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2권 18화
"……진호 씨는 정말 그런 삶에 만족하고 계셨던 거군요. 그래서 그런 희열을 알았음에도 저를 거부했던 것이었어요."
"네, 무엇을 해도 구속받지 않는 삶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젠 좀 달라졌죠."
"드러난 공작은 다시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는 법이니까요."
"좋은 말이네요. 그래서 제안하고 싶어요."
"경청하겠습니다."
진호는 심호흡을 했다.
"수익 분배는 9 대 1. 모든 스케줄은 저와 상의해야 합니다."
움찔! 몸이 크게 흔들린 다미앙은 아예 넥타이를 풀어 버렸다. 온 몸이 달아오를 만큼 어이없는 말이었다.
"후, 그게 불가능한 조건이란 건 아십니까? 냉정히 따지면 진호 씨는 이제 막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신인 모델에 불과합니다."
진호는 다시 눈을 빛냈다. 듣고 싶던 말이었다. 이제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그 신인 모델이 지방시와 태그호이어에서도 후원을 받을 예정이라면요? 전속이 아닌 말 그대로의 후원."
쿵! 진호의 철없고 오만하며 기회를 노린 말에 사람을 잘못 봤다고 생각했던 다미앙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L, LVMH 그룹, 아니 피에트로 베타리 CEO가 움직인 겁니까?"
진호는 대답 대신 해맑게 웃었다. 승부수는 제대로 먹혔다.
'고마워요, 피에트로.'
훗날 LVMH의 CEO가 되고 싶으니 한 손 거들어 달라던 피에트로. 그는 배려와 비즈니스를 함께 제안했다.
커다란 배경이 생겼지만 계약은 조율될 수밖에 없었다. 진호도 그럴 생각으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질렀던 것이다.
세 시간의 대장정 끝에 수익 분배는 8 대 2, 1년에 HU 에이전시가 원하는 스케줄 세 개를 무조건 한다는 조건으로 계약은 체결되었다.
"후, 진호 씨의 가장 큰 무기는 두뇌였군요. 손발 다 들었습니다."
"하하하."
디마앙은 멋쩍어하는 그를 보며 풀썩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후부터 진호 씨에 대한 케어가 들어갈 겁니다. 차량, 드라이빙 매니저, 스타일리스트도 함께 말입니다. 더 궁금한 점 있습니까?"
"네, 다미앙 씨가 제게 원하는 스케줄이 궁금합니다, HU 에이전시가 아니라."
"예?"
"솔직히 말도 안 되는 계약이잖아요. 그러니 원하시는 게 있으면 말해 주세요. 패션쇼든 타 브랜드 화보 촬영이든 예능이든 뭐든지. 다미앙 씨와 오래 보고 싶거든요."
순간 다미앙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계약에 대해 말이 많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현재 거론되고 있는 치프 디렉터의 자리도 물건너 갈지 모를 정도로 위험한 계약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계약을 맺은 이유는 이렇게 해서라도 진호를 붙잡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외모, 스마트한 두뇌, 뛰어난 운동 신경,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적 재능, 범상치 않은 요리 실력 등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재능까지 합하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예상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이 자신을 마음껏 이용 하라고 한다.
"……이렇게 감동을 주실 줄은 몰랐군요. 알겠습니다.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
"기다릴게요."
"그럼."
다미앙은 세차게 뛰기 시작한 심장소리를 감추고자 부리나케 커피숍을 빠져나갔고, 진호는 딸랑 닫히는 문을 보며 눈을 빛냈다.
"과연 무슨 일을 가져올까?"
벌써부터 흥분되었다.
* * *
다미앙의 예상대로 계약 내용은 문제가 되었다.
"지금 이딴 걸 나보고 받아들이라는 건가?"
일본에 위치한 HU 에이전시 총괄지사. 콧수염이 인상적인 배불뚝이 50대 백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 올라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잭슨."
"후회 없나?"
"없습니다."
