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2권 20화
7.
8월이 되자 더 더워졌다. 딱 사람을 잡을 날씨였다.
그동안 진호는 지방시와 태그호이어 화보 촬영을 하는 등 제법 바쁜 시간을 보냈다.
전국 대학 동아리 대회에 참가해 신인전 경기에서 우승도 했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단식이 아닌 복식으로 치러진 점이 좀 아쉽기는 했다.
"흐흐흐."
책장에 놓인 금메달이 번쩍번쩍 빛난다. 생애 첫 트로피. 진호는 광택제를 사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되었다.
"안 나오니! 시작한다!"
"네, 가요!"
거실엔 부모님과 재준, 다미앙이 있었다. 오늘은 도전, 세프의 아바타를 방영하는 날이었다.
"……넌 이럴 때도 방송하고 싶냐?"
"녹화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말이 나올 것 같냐?"
"나 나온 영상은 무조건 반반이다."
"응, 꺼져. 네가 울 가게에서 집어 먹은 거 계산하면 종신 노예야."
맞는 말이라서 진호는 항변을 할 수가 없었다. 쇠도 씹어 먹을 십 대. 친구 집이 곧 내 집이었다.
"어휴, 정신 사나워. 조용히 해."
"아니, 녹화한 사람은 난데 엄마가 왜 그렇게 긴장을 해?"
"그럼 긴장을 안 하니? 혼날래?"
"아뇨. 사과가 참 맛있네요. 많이 드세요, 다미앙 씨."
"하하, 고맙습니다."
"어휴, 이건 누굴 닮아서……."
"아, 시작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30인치 TV로 향했다.
'아, TV 한 대 사야겠다.'
진호는 그동안 좀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전, 세프의 아바타! 안녕하십니까. MC...
프로그램이 끝나자 부모님은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진호는 왠지 뿌듯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수고했다. 멋지게 나왔구나."
"가, 감사합니다, 아버지."
"앞으로도 저렇게만 해. 서로 돕고, 응? 그럼 먼저 들어가마."
핸드폰을 꼭 쥔 아버지가 안방으로 향했다.
잔뜩 추켜세워진 어깨를 보자 진호는 가슴이 간지러웠다.
"아들."
형언할 수 없는 많은 감정으로 빛나는 눈이 어머니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 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호는 눈시울이 뜨거우면서도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충족되었다.
"아들, 요리는 언제 배웠어?"
"트, 틈틈이 배웠지."
"그런데 밥 한번 안 한 거니? 네가 인간이니?"
"……어?"
"내일부터 부탁해-. 호호, 오늘 전화할 곳이 참 많겠네!"
"어, 엄마? 잠깐, 여사님? 어마마마?"
쿵! 닫힌 문이 진호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크크크, 그럼 수고해라. 난 간다."
그렇게 재준마저 가 버리자 뭔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좋은 분들이시군요."
"……네, 그렇죠."
"여길 보시겠습니까?"
-시청률 8.2퍼센트로 마무리! 초대박입니다!
"한국 지사에서 보내온 것입니다. 참고로 도전, 세프의 아바타 시청률은 최고 4.1 퍼센트. 정확히 두 배를 만드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블루칩이 되셨군요."
"어…… 그래요?"
그렇다고 해도 진호로선 그냥 얼떨떨할 뿐이었다.
"역시……."
"네?"
"아뇨. 이번엔 이걸 보시겠습니까?"
다시 다미앙의 핸드폰을 본 진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광고?"
그냥 광고였다면 기대됐을망정 이렇게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광고료가 무슨……. 나 신인이잖아요?"
이설아도 5백만 원을 겨우 받는다. 그런데 그 몇 배다.
"모피리처드. 영국의 국민 브랜드 라고 할 수 있는 소형 가전 브랜드입니다. 현재 한국 시장의 3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마케팅에 힘을 쓰고 있는 중이죠."
"아……."
"제가 염두에 둔 브랜드는 아니지만,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앞으로 계속 들어올테니 거부하셔도 좋습니다."
"아뇨, 하죠."
광고료가 엄청나다. 방금 생각한 TV를 아주 큰 걸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번 계약은 꿩 먹은 후 알을 먹는데 다 그 깃털 가지고 옷까지만드는 기회가 될……."
우우웅!
진호와 다미앙의 시선이 다시 핸드폰으로 향했다.
문자를 확인한 다미앙은 깜짝 놀랐다.
"대체 왜 이곳에서……."
어딘지 모르는 진호만이 고개를 모로 기울일 뿐이었다.
* * *
도전, 세프의 아바타는 이슈가 되었다.
진호는 다시 실시간 검색어를 줄 세우며 각종 커뮤니티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반팔 때문에 드러난 잔 근육과 브로맨스가 여심을 제대로 자극했다.
