
혼란해하는 드라이빙 매니저를 향해 싱긋 웃어 준 진호는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매니저는 이걸 보고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대체 여기에 뭐가 있는 거지?'
천사 같은 진호가 장담하는 곳이었다.
건물 외형에 속으면 안 되었다. 그는 조사해 보기로 했다.
한편 진호는 퀴퀴한 냄새가 콧속을 찔러 왔지만, 오랜만에 만날 지인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딸랑!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에의 외로 깔끔하게 진열된 온갖 언어로 된 DVD들과 공부하느라 고개 숙인 직원의 낯익은 정수리까지. 어디서나 볼 법한 DVD방이었지만, 진호에겐 감흥을 일으켰다. 똑똑!
"예, 어서 오세요……."
눈이 퀭한 20대 후반의 사내가 진호의 얼굴을 보곤 멍해졌다.
"오랜만이에요, 창식이 형."
'시험엔 여전히 합격하지 못하셨나 보네.'
"영원한 형님 배우 삼촌은 오늘 안 오셨어요?"
영원한 형님 배우, 옛 기억을 끄집어내는 키워드였다.
사내의 눈이 빛났다.
"아, 예전에 그리셋 뭐시기 게임 하신 분인가 보네요. 그때 참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왔었는데……."
진호의 눈도 향수에 물든다.
"그렇죠. 많이 왔었죠."
이번 스토리 진행에 꼭 필요한 포인트라서 한때 여기 사장님이 리셋 라이프의 주주 중 한 명이 아니냐는 소리마저 있을 정도였다. 아쉽게도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사내가 신기하다는 듯 진호를 보았다.
"그 게임을 지금도 하는 사람이 있나 보네요."
"지금은 망했어요. 삼촌은요?"
진호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사장님은 오늘 출근 안 하셨습니다. 그때 그 리스트를 틀어드리면 될까요?"
"와! 있어요?"
정말 다행이었다. 그만큼 1차 해금 조건은 까다로웠다.
"추가도 됐습니다. 그때 여러분들 때문에 사장님도 빠지셔서…… 뭐 어딘가에서 낚시하다가 실족할 경험을 하신 이후로는 그만두셨지만요."
어딘가에서 낚시.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아하하. 그럼 부탁드릴게요, 형. 이건 리스트를 다 볼 때까지 잘 부탁드린다는 뇌물."
진호는 양손에 들고 있던 봉투 중 하나를 카운터에 내려놓았고, 사내의 눈이 흔들렸다.
'옛날에 어떤 꼬맹이도 이렇게 뇌물을 주곤 했는데…….'
리셋 라이프 때문에 온 사람들 중 유일하게 먹을 것을 주기도 했고, 유일하게 중학생이라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어이쿠 뭘 이런 것까지. 1번 방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먹힐까 맞죠?"
"흐흐흐. 비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랜만에 매출을 올리는데 당연 하죠. 즐거운 시간 되세요."
씩 웃으며 1번 방으로 들어온 진호는 소파에 앉으며 봉지 안에서 에너지 바를 꺼내 껍질을 벗겼다. 아주 긴 싸움이 될 테니 영양보충은 필수였다.
'이 스킬의 1차 해금 조건은 시네마천국에서 카메오조차 배우가 단 한 명도 겹치지 않는 영화 200 편 감상하기.'
생활고에 알바 자리를 찾지만, 어린 나이 때문에 번번이 퇴짜를 맞던 중학생 주인공은 그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시네마천국의 사장님 덕분에 이곳에서 일하게 된다. 처음은 일과 공부를 다 하고 남는 자투리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그걸 사장님에게 걸리고 만다. 잘리는 건가 마음을 졸 이던 주인공에게 사장님은 이렇게 말한다.
"똑같은 배우가 나오는 작품을 봐서 뭐하게?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똑같은 발성. 똑같은 몸짓. 똑같은 연기. 재미없다."
스토리가 비슷한 건 상관없는데, 배우의 연기마저 같다면 볼 필요가 없다는 게 리셋 라이프 속 사장님의 지론이었다.
영화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새로운 영화라면 전 세계 어느 나라 것이라도 닥치고 구하는 사장님은 그때부터 매일같이 주인공에게 카메로조차 배우가 단 한 명도 겹치지 않는 영화를 던져 주었다.
이런 리셋 라이프 속 사장님의 대사에 감명 받은 건지 실제 이곳 시네마천국 사장님도 그때부터 전 세계 영화를 모으게 됐다.
한국의 독립 영화는 그때부터 있긴 했다.
덕분에 독립 영화에서부터 상업 영화까지, 한국에서 인도까지 전 세계 영화를 봐야 했다.
이미 리스트는 공유되어 있어서 이곳 시네마천국에서는 시간만 보내면 됐는데도 말이다.
어떤 영화를 얼마 동안 보았다만 기록하고, 그 시간만 보내면 되는데도 말이다. 물론 영화제목과 플레이타임 시간이 정확하지 않다면 말짱 황이었다.
"이 시네마천국을 세운 이유도 똑같았지."
배우 출신인 사장님은 연기에 미친 후배들이 싼값에 마음의 양식을 늘려 갔으면 하는 바람에 대학로 맞은편에 시네마천국을 세웠다고 했다. 그래서 이 시네마천국 사장님이 리셋 라이프 만든 회사의 주주가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던 것이다.
