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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49화 (49/424)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2권 24화

진호가 등장하자 촬영장이 잠시 술렁였다. 나 홀로 산다의 제작진도 바빠졌다.

"안녕하십니까! 이진호입니다!"

팔을 푼 박선건이 앞에서며 활짝 웃었다.

"합격! 윤주야, 쟤들 다 돌려보내. 더 이상 볼 거 없겠다."

촬영장이 싸늘해졌다. 모델들의 표정도 나빠져서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오빠, 진정해. 걔 오빠 쇼에 세우려면 억을 줘야 해."

"지금 돈이 문제니?"

"매니저가 허락 안 할걸?"

"매니저가 누군데?"

"안녕하십니까. 현재 진호 씨를 맡고 있는 다미앙 토마소입니다."

진호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살려 주세요!'

'걱정 마십시오.'

박선건은 다미앙이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인 것에 살짝 놀랐지만, 이내 곧 다급한 눈빛을 지었다.

"매니저님, 우리 자기 얼마주면 내 쇼에 세울 수 있어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현재 진호 씨는 LVMH 그룹 외의 일은 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죄송합니다. 저를 처음 발탁해 준 게 디올이라서 앞으로 최소 2년간은 다른 패션 브랜드의 일을 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진심이고 정말이지만,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려면 이 말이 최고였다.

그러나 통하지 않았다.

"어휴, 내 디자인도 고쳐 준 사람이 왜 이렇게 말하는 것까지 예뻐?"

순간 공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윤주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오, 오빠, 지금 그게 무슨 말?"

"어휴, 기집애. 다 들어 놓고. 내가 여기 우리 자기 때문에 이번 컬렉션 디자인을 좀 고쳤잖니. 패션에 대한 센스가 아주-. 나나 내 밑에 있던 애들도 무심코 지나친 걸 잡아내는데, 어휴. 자기, 그냥 팀 존스 뮤즈 때려치우고 내 거 할래?"

촬영장이 뒤집어졌다.

박선건의 입으로 방금 전 상황을 들은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다시 한 번 확인한 PD는 전율했다.

'대박이다! 시청률 오르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다미앙도 전율했다.

'이렇게 되면 플랜을 다시 수정해야…….'

온몸에 틀어박히는 시선 때문에 울상을 지은 진호는 원망스럽다는 듯 박선건을 보았지만, 그는 천연덕스럽게 이윤주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진호 자기는 왜 데려온 거야?"

천장을 바라보며 괴상한 언어를 중얼거리던 이윤주가 고개를 흔들고는 입을 열었다.

"재, 재들한테 좀 쇼에 대해 가르쳐 주려고. 일단 맨즈 위크라지만, 하이패션 브랜드 쇼의 메인에서 봤으니까. 진호야, 매니저님, 가능할까요? PD 님, 괜찮죠?"

PD는 엄지를 치켜세웠지만 진호는 펄쩍 뛰었다.

"아뇨, 제가 어떻게!"

도망갈 기회가 사라지는 것도 있지만, 방금 전 이윤주와 김혜진의 대화 내용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지금 이윤주는 저 모델들에게 레벨 차이를 보여 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진호의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미앙 씨!"

나 홀로 산다는 지상파 방송국의 예능이다. PD가 엄지를 치켜 들며 승낙했으니 분량은 어느 정도 확보될 터.

"기회입니다, 진호 씨."

"싫습니다. 안 할 거예요."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다.

"진호 씨."

다미앙이 달래듯 말했지만 진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둘 사이에 불꽃이 튀자 이윤주가 급히 끼어들었다.

"오케이, 방금 건 누나가 미안. 아까 들은 말은 잊고, 메이저의 무게를 좀 알려 줬으면 싶어. 4대 패션 위크를 먼저 밟아 본 선배로서. 쟤들 이대로 나갔다가는 크게 터져."

"음."

"또래인 네가 보여 줘야 확실하게 느낄 거야. 부탁할게."

진호는 모델들을 바라봤다.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길쭉길쭉한 키에 훌륭한 비율, 모델로서 훌륭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한국인이었다. 같은 한국인이 해외에 나가 망신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다짐이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에휴.'