"치프 디렉터는 물론이고 임원이 될 확률이 낮아지는데도?"
"그렇게 협박하셔도 제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승부사 기질이 발동했군."
다미앙의 별명은 젊은 사냥꾼, 그리고 승부사였다. 그만큼 노린 모델은 무조건 끌어들였고, 그렇게 캐스팅한 모델들은 하나같이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그렇기에 코리아, 차이나, 재팬 등의 지사 치프 캐스팅 디렉터가 아니라 아시아 총괄지사의 치프 디렉터로 거론되는 것이었다.
30대에 치프 디렉터. HU에이전시 역사상 이보다 빠른 승진은 없었다.
"하지만 도박은 질 수도 있기에 도박이야. 자넨 지금 도박이 아니라 내실을 다져야 할 때고! 곧 있으면 남미 총괄지사로 갈 사람이 왜 이러는 건가!"
남미. 아름답고 빛나는 모델들을 수없이 발굴할 수 있는 기회의 땅, 다이아몬드 광산으로서 본사 임원이 되기 위해선 무조건 거쳐야 하는 코스였다.
"결국 제 선택이 옳았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빌어먹을!"
쾅, 책상을 내려친 총괄지사장은 꺼지라는 듯 손을 저었다.
고개를 숙인 후 지사장실을 빠져 나온 다미앙은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겨우 승낙 받았군."
계약서에 사인을 했어도 지사장의 직인이 찍히지 않으면 계약은 무효가 된다. 그걸 다음 치프 승진을 포기하며 받아 낸 것이다.
'그럼 이제 움직여야겠지.'
진호가 준 이용권, 그것을 패션쇼 나 화보 촬영 따위로 날리고 싶지 않았다.
"뭐가 좋을까……."
생각나는 분야가 몇 개 있었다.
"디렉터, 어떻게 됐습니까?"
"예상대로 신나게 깨졌습니다. 그러니 전에 말한 대로 떠나실 분들은 떠나십시오. 관리하고 있는 모델들도 함께 보내 준다는 약속도 지키겠습니다."
다미앙에게 소속된 팀원들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죄송합니다."
"저도 죄송합니다."
"다나카 선배! 아구에로 선배! 헨리 선배!"
순식간에 열 명의 팀원 중 아홉 명이 빠져나갔다. 남은 건 덩치 큰 매니저 한 명뿐이었다.
"이 기회주의자들 같으니! 이대로 지켜볼 겁니까, 팀장님!"
"당신도 지금이 기회입니다."
"안 떠납니다. 제가 어떻게 팀장 님을 떠난단 말입니까. 이쪽 일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던 놈을 이렇게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는데 말 입니다. 이 최철규, 그렇게 은혜 모르는 놈 아닙니다."
큰 덩치에 맞지 않게 감성적인 그의 모습에 싱긋 웃은 다미앙은 사무실의 문을 닫으며 장난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제야 내부의 적들이 제거 됐군요."
"……예?"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내부부터 단속해야 하는 게 정석 이죠."
"예?"
"모델의 수요가 적은 분야는 어딥니까, 철규 씨."
"아, 예. 식기와 주방 기구분야 입니다. 생활 가전의 일부인 이 분야는 제품의 효능만 입증하면 되기에, 또 됐기에 알려진 모델 및 배우, 연예인의 수요가 적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죠."
"네?"
씩 웃은 다미앙은 핸드폰을 들었다.
"예, 진호 씨. 요리는 얼마나 하십니까?"
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나기 시작 했다.
* * *
스타일링을 한 채 대기하고 있다가 전화를 받자마자 냉큼 내려온 진호는 살짝 놀랐다. 주차장엔 다미앙 혼자였다.
"다미앙 씨가 절 직접 관리하시는 건가요?"
듣기로 다미앙은 꽤 명성 있는 캐스팅 디렉터였다.
"제가 거북하다면 다른 사람으로 바꿔드리겠습니다."
"아, 아뇨! 저야 좋죠!"
