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2권 23화
"안녕하십니까, 이진호입니다!"
진호는 넙죽 허리를 숙였다. 진호는 HU 에이전시 소속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다미앙 씨 자리가 어딘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시아 총괄지부에서 오신분 말이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그냥 알려 주시면."
"이쪽입니다."
뭔가 굉장히 이상했다.
"이곳이 다미앙 디렉터님의 사무실입니다."
마치 부장님처럼 사무실을 따로 쓰고 있었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
"네?"
"혹시 이번 9월 4대 패션 위크에 나가십니까? 만약 나가신다면 디올이나 지방시에 말 좀 잘 부탁드립니다."
"예?"
"하하하, 인사가 늦었습니다. 캐스팅 디렉터 박선호입니다."
"아, 네……."
"꼭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밑에 굉장히 뛰어난 모델들이 있습니다."
진호는 손에 들린 명함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건가?'
서울 패션 위크에선 한국인 모델 이런웨이를 걷는다. 그러나 4대 패션쇼라 불리는 파리, 런던, 뉴욕, 밀라노에서는 한국 모델을 보기 힘들다. 한국인 디자이너의 쇼가 아닌 이상 말이다.
축구로 치면 4대 패션쇼는 월드컵 내지 EPL이고, 야구로 치면 메이저리그다. 돈뿐만이 아니라 인지도에서 차이가 났다.
'쩝, 내가 누굴 꽂아 줄 그런 급은 아닌데.'
다시 머리를 긁은 진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미앙의 사무실은 일반 회사원 사무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기획사나 대기업에서 은퇴한 과장급 이상 인사들 위주로 살펴보십시오. 스페셜 포스를 꾸리려면 그 정도 급은 되어야 합니다."
'응?'
"특히 홍보나 언론에 관해서는 대기업이나 언론사 쪽이 훨씬 더……."
눈이 마주치자 진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오셨습니까, 진호 씨."
전화를 끊은 다미앙이 소파를 가리켰다.
"커피? 녹차? 음료수는 오렌지가 있습니다."
"오렌지로 부탁드릴게요."
탁! 탁!
진호는 오렌지 주스와 함께 놓인 서류를 보며 의아해했다.
"첫 장은 스폰 협의에 관한 서류 입니다."
"스폰이요? 협찬이 아니라?"
"협의가 들어온 게 죄다 비슷한 급이다 보니 스폰 위주로 받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서류를 살폈다.
'다이어트 약, 화장품, 왁스, 양말, 팔찌, 목걸이…….'
"와, 이게 대체 몇 개야?"
총 열 가지 품목이었다.
"기한은 3개월, 평균 3백만 원입니다. 조건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SNS를 통해 노출해 줄 것."
한 가지 품목당 3백만 원씩 10품 목, 총 3천만 원이다.
1년이면 1억 2천만 원이었다.
"……돈 벌기 엄청 쉽네요."
"겨우 이 정도에 놀라면 곤란합니다. 진호 씨가 더 유명해지신다면 이보다 몇 배는 더 버실 수 있습니다."
"어, 엄청나네요."
"독립하시려면 바짝 당기셔야죠."
"끙……."
진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부모님이 반대를 했다. 특히 어머니 나진희의 반대가 심했다. 자금지원 불가는 물론이고, 아버지가 서재 겸 퇴근 후 일을 보는 방을 드레스 룸으로 고쳐 버리면서 지방시와 태그호이어의 후원 물품들을 수용해 버렸다.
"하하, 얼른 유명해져서 다른 의류 브랜드와 후원 계약을 해야겠군요."
"그러니까요."
한숨을 내뱉은 진호는 다음 장을 넘겨 보았다.
"이것들이 제게 온 섭외 목록인 가요?"
"예. 어떤 프로그램인지는 주석으로 달아 놓았습니다."
"흠."
대부분 케이블 방송국의 이름 모를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거의 다 요리네…….'
그것도 도전, 세프의 아바타와 별 반 다를 게 없었다. 딱히 이거다 하고 당기는 게 없었고, 60퍼센트 이상은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다.
"응?"
뒷장을 넘기니 온통 프랑스어로 적혀 있었다.
"프랑스에서 콜이 들어온 예능 프로그램입니다만,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왜죠?"
"출연자의 인격을 그리 존중하지 않습니다. 일본보다 더."
그렇다면 거부하는 게 옳았다.
"……무조건 출연해야 하는 프로그램은 없는 거죠?"