'여기가 망하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인지.'
망했더라면 사기 관련 스킬을 얻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사기의 기본은 연기이니 말이다.
"아, 시작한다."
앞으로 대략 보름. 정말 긴 전투가 될 터였다.
진호는 에너지 바와 함께 먹을 음료수도 꺼냈다.
* * *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창식이 벌떡 일어났다.
"오셨어요."
"오늘은 어째 씻었네?"
마른 몸매가 인상적인 50대 장년인이 뒷짐을 지며 들어왔다.
"그카지 말고 날래 집에 돌아가라. 언제까지 방황할 거네?"
"크흠. 이번에 맡은 배역이 이북 사람인가 봐요?"
"아새끼. 5년 떨어졌으믄 더 할 것도 없다야."
"그래서 7급으로 낮췄습니다. 쫓아내지 마세요. 여기처럼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다고요."
"흐하핫! 니가 이젠 정신 차리나 보다야. 기래,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지."
"쿵."
"그래서 후배들은 좀 왔네?"
"만날 하는 말이지만, 요새 누가 DVD방에 와요. 집에서 다운 받아 보지."
"하아. 원래 보물은 이렇게 둘러 보면서 찾아야 맛인데."
언제나처럼 실망한 그의 말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돈 없고 인기 없던 삼류 배우에게 시집와 고생만 했던 부인.
보다 못한 장인어른이 연기 따위 그만하고 사업이나 하라기에 고민을 하다가 이 DVD방을 차리게 됐다.
그 당시에는 DVD방이 유행이기도 했고, 후배들은 자신처럼 포기 하지 말고 꼭 잘 팔리는 배우가 됐으면 하는 소망에서였다.
그러다 어느 감독의 부름에 의해 다시 연기자 인생을 걷게 됐지만, 그 마음은 변치 않아서 수익금의 전부를 줘 가면서까지 이렇게 창식을 쓰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젠 이것도 접을 때가 된 것 같았다.
세상은 너무도 변해 버렸다.
"아, 그래도 한 명 왔어요."
"왔어?"
장년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지금 한창 어디까지 먹힐까로 인기몰이 중인 이진호라고 아시죠? 그 사람이 지금 11일째 영화만 보고 있어요. 예전 리셋 뭐시기 영화 리스트를요."
"리셋 라이프."
옛 추억을 꺼낸 장년인은 진저리를 쳤다.
"내가 그거 한답시고 한강에 빠져 죽을 뻔한 것만 생각하면!"
부르르!
"크크. 그리셋 라이프 했대요."
"……누군지 몰라도 생각 잘했네."
여태껏 리셋 라이프의 영화 리스트보다 더 훌륭한 리스트를 본 적이 없다.
거기다 그의 연기 인생을 가른 명언도 있었다.
"배우에게 하나의 영화는 하나의 그림이고."
"하나의 캐릭터는 하나의 물감이다. 그 물감이 겹치지 않으니 같은 그림이라도 다른 그림이 된다."
"그렇지."
장년인의 눈이 아련함으로 젖었다.
당시 누군가 이렇게 틀어 달라며 건네준 영화 리스트는 정말 충격이었다.
한국에서 태국까지. 독립에서 상업까지. 그를 통해 다시 연기에 대한 갈망을 얻게 됐다. 그래서 그 감독의 부름에 응했던 것이다.
"이제 곧 영화 끝날 시간인데, 만나실래요?"
"일없다. 만날 인연이면 어디선가 만나지 않갔네? 너도 붙으면 말하라. 그땐 가게 접어야디. 아새끼들 크니 돈 들어갈 곳이 많다야."
장년인의 마음 같아선 계속하고 싶지만, 세금이 나가니 어쩔 수가 없었다.
"……네. 다음 시험엔 꼭 붙을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 됐다. 일 보라."
장년인은 그렇게 나갔고, 창식은 전자담배를 입에 물었다.
벌컥! 떡 진 머리, 퀭한 눈으로 문을 열고 나온 진호는 카운터를 보며 의아해했다.
"손님이 오셨나 봐요?"
"사장님 오셨다 가셨어요."
"아……."
만날 컵라면을 사 주던 사장님의 선한 웃음이 떠오르자 조금 일찍 나오지 못한 게 아쉬웠다.
"다음 영화 틀어 드릴까요?"
"아뇨. 스케줄 가야 해서요. 한 6시간 후에 올 거예요."
"고생하시네요. 잠도 거의 안 주무시잖아요."
"형만 할까요. 형도 하루에 3시간 주무시잖아요."
진호는 그가 자기 직전 틀어 준 영화를 보고 잤다가 그가 일어나기 전에 일어났다.
시네마천국에서 자는 시간은 1시간 정도.
그나마 이동 시간이나 치장할 때 잘 수 있기 때문에 버티는 중이었다.
"그것도 이젠 2시간으로 줄이려고요. 서른 되기 전에 합격해야죠."
"이번엔 꼭 붙으실 거예요. 파이팅!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나온 진호는 약간 흥분해 있는 드라이빙 매니저를 보곤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역시 그분 때문에 이곳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셨던 거군요!"
"예?"
"에이, 다 압니다."
"뭐를요?"
"하하하, 어서 타십시오. 출발하겠습니다."
'……왜 이래?'
진호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차에 탔고, 차는 가까운 사우나를 향해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