다미앙이 장난이었다는 듯 푸근히 웃었다.
"진호 씨만을 위한 팀을 꾸릴 때까지 제가 스케줄과 드라이빙, 스타일링을 전담할 겁니다. 물론 팀이 완전히 꾸려진 후에도 치프 매니저로서 계속 담당할 테지만요."
"관리하는 모델이 한두 명이 아니실 텐데……."
"진호 씨니까요."
순간 진호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무럭무럭 생겨났다.
"덕분에 제 팀원에게 일감을 몰아 줄 수 있었습니다. 휴, 시간이 아주 남아돕니다. 하핫."
"뒷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요."
피식 웃은 진호가 허리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역시도.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진호 씨가 한국에서 타고 다니 실 차량입니다."
"이건……."
승합차였다. 그랜드 스타X스였다.
"큼, 아직 진호 씨의 등급이."
"와, 제가 이렇게 좋은 차를 타도 되는 건가요? 설아 씨가 말하기로는 신인은 봉고차나 중고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고 했는데?"
진호는 이제 무조건적인 후원을 받던 디올의 품을 벗어나 사회로 나왔다. 디올 안에서야 국내 톱급 모델이었지, 사회에선 햇병아리일 뿐이다.
때문에 그런 차가 배정되면 자비를 들여서라도 꼭 에어컨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던 그로서는 의외의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치 새 차처럼 매끄럽게 빛나는 광택. 앞으로 자신의 차라고 생각 하니 이 아파트 주차장에 있는 모든 차들보다 빛나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다미앙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도 했다.
"그럼 가실까요? 헤어 스타일링 과 메이크업을 하려면 시간이 빠듯합니다."
"예!"
드디어 연예인으로서 시작이었다. 둘을 태운 차는 방송국으로 향했다.
방송국 로비부터 소음이 사라져 가고, 굳은 얼굴의 진호가 그들 사이를 지나쳐 간다.
생애 첫 스튜디오 녹화,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는 흥분이 먼저였지만 말이다.
대기실 문 앞에 선 진호는 다미앙을 보았다.
"다른 연예인분들에게 인사드려야 하는 건 아닌가요?"
"이 프로그램의 성격상 MC 및 세프 등과의 접촉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바타로서의 역할에 충실 하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도전, 세프의 아바타.
비전문가도 세프의 오더가 있다면 얼마든지 전문 요리사의 맛을 낼 수 있다는 취지의 프로그램이다. 그렇기에 세프 역시 아바타가 될 사람과 합을 맞출 수 없다. 때문에 자칫 루즈해질 수 있는데, 한국, 중국, 일본의 세프들이 각자의 아바타에게 오더를 내림으로써 삼국의 자존심 대결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시청률이 제법 나온다.
진호는 오늘 한국 세프의 아바타가 되어 요리할 예정이었다.
"후, 제가 앞으로 어떡하면 되나요?"
연예인은 이미지다. 다미앙이 원하는 이미지가 있고, 그게 용납이 된다면 진호는 얼마든지 응해 줄 용의가 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계약을 들어 줬으니 말이다.
"평소처럼 행동하시면 됩니다. 무언가를 꾸며 내려 하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
"정말요?"
"예, 그거면 됩니다. 꾸며 낸 이미지는 결국 파국을 불러오니까요."
마음이 크게 놓이는 말이었다.
"네, 그러도록 할게요."
빛나기 시작한 진호의 눈에 다미앙은 옅게 웃었다.
'대결이라 분위기가 험할 테지만…….'
진호라면 문제없었다.
"그럼 건투를 빌겠습니다."
다미앙이 물러나자 진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후, 가자."
진호는 대기실 문 앞에 서며 손을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진호는 잠시 멈칫했다.
넓은 대기실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세 대의 카메라와 스태프들이 이쪽을 보며 굳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와 있던 두 출연자도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출연하게 된 모델 이진호입니다."
"……어서 오세요. 저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아,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스태프들을 지나쳐 빈자리에 앉은 진호는 양쪽에 앉은 두 남자를 보았다. 둘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들고 있는 핸드폰을 보았다.
