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2권 25화
쉬는 시간이 되자 진호와 박선건, 이윤주, 김혜진, 다미앙은 1층의 카페로 향했다.
"팬클럽 생겼다며?"
"으흐흐."
팬클럽이름은 지니어스인데, 스펠링이 Genieus라 두 가지의 뜻을 지닌다. 천재를 뜻하는 지니어스와 모든 걸 할 수 있는 요정 지니& we의 목적격인 us를 합하여 우리의 지니.
"곧 날 잡아서 팬 미팅을 할 생각이에요."
"역시 사람은 잘생기고 봐야 해, 응?"
진호는 할 말이 없었다. 이윤주의 말처럼 잘생기지 않았다면 팬클럽은 커녕 다미앙과 계약도 맺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쑥스러워하며 머리를 긁는 진호를 흐뭇한 시선으로 보았다. 요새 젊은 사람답지 않게 참 착하고 성실했다.
"그런데 자기."
"네, 디자이너님."
"9월 패션 위크에 설 거지?"
"아뇨, 올해는 방송 쪽에 매진할 생각이에요."
"아쉽네."
"생각해 둔 프로그램 있니? 이 누나가 기저귀 값을 벌어야 해서 묻는 게 아니야."
사람들의 시선이 짜게 식었다.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골라서 출연할 급이 되나요."
"또 그럴래?"
"으흐흐, 일단 생각해 둔 건 몇 개 있어요."
포지션들이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이 몇 개 있었다.
"리얼 정가? 런닝맨즈?"
'리얼, 정글에 가다.'
벌써 8년째인 지상파 장수 예능 프로그램으로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 런닝맨즈는 초창기부터 함께한 멤버 일곱 명의 캐릭터가 너무 확실해서 존재감을 드러내기가 힘들다.
"제가 거기에 출연할 급이 못 돼요. 팬들도 무리수라고 등 돌릴 걸요. 가서 잘할 자신도 없고요."
"네가 어디가 어때서!"
진호는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에휴, 그럼 연기는 할 거지?"
"지금은 딱히. 일단 예능으로 인지도부터 높일 생각이에요. 화보나 홍보 포스터, 잡지 인터뷰 같은 걸로 계속 얼굴을 노출할 거고요."
"바쁘겠네. 학업과 병행할 수 있겠어?"
"당연히 못하죠. 계약 기간 동안 학업을 중단할 생각이에요."
다미앙은 깜짝 놀랐다.
"저, 정말이십니까?"
"……어, 혹시 제가 말을 안 했던가요?"
"하셨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을 겁니다."
"저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 아닌 데요."
"한국대 전체 수석 입학이잖습니까."
"……."
"……."
흔들리는 눈으로 서로를 보던 둘은 피식 웃어 버렸다.
"아무래도 서로 오해가 좀 있었던 것 같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앞으론 저도 다미앙 씨에게 다 말할게요."
"감사합니다."
공기가 훈훈해졌다.
박선건, 이윤주, 김혜진은 서로를 위하는 둘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얘라면 내 지인들에게도 소개시켜 줄 수 있겠는걸?'
마당발이라면 마당발인 이윤주와 김혜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 진호 이 누나를 도와 줄 수는 있니?"
"제가 혜진 누나를요? 어떻게요?"
"누나가 나 홀로 산다 찍을 때 가끔 불러도 될까?"
"야 이씨! 새치기하기냐!"
"그럼 언니도 고정 예능을 찍든가, 뷰티 프로그램 말고."
"……어휴! 내가 애 엄마라서 참는다, 참아!"
웃음꽃이 피었다.
"스케줄 없을 때라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약속했다! 오케이! 언니, 나 먼저 올라갈게!"
"같이 가, 이년아."
이윤주가 김혜진을 따라가자 박선건도 몸을 일으켰다.
"9월 패션 위크 끝나면 스폰 계약 맺자. 그래 줄 거지?"
"흐흐흐, 옷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옷만?"