요리 관련 프로그램과 먹방 프로그램의 제의도 쏟아졌다. 우리 동네 스포츠에서도 보조 코치로 합류하자는 제의를 했다.
그러나 진호와 다미앙은 모두 고사했다. 진호는 비슷한 경험을 연 달아 하기 싫어서였고, 다미앙은 이미지 소비를 막기 위해서였다.
"저 이거 진짜 하고 싶은데."
"안 됩니다. 그 프레임은 절대 씌울 수 없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세요. 해외 가서 막 먹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에요! 황금 여권 탈 자신 있어요! 한주엽 감독님 기록 깰 자신 있어요!"
"그래서 안 됩니다. 잘, 그리고 복스럽게 먹는 귀여운 먹보 이미지는 좋지만, 그런 식의 먹깨비 이미지는 절대 안 됩니다."
"…… 진짜 한국어 패치 잘되셨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바늘조차 박히지 않을 그 철저한 디펜스에 진호는 입술을 삐죽 내 밀었다.
'하, 스킬 하나 얻을 수 있는 기횐데.'
미각이나 파티시에 관련 스킬. 요리 실력을 지금보다 한층 더 높은 곳에 올려 줄 그 스킬들은 죄다 해외에서 얻어야 했다.
"프랑스에서 관광 안 하고 해금 할 걸."
후회는 없지만, 후회가 되었다.
"곧 착륙할 예정입니다. 꽤 흔들릴 예정이니 안전벨트를 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친절한 승무원의 경고대로 안전 벨트를 맨 진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일본의 나리타 공항이 보였다.
"료 형!"
"진짱!"
공항 한가운데서 훈훈한 공기가 퍼졌다.
"이렇게 응해 줘서 정말 고마워. 넌 내 은인이야."
"뭘요, 모두 이게 맞아서 온 거죠."
진호가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붙였다.
"프로는 이걸로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풋. 그래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정말 고마워. 아, 이쪽은 내 매니저님."
"빌리브 프로덕션의 하세가와 요시키입니다. 덕분에 하시마가 보다 좋은 곳에서 데뷔할 수 있게 됐습니다."
"어디 저 때문일까요. 모두 료 형이 잘했기 때문이죠. 이진호입니다. 이쪽은 제 치프 매니저십니다."
다미앙과 요시키도 인사를 나눴다.
"저게 그건가 보네요."
캠코더 한 대가 이쪽을 찍고 있었다. 하시마가 데뷔할 프로그램에서 소개 영상으로 쓸 용도로 그의 일상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하시마가 고마운 진호를 초대해 도쿄를 관광시켜 주는 일상이다.
"입국부터 일을 하게 만들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그럼 갈까요? 료 형, 우리 어디부터 가요?"
"네가 가고 싶다는 그곳."
"아키하바라! 얼른 가시죠!"
카메라맨까지 합한 다섯 사람은 빠르게 이동했다.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 것보다 짧은 시간 안에 도착한 일본은 꽤 신기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충격도 주었다.
세상 모든 게임이 몰려 있다는 아키하바라는 소위 오타쿠라 부르는 사람들의 거리였다.
당당한 모습이 보기 좋았지만, 또 당당해서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 열정을 불태웠던 거군요."
환기는 제대로 될까 싶은 작고 어두운 지하 공연장. 왜 지하 아이돌이라 불리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대관료를 내고 나면 손에 쥐는 건 얼마 없지. 어쩔 땐 컵라면에 삼각 김밥도 사치가 돼.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성공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야. 나도 저들처럼 성공하고 싶다."
환하게 켜진 TV를 더듬는 듯 손이 허우적거린다.
해마다 수많은 이들이 지하를 찾고, 해마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빛의 세상으로 향한다. 지하 아이돌 계는 구원 줄이 없으면 끝없이 침잠해 가는 모래 지옥이다.
"그래서 네가 은인이야. 진짱이 아니었으면 난 여전히 지하 아이돌을 벗어나지 못했을 테니까."
도전, 세프의 아바타는 소속사가 준 마지막 기회였다. 지하 아이돌도 소속사를 가지고 있다.
진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죠. 한국에 온 것도 모두 형의 노력이고, 성공한 것도 모두 형의 노력이에요. 전 그 자리에 우연히 있었을 뿐입니다. 형이 살아온 시간을 깎아 내리지 마세요."
공치사가 아니었다. 진호는 하시마 료가 자신이 아니었어도 분명 성공했을 외모와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이라고, 리셋 라이프를 통해 손쉽게 여기까지 온 자신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더 겸손해야겠다.'
"진짱."
하시마 료는 감동했고, 하세가와 요시키는 감탄했다.
둘의 눈빛이 부담스런 진호는 화제를 돌렸다.
"큼, 그보다 형은 어떤 걸로 데뷔 하는 거예요? 아이돌? 배우?"
"아니, 솔로 뮤지션이야."