"그렇습니다. 아무거나 원하시는 대로 고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좀 더 고민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천천히 하십시오. 시간은 많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몸을 일으켰다.
"수고하세요."
사무실을 나선 진호는 다시 몰리는 시선에 재빨리 3층을 빠져나왔다.
'스태프가 없나?'
생각해 보면 그럴 법도 했다. HU 에이전시는 어디까지나 모델에 이전시고, 모델이 방송에 출연하는 건 극히 드물다. 사람이 없을 만했다.
'아버지한테 좀 물어볼까?'
아버지 이형만은 대기업의 부장님이다. 은퇴하거나 은퇴를 준비하는 인재 정도는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오늘 저녁에…….'
찌직! 무언가를 밟았다 여긴 순간 발이 미끄러졌다.
"억!"
재빨리 옆 난간을 잡은 진호는 심장을 달래며 밟은 무언가를 보았다.
"……노트?"
아까 전 그 사람의 것 같았다.
"아, 이런."
반쯤 찢어진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일단 수습하고 기다리든가……. 응?'
노트를 든 진호는 깜짝 놀랐다. 노트 안에는 의상 디자인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눈에 확 들어을 만큼 혁신적이었다.
"오버사이즈에 젠더리스라……."
우리 동네 패셔니스타를 얻은 이후 패션에 대해 어느 정도 공부를 해서 그런지 디자인이 품고 있는 뜻이 눈에 확 들어왔다.
"누군지는 몰라도 사고 싶네. 거슬리는 게 좀 있기는 하지만. 커트된 바짓단 길이가 애매해. 이렇게 속옷처럼 바짝 잘라 버려서 여성 성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미묘하게 잘라서……."
"어, 어느 정도?"
"숏 팬츠처럼 짧은 길이로……. 응?"
목소리의 주인을 찾은 진호는 순간 의아해했다.
'남자? 여자?'
"숏 팬츠처럼? 왜?"
'남자분이시네.'
목소리가 그랬다. 초롱초롱한 눈이 좀 부담스럽지만 말이다.
"젠더리스라는 게 여자 남자 따지지 않는 패션이잖아요. 그렇다면 남자 여자 어느 누가 입어도 하나의 성이 부각되면 안 되죠. 여기요, 놓여 있는지 모르고 밟고 말았어요. 그리고 함부로 봐서 죄송합니다."
노트를 넘겨받은 중년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이 진짜, 어디 있는 거야!"
디자이너 박선건은 신경질적으로 백을 닫았다.
추락하는 것처럼 온몸이 아찔해지고 숨이 턱턱 막혔다. 사라지지 말아야 할게 사라져 버렸다.
두 눈동자가 풍랑을 만난 듯 흔들리는 상태로 손톱을 깨물며 오늘 움직인 이동경로를 더듬어 봤다.
"부, 분명 이 건물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있었어."
"뭐 찾아?"
"아니야. 별거 아닌……."
'계단! 맞아!'
번거로움을 피해 계단에 앉아 노트를 들여다본 게 기억났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좀 끊어."
"시끄러워!"
그는 뛰듯 계단을 향해 걸었다.
'부디 있어야!'
벌컥! 문을 연 그는 공중에 떠 있는 자신의 디자인 노트를 보고 크게 안심했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 도둑놈의 새끼가.'
눈이 돌아 버린 그는 다급히 디자인 노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커트된 바짓단 길이가 애매해."
쿵! 뒤이어 들려온 '여성성'이란 말이 머릿속을 하얗게 물들였다. 지난 1년 동안 준비해 온 디자인이다. 그 말의 진의를 모를 리 없었다.
'젠더리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이 미친년! 네 아이덴티티를 부정하고 있었잖아!'
오버사이즈와 젠더리스야말로 그 자신의 아이덴티티.
뺏다시피 노트를 가져온 그는 빠르게 선을 그리고 지워 갔다.
그의 손이 멈춘 건 10분이 흐른 뒤였다.
"……하아아."
토대를 다지는 것부터 손수 완성 시킨 집을 보는 것처럼 만족스럽게 웃던 박선건은 아차하며 진호를 보았다.
"미안. 내가 너무 무례했지? 너무 중요한 순간이라서 결례를 하고 말았네."
"아, 아뇨. 괜찮습니다."
손을 저은 진호는 살짝 물러났다.