"돈도요."
"오호호호호! 알았어. 그럼 패션 위크 끝나고 봐?"
"수고하세요!"
그렇게 박선건도 나가자 진호는 한숨을 내뱉으며 의자에 무너지듯 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펙터클한 하루였다. 이대로 침대에 파묻혀 푹 잠들고 싶었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뭐 수고랄 게 있나요."
쪼오옥, 커피를 빨아마시는 진호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다미앙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걸 한번 보시겠습니까? 진호 씨가 학업에 대한 말을 해 주지 않으셔서 빼놓았던 프로그램입니다."
"어, 또 요리 예능……. 응?"
진호는 다미앙의 핸드폰에 코를 박듯 눈을 가져갔다.
"이, 이분과 함께할 수 있다고요?"
"예,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숨이 턱 막힌 진호는 잠시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그의 눈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할게요, 하겠습니다. 꼭 하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진호와 다미앙 모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케이블 방송국인 TVM. 호랑이처럼 눈이 부리부리한 중년인이 볼 펜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흠……."
시즌 1을 대차게 말아먹은 후 다시 주어진 기회다.
출연진의 레벨이 떨어졌다면 반박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심장이 거세게 흔들릴 만큼 초조했다.
'완전히 실패한 건 아냐. 배운 게 있잖아? 너라면 잘할 거야.'
"……어후, 진짜!"
나연석 사단, 함께할 때는 참 든든했는데 이렇게 독립을 하니 숨이 막힐 만큼 부담스러운 단어였다.
그는 다시 한 번 이번에 캐스팅할 후보들의 프로필들을 살폈다. 시즌 1에서 함께한 옛 아이돌 신화창조의 김민우, 배우 허진구, 영화 음식 손님의 박강우, 연기파 아이돌 윤도준, 여배우 최보아, 도전, 셰프의 아바타로 얼굴을 알린 이진호 등, 음식 및 요리와 키워드 하나라도 관련된 모든 인물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셰프님 도착하셨습니다."
박영후 PD는 급히 일어나 출입 문을 바라보았다. 작은 키에 인자한 미소가 인상적인 장년인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세프님. 어려운 결정이셨을 텐데, 이렇게 용단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고, 용단까지야. 안녕하십니까. 황재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녹차 있을까요?"
"막내야, 여기 녹차 두 잔 좀."
"네."
둘은 의자에 앉았고, 곧 차가운 녹차가 나왔다.
"일단 세프님을 보조할 스태프는 세 명을 뽑을 생각입니다."
"세 명, 딱 좋네요."
"그중 한 명은 적절한 예능감을 보여야 하기에 개그맨을 넣을까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주문과 서빙 담당입니다."
"어이쿠,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 인걸요. 휴우,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박영후 PD도 한시름 놓았다.
"그리고 영상을 위해서 여배우를 넣을까 하는데, 셰프님 생각은 어떠신지……."
"여배우 좋죠. 화사하겠어요."
'……끄응.'
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 정말 좋은 건지 의심이 갔다.
"하하, 그리고 마지막은 정말 셰프님을 보조할 보조 요리사인데……."
'흡!'
순간 황재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여, 여기 물망에 둔 후보들입니다. 한번 살펴보십시오."
"어휴, 제가 그럴 깜냥이 되나요. PD님께서 알아서 뽑아주세요. 빠릿빠릿하고 음식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으로요."
음식을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출연을 고사하겠다는 듯 눈빛이 단호했다.
"아하하, 그래도 셰프님께서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 하고 생각해 둔 분이 계실 것 아닙니까. 앞으로 한 달 이상을 같이 해야 할 텐데 이왕 이면 호감이 있는 상대가 좋죠."
"음, 그러면 좀 살펴보겠습니다."
황재상 세프는 프로필을 한 장 한 장 신중히 넘겨 보았다. 그러다 누군가를 발견하곤 눈을 빛냈다.
"얘도 있네요?"