"끙. 제가 감히 주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라면야……."

"키야! 역시 우리 진호!"

"에휴, 그렇게 웃으면 화낼 수도 없잖아요. 알았어요, 워킹부터 하면 되죠?"

"옴므 쇼에서의 레벨로."

"네에."

진호는 뚜벅뚜벅 걸어가 공간의 끝에 섰다. 벽면 거울을 통해 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적의가 가득한 또래 모델들의 시선도 말이다.

'옴므 패션쇼에서의 레벨이라…….'

"스으읍."

심호흡을 하는 진호의 눈에서 주위 경관들이 사라지고 치열함으로 가득했던 백스테이지가 펼쳐졌다. 미세한 실수를 기다리던 맹수들의 집요한 시선들, 그 속에서 무너지지 않게 발버둥을 쳤던 몸부림, 너무도 강렬한 기억이라서 집중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이윽고 소리마저 사라지자 진호는 입을 다물며 몸을 돌렸다.

'좋아, 가자.'

진호의 발이 성큼 내디뎌졌다.

모델 최환희는 등 돌린 진호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어휴, 가증스러워. 어쩌다 기회를 얻은 것에 불과한 주제에 누군가를 짓밟아 돋보이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워킹부터 하면 되죠?'

"지랄."

'방금도 디자이너님에게 아부한 주제에! 대체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진호는 중학교 때부터 모델이 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온 최환희와 달리 되는 대로 살아오다가 운이 좋아 주목 받은 존재에 불과했다.

예상대로 금세 연예계로 조르르 달려가 버렸다.

'모델을 연예인이 되기 위한 관문으로 보는 놈 따위가 잘해 봤자지!'

주위를 둘러보니 오늘 오디션에 참가한 사람들 모두 그렇게 생각 하는 것 같았다.

'그래, 얼마나 잘하나 보자. 내가 오늘 떨어져도 신랄하게…….'

"음?"

뭔가 이상하다.

왠지 공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다.

왠지 목이 따끔따끔하다.

그러며 꼿꼿이 선 진호의 등이 점점 커지고 있다.

날카롭다.

다가가면 베어져 버릴 것처럼 위험하다.

'무, 무슨!'

"시, 실패했네. 모델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면 안 된……."

"호오, 쟤 지금 백스테이지에 있는 것 같지?"

"응, 언니. 맨즈는 생각보다 예민 하지 않나 보네."

"그러게. 난 남자들끼리라서 엄청 거칠 줄 알았는데."

'저게?'

모델들의 시선이 심사위원인 이윤주와 김혜진에게로 향했다.

둘은 계속 보라는 듯 손짓을 했고, 고개를 돌린 모델들은 몸을 돌리는 진호를 보곤 눈을 부릅떴다.

"헉!"

'사, 사람이 사라졌어?'

너무도 잘생겨서 후광마저 비추는데 그 모든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옷만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미쳤다."

런웨이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다시 백스테이지로 돌아올 때까지 오로지 나만의 시간이다.

나만이 돋보여야 하고, 내가 입은 옷이 최대한 돋보여야 한다. 그 외에는 아무런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생각나지도 않는다. 아니, 않아야 한다. 않아야 했다.

"호오, 거의 5년차 급인데?"

"에이, 7년차 정도지. 옷의 어디를 드러내야 할지 확실하게 알고 있잖아. 진호야, 바지만 드러내 봐."

빠직!

"그렇지! 이번엔 벨트!"

"오케이, 좋다! 시계!"

"진호야, 이번엔 구두!"

와장창!

"……아."

결국 깨져 버렸다.

앞을 보니 불타오르면서도 차갑다 못해 베어 버릴 것 같은 세 쌍의 눈이 노려보고 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런웨이에 선 순간 워킹을 망칠 수는 없었다. 대신 스태프 헬퍼 포함 수 백 명의 사람들에게 잡아먹힐 뻔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능청스러울 수는 있었다.

"끙, 봐주세요. 이러다 나 죽어요."