'안 잡아먹는데…….'
어색하고 팽팽한 분위기. 벌써부터 대결 모드인 것 같았다.
앞으로 한 시간은 더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걸 깨달은 진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중국인이라고 했지.'
"仰好. 我是 Lee Jin Ho. 非常感 (안녕 하세요. 이진호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외모를 보니 두 사람의 나라를 구분하는 건 쉬웠다.
중국 측 남성은 진호의 능숙한 발음에 깜짝 놀랐다. 스태프도 놀탔다.
"발음이 유창하군요. 본토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화교입니까?"
"아뇨, 공부를 열심히 했죠."
진호가 선본사에서 이탈리아어를 땐 후 익힌 언어가 중국어였다.
"중국은 그 긴 시간 속에 수많은 왕조가 들어서며 독자적으로 발달 했잖아요. 모든 지방을 돌아보며 그 지방의 요리를 먹어 보는 게 제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예요."
"……하하! 내가 여자였다면 바로 넘어갔을 말입니다! 포부가 아주 대단합니다! 웨이홍입니다."
'아닌데. 진짠데.'
요리의 한 분야인 중식.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하하. 아, (잘 부탁합니다)."
이번엔 호리호리한 외형의 일본 남성이 놀랐다.
"큼, 하시마 료입니다. 혹시 배우 입니까?"
"아직은 대학생 겸 모델이죠. 하시마 씨는 배우이신가요?"
선이 여자처럼 고운 꽃미남이었다.
"지하 아이돌이라고 아십니까?"
"……죄송합니다. 대신 알려 주시면 이번 기회에 확실히 기억하겠습니다."
너무도 깔끔한 사과에 하시마 료는 기분이 묘해졌다.
"아, 전 스무 살입니다. 99년도 생이에요."
"전 97년도에 태어났습니다."
"아, 형님이시군요!"
"오, 오니사마……."
"음?"
"아닙니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 주십시오."
오니시마, 형님은 너무도 극존칭 이라서 일본인도 잘 쓰지 않는 단어였다.
"네, 료 형님!"
"……예, 그래요."
진호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니 하시마 료도 포기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친하지 않은 이상 이름을 부르면 실례가 되는 일본의 요비스테 문화를 모르는 진호로서는 의아할 뿐이지만 말이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다정하게 합니까, 질투 나게."
"아, 그게요."
아바타 대기실의 바로 옆.
모니터를 통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PD와 작가들의 표정이 오묘 하다.
"……우리 대결 프로그램 아니었나?"
"……맞죠."
"무명인 쟤들은 어떻게든 방송 분량을 뽑아내야 하기에 신경전을 벌이고. 쟤들처럼."
PD가 다른 모니터 속 서로 눈치를 보며 큰 소리로 전화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이게 그동안 각기 다른 아바타로 총 세 번의 국가 대항전을 하는 '도전, 세프의 아바타' 대기실의 모습이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서로 의식을 하면서도 의식하지 않는 그 긴장된 모습, 그게 이 프로그램의 오프닝이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화목해?"
"말이 통하니까? 잘생겼으니까? 그런데도 허당 같으니까?"
그들은 스태프 중 통역 능력자들을 통해 대충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가서 중재할까요?"
"……넌 저 훈훈한 모습을 깨고 싶냐?"
선남 셋이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완벽한 브로맨스다. PD로서 냉정 해야 하는데 절로 입꼬리가 움직 인다.
"그래, 이래야 선의의 대결이지. 내가 원하던 모습이 이거였어."
그 중심에는 진호가 있었다. PD는 본능적으로 오늘 촬영의 성공 여부가 진호에게 달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시청률 오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계속 가야지. 세프들에게 더 냉정하게 말하라고 주지시켜."
"예? 예, 알겠습니다."
조연출이 나가자 PD는 다시 모니터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그 힘든 상황에서도 이런 훈훈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