"음? 아, 네. 인지도는 현저히 모자라지만 평판이 제법 좋아서 끼워 넣었습니다."
그보단 외국인 매니저가 프로필을 밀어 넣기에 썩 특이해서 끼워 본 것에 불과했다. 이번에 NBS2TV 예능 메인 작가로 이동하는 골든 빅 벨의 작가 김승미가 추천한 것도 있었다.
"셰프님께서도 아십니까?"
"박 코흐트 세프하고 레이먼 최 세프에게 좀 들은 게 있죠. 전 저를 보조한다면 얘가 좋을 것 같네요."
"그 두 세프님께서 말입니까?"
박 코흐트, 레이먼 최.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서슴없이 막말을 날릴 만큼 요리에 관해선 타협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박영후 PD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꾸며진 이미지가 아니었단 말인가?'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 나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으로 해도 되고요. 저도 이 프로그램에 꽤 흥미를 가지고 있으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그들은 이후로 프로그램의 진행 방향성이라든지 이동경로 같은 것을 상의했다.
분명 어렵고 고된, 출연자 입장에서는 악독하기 그지없을 촬영일 텐데도 황재상은 오히려 열의를 보였다.
"좋네요. 그럼 그렇게 알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황재상 세프가 떠나자 박영후 PD는 진호에 관한 온갖 자료들을 끌어모았다.
짝짝짝짝짝짝짝!
침묵이 내려앉은 회의실에 불 켜진 노트북만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박영후 PD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물었다가 내려놓았다.
"허…… 앤 대체 뭐 하는 놈이지?"
웬만한 미남 배우는 명함도 못 내밀 외모를 지니고 있는데 요리도 잘하고 기타도 잘 친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다. 먹기도 복스럽게 잘 먹는다.
"윤지야, 이거 MBS에서 구했다고 했지?"
"응. 친구가 준 건데, 다음 주 나 홀로 산다 김혜진 씨 편에 3분 정도 분량으로 방영할 거래."
"……나 홀로 산다 시청률 대박 나겠네."
"이렇게 잘생겼는데, 이렇게 개념 박힌 애는 드물지."
"천연이라고?"
"경영학과 학생들 말로는 허당기도 좀 있어서 미워 하는 사람이 없대. 학창 시절에는 아싸 게임 폐인 이었지만한국대 전체 수석을 할 만큼 머리가 좋으니 괴짜 천재라고도 할 수 있고. 아니, 성격이 좋으니 괴짜라고는 할 수 없나?"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팬클럽 회원이라서."
"야."
"나만 회원인 줄 알아? 방송 쪽 작가치고 얘 팬 사이트에 회원가 입하지 않은 애들 드물 걸? 아, 메인들은 거의 없긴 해."
"허어……."
메인 밑에 있는 작가들이라도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다.
"스무 살 순수 꽃미남이잖아. 이 뭐 같은 바닥, 이런 애라도 보면서 마음 정화해야지. 안구 정화도. 어휴, 우리 진호 이렇게 이 누나랑 작품 하는구나. 진호야, 누나가 잘해 줄게에?"
"야, 나 아직한다는 소리 안 했다."
"그럼 얘 빼고 누가 있는데? 도전, 셰프의 아바타 시청률 이야기 들었지?"
들었다. 두 배 뛰었다고 했다.
"……어휴. 그래, 시청률이 깡패지."
"아싸! 회원들에게 자랑해야겠다!"
"하지 마! 엠바고 걸어!"
"……노이즈로 가자, 오빠."
"시끄러워. 넌 아는 기자들에게 연락해서 이진호나 좀 띄우라고 해. 제작 발표회에서 소란 일어나지 않게."
"그건 또 내 전문이지! 누구도 모르게 하면 되지?"
"당연하지, 인마."
신이 나서 핸드폰을 드는 작가를 보며 피식 웃은 박영후는 품에서 다미앙의 명함을 꺼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술은 나중에 얻어먹어야겠군."