"AKB, 노기자카, 케이키자카 등 현재 일본은 과한 숫자의 아이돌에 피로감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그 틈새를 노리려 합니다. 음악, 연기, 예능 모두 다 하는 엔터테이너."
"오! 만능 엔터테이너군요! 그거 좋죠!"
진호도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 볼 생각이었기에 더 응원할 수 있었다.
"현재는 음악에 치중할 생각입니다."
"형이라면 정말 잘할 거예요!"
"고마워, 진짱. 덕분에 뮤직 스테이션에서 데뷔하게 됐어."
뮤직 스테이션은 일본 최고의 음악 프로그램이지만 잘 모르는 진호는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여기 음반."
"오"
진호로선 두 번째로 받아 본 가수 앨범이었다. 처음은 이설아였다.
"나 귀 엄청 좋아요. 이상하면 이상하다고 할 겁니다."
"그런 소리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겠네."
"흐흐흐. 아, 다음 갈 곳은 어디 예요?"
"일본에 왔으면 일본 요리를 먹어 봐야지. 라멘 어때?"
순간 진호는 턱이 아릿해지며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덮밥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숫제 도게자까지 할 모습에 다미앙은 이마를 짚었다.
라멘 두 그릇과 덮밥 한 그릇, 그것도 모두 大사이즈였다.
"하, 맛있게 먹었다. 배도 적당히 부르고."
진하고 깊은 국물과 그릇 위에 가득 쌓인 소고기. 진호는 일본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 진짱은 대식가였구나."
"에이, 이 정도는 평범한 수준이죠."
"평범하지 않은데!"
"보통 이 정도는 먹지 않나요?"
"전혀!"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핫! 다음 스케줄 가시죠!"
배가 어느 정도 불러서 그런지 기분이 참 좋았다.
다음 스케줄은 피아노 독주회 감상이었다.
가까운 곳이라 도보로 이동하던 진호의 눈에 악기점이 들어왔다. 줄줄이 전시된 기타가 절로 발을 붙들었다.
'하지만 촬영이…….'
30분 후에 독주회가 시작하는 게 문제였다.
진호는 슬그미니 하시마 료를 보았다. 그도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형, 잠시 구경하고 갈까요?"
"그, 그럴까?"
진호는 하시마의 손목을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가시죠! 시간 없어요!"
하세가와는 감탄했고, 다미앙은 흐뭇하게 웃었다.
의도하지 않는데도 좋은 그림들이 나오고 있었다.
* * *
처음 들어와 본 악기점은 테니스 용품 판매점처럼 별세계였다. 커다란 매장엔 수많은 악기들이 있었지만, 그중 진호의 눈을 현혹시키는 건 매끈하게 굴곡진 기타의 바디뿐이었다.
"야마하 CLP-545! 롤랜드 FP3 이커즈와일!"
전자 피아노를 보며 눈을 빛내는 하시마 료를 무시하며 기타들을 둘러보던 진호는 하나의 기타를 발견하곤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
어떤 이끌림.
다른 기타들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좋은 걸 보고 있군요. 마틴 000-28EC. 에릭 클랩튼의 시그니처 기타입니다. 너무 비싼 나머지 이렇게 공간만 차지하고 있지만 말 입니다."
에릭 클랩튼. 누구나 인정하는 레전드다.
"한번 쳐 봐도 될까요?"
진호의 말에 점주는 말없이 기타를 내밀었다.
스윽! 차가운 바디에서린 온기와 손바닥에 달라붙는 넥의 부드러음이 심장을 사로잡았다. 근처 의자에 앉은 진호는 조심히 줄을 훑어 내렸다.
디링.
맑고 깊은 소리가 진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악기점을 울렸다. 진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역시 마틴! 역시 000-28EC! 꿈의 기타라 불릴 만하군요!"
'아니야. 비슷하지만 달라. 일반적인 마틴 000-28EC가 아니야.'
마치 깊고 깊은 동굴과 같았다. 스킬 옥탑방 스타를 얻은 후 진호는 에릭 클랩튼의 기타 연주곡을 수없이 들었다.
제프 백, 지미 페이지 등 레전드들의 기타 연주곡이 핸드폰 속에 저장되어 있다.
매일같이 들은 소리를 착각할 리가 없었다. 절대 에릭 클랩튼의 000-28EC가 아니었다. 보통 시그니처 기타는 그 기타리스트의 기타 연주를 벗어나기 힘들다고 하지만, 이건 달랐다.
진호의 눈에 불이 켜졌다.
"이거 살게요. 카드 되죠?"
점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소, 손님, 그 기타의 가격은 53 만 엔입니다만……."
한화로 5백만 원이 넘는 가격. 사람들이 경악했다.
"네, 상관없어요."
'이럴 때 쓰려고 돈을 번 거지!'
진호는 촤악! 멋지게 카드를 내 밀었다.
"일시불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