양손을 모으고 능글맞게 웃은 진호는 턴을 한 후 마지막 워킹까지 완전히 마치고 나서야 감정을 약간 흐트러트렸다.

"후아."

"하!"

'응?'

막혔던 숨이 트인 듯 얼굴이 상기된 모델들의 모습에 진호는 의문을 가졌다.

'겨우 이 정도로? 15초도 안 됐는데? 그것도 런웨이 위였는데?'

"으하핫!"

모두의 시선이 이윤주에게로 몰렸다. 그녀의 눈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이제 알겠니? 너희들이 얼마나 미숙한지?"

모델들은 입술을 깨물며 몸을 떨었다. 진호는 굉장히 난처했다.

"아, 누나, 왜 그러세요."

"그래, 이건 네가 설명하는 게 낫겠다. 왜 그런 포스를 뿜은 거야?"

대답하지 않았다가는 이윤주의 독설이 모델들에게 날아갈 판이었다.

"끙. 당연히 잡아먹힐 수 없으니까 그런 거죠. 아무리 친해지면 뭐 해요. 런웨이 위에서는 메인이고 뭐고 없는데."

옴므 패션쇼 뒤풀이 후 친해지게 된 남자 모델들은 다음 런웨이에선 다를 거라고 다짐했다.

진호도 져 줄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믿고 발탁해 준 피에트로 CE0와 팀 존스의 믿음 때문이라도 져 줄 수 없었다. 다른 브랜드의 패션쇼에 선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고렇췌! 무대 위에선 내가 입은 옷이 제일 돋보여야지! 그게 모델 이지!"

"방금 봤지? 저게 세계의 평균이야."

김혜진이 모델들을 보며 말했고, 이윤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쇼장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보니까 확실히 알겠다. 조금만 노력하면 톱급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는 걸?"

레전드라 불리는 두 사람이 호평을 해 주니 진호는 절로 심장이 간질거렸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의지로 행한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참 뿌듯했다.

"에이, 또 예뻐하신다. 그래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노력을 할 거니?"

약간은 과한 참견이었지만 진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촬영이었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나쁠 건 없었다.

"일단 내년 봄까지 마임을 배워 둘 생각이에요."

"호오, 이유는?"

"몸을 더 정밀하게 컨트롤해야 하니까요. 내가 아무리 감정을 표현해도 몸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말짱 황이잖아요."

모델들이 놀라서 진호를 보았다.

"역시 우리 진호!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

"언니는 당연한 말을 하고 있어. 그보다 진호야, 너 몇 개 국어를 하지?"

"음,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빼면 5개 국어를 하죠. 지금은 스페인어를 공부 중이고요."

"지금 네 나이가?"

"스무 살이죠."

"들었지?"

모델들의 낯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진호는 다시 난처해졌다.

"세계에서 워킹하려고 이 자리에 왔으면 5개 국어는 못하더라도 영어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진호는 입을 다물었다.

이윤주의 말은 옳았다. 최소한 영어라도 할 줄 알아야 스태프들의 요구를 알아들을 수 있다.

백스테이지에서는 그 누구도 챙겨 주지 않는다. 자꾸 실수하는 인형이 되어 부름을 기다리는 처지가 될 것인지, 불러 줄 수밖에 없는 보석이 될 것인지는 스스로가 결정할 문제였다.

"알겠어?"

"예!"

모델들이 힘차게 외치자 박선건, 이윤주, 김혜진은 흐뭇하게 웃었다.

"진호야, 마지막으로 해 주고 싶은 말 있니?"

"네."

진호는 모델들을 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방금 전과 달리 존경으로 가득했다.

"어쩌다 운 좋아 이 자리에 오르게 됐지만, 그래도 세계 무대를 먼저 밟아 본 사람으로서 한마디 할게요. 자신을 믿으세요. 자신의 노력을 믿고, 살아온 시간을 믿으세요.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은 나입니다. 감사하고, 파이팅입니다."

짝짝짝짝짝짝!

우레와 같이 쏟아지는 박수에 진호는 머리를 긁적였고, 그 모습은 고스란히 방송용 카메라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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