"뭐? 누구에게 술을 얻어먹는다고? 이 오빠가 지금 제정신인가? 연석 오빠한테 이를까? 나가리 될래?"
"모델 쪽 로비는 다 이런다는데 어쩌라고?"
"맞아. HU 에이전시는 모델에 이전시였지. 그쪽도 참 힘든가 보네."
"세상에 잘생기고 예쁜 사람이 한둘이냐. 알았으니까 전화하려면 나가서 해. 정신 사나워."
"오케이! 수고해!"
"너도 해야 해, 인마!"
쿵!
닫힌 문을 바라보던 박영후는 진호의 프로필을 보며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부디 잘해 줘야 할 텐데……."
다행이라면 써먹을 수 있는 아이템이 많다는 것이었다.
진호는 요사이 꽤 혼란스러웠다. 누가 조작이라도 하듯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옹호적인 기사들뿐이다. 가끔 리셋 라이프에 빠져 있어 주위를 소홀히 했던 학창 시절이나 외모를 걸고넘어지기는 했지만 소수라서 묻혀 버렸다.
"정말 다미앙 씨가 아니죠?"
"제가 안다고 해도 패션 쪽 기자들입니다만……."
"그럼 누굴까요."
"글쎄요."
분명 자연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미영은 아니다. 피에트로 CEO는 나설 이유가 없다. 이윤주나 김혜진은 이미 옛적에 용의자 선상에서 제외시켰다.
"……정말 누구지?"
정말 고마운 존재라서 감사해야 하는데 알 수가 없었다. 참 답답했다.
"가실 시간입니다."
"아, 네."
진호는 모자를 눌러쓰며 일어났다.
"어휴, 미남은 나 혼자여야 하는데!"
"으흐흐. 죄송합니다, 형."
"저리 가. 키 비교되잖아. 그래, 멀찍이 떨어져."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개그맨 허경만.
"잘해 봐요, 진호 씨."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말씀 편히 하세요, 누나."
"비행기 타면 그렇게 할게요. 놀라면 안돼요?"
여배우답게 도도하게 웃는 배우 윤서아.
"진호야, 난 너만 믿고 하는 거 알지? 실수만 해 봐라, 아주 그냥."
"……끄응."
짓궂게 웃는 황재상 셰프.
그리고 이 모습을 보며 담당 PD 박영후가 의미심장하면서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모두 모자를 쓰고 있다.
진호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나연석 사단 소속의 PD 박영후.
TV를 잘 보지 않았다지만 나연석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어머니 나진희가 나연석 PD의 팬이어서 1박2일로 떠나요부터 시작해 그의 손길이 닿은 프로그램을 강제로 시청한 적이 많았다. 그런 예능계의 거인 나연석의 만든 사단이었다. 여기에 스타 세프 황재상, 유명 개그맨 허경만, 배우 윤서아, 수많은 촬영 스태프들. 어깨가 절로 무거워졌다.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
그냥 열심히만 하는 게 아니라 잘해야 했다. 그러려면 모든 역량을 동원해야 했다. 여기서 역량은 곧 스킬이었다.
진호는 지금까지 얻은 스킬들을 되새겨 보았다.
'전국 수석, 지성이면 감천이다, 내가 제일 잘나가, 우리 동네 패셔 니스타, 테니스의 황태자, 옥탑방 스타, 불을 지배하는자,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아, 테니스의 황태자와 옥탑방 스타는 필요가 없나?'
모를 일이다.
기타 관련 스킬인 [스킬: 옥탑방스타]나 테니스 스킬인 [스킬: 테니스의 황태자]가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수면 관련 스킬인 [스킬: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는 프로그램 특성상 강행군이 될 여정에 아주 큰 도움을 줄 터였다.
'지금부터 선을 긋지 말고 할 수 있을 때까지 해 보자. 중국까지 가는데 그냥 돌아올 순 없어.'
진호는 중국행 티켓이 꽂힌 여권을 꾸욱 쥐며 출국 게이트를 향해 발을 크게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