스케치를 할 때의 그 광기 어린 눈빛, 좀 무서웠다. 남자인지 여자 인지 분간이 잘되지 않는 외모인데, 자신을 보며 초롱초롱한 눈빛을 짓는 것도 좀 무서웠다.
"자기!"
"네, 네!"
"혹시 더 거슬리는 부분 있어? 진짜 내겐 중요한 일이거든! 부탁 할게!"
"어, 음."
"제발……."
너무 간절해 보였다.
'쩝.'
머리를 긁은 진호는 그의 옆에서며 펼쳐진 디자인 노트를 가리켰다.
"전 이 부분의 색상이……."
"아!"
그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단점, 신발의 장식부터 시작해 장신구까지. 두 눈이 황홀하게 물든 박선건은 진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반박을 하기도 하며 디자인을 고쳐 갔다.
"마지막으로 너무 유니크하다 보니까 일반인이 소화하기 힘들다는 것?"
박선건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자기, 이제 보니까 디자이너가 아니라 스타일리스트구나?"
이야기를 하다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진호는 디자인을 배운 적이 없고, 창작에 대한 재능보다는 수정을 하는데 재능이 있다는 걸 말이다. 수정하고 조합하는 재능은 스타일리스트에 가깝다.
"그런 외모로 스타일리스트 하는 게 아깝지 않아?"
"아뇨, 지금은 모델이에요."
"모델?"
끼이익!
그때 2층의 문이 열렸다.
"야, 저딴 애들 보이려고 나 부른 게나? 나 바빠, 이년아."
"나도 이럴 거라곤 생각 못했지, 언니. 설마 기본도 안 됐……."
"엥? 윤주 누나? 혜진 누나?"
디올 디너파티에서 친해진 이윤주와 김혜진이었다.
"진호야!"
"진호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응? 선건 오빠는 여기 왜 있어? 담배 피우러 간 거 아니었어?"
"저야 여기 소속이니까요. 그런데 누나들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저희 에이전시 소속이 아니잖아요."
"너 HU 에이전시랑 계약했니?"
"네. 저번 달에 계약했어요. 방송국이나 기획사들에서 연락이 많이 와서요."
"코리아랑 한 거야?"
"아뇨, 아시아 총괄지사랑요."
"잘했어! 팀 존스의 뮤즈라면 총괄지사랑 해야지. 전 세계적으로 티오를 얻을 수 있고. 우리 진호, 알아서 척척 해?"
"으흐흐. 아, 그런데 정말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네 옆의 오빠 때문에. 디자이너 박선건, 알지?"
"아, 그분! 오버 사이즈와 젠더리스가 결합돼서 참 좋던……. 어? ……흐어억?"
진호는 기겁하며 박선건을 보았다.
'지, 지금 내가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바꾸라고 말한 거야? 디자이너 면전에 대고 디자인을 깐 거냐고!'
온몸에서 식은 땀이 주욱 흘러내렸다.
"여기 오빠가 이번에 런던 컬렉션에 출사하는데, 그 쇼에 설 모델들 오디션을 봐주고 있거든."
'커허억! 런던 컬렉션! 난 죽었다!'
"아하하. 그, 그래요? 역시 레전드시네요."
이윤주와 김혜진은 한국 모델계의 레전드였다.
진호는 이윤주, 김혜진과 이쪽을 번갈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박선건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그, 그런데 그걸 방송으로도 내 보내나요?"
아까 본 카메라는 분명 방송용 카메라였다.
"오디션 때문이 아니라 혜진이 얘 때문이지. 나 홀로 산다."
"……아아."
"그래서 억지로 웃는데 아주 죽겠다. 카메라만 아니면 벌써 쌍욕 나갔어."
"언니!"
진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미쳤지. 우리 진호 같은 훈남 있을까 하고 왔더니 다 저 잘난 맛에 사는 애송이들뿐이고. 어디 선배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저놈들 대가리 깨 줄 사람 없…."
이윤주와 김혜진의 시선이 몰렸다.
'응?'
"진호야."
이윤주가 슬그머니 어깨를 감싸 왔다.
"넵?"
"우리 진호, 이후로 스케줄 있니?"
"없습……. 아뇨! 있습니다! 있어요! 무진장 많이!"
"어머, 잘됐다. 그럼 갈까?"
어깨를 감싼 팔이 덤벨처럼 무겁고 단단했다. 박선건도 어느새 자 물쇠처럼 팔짱을 끼고 있었다.
'다미앙 씨! 헬프!'
핸드폰을 쥔 진호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