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2권 15화
지이잉!
유리 자동문을 경계로 천국과 지옥이 나눠지고 있었다.
'그래, 이게 천국이지.'
"여, 이진호."
"진호야, 기사 봤다. 크흐, 주모! 국뽕 한 사발!"
클럽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알아봐 주었다.
"하하, 안녕하세요."
탈의실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실내 코트를 예약하고는 테니스 클럽내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 센터에서도 몇몇 사람들이 알아보고 엄지를 치켜세워 줬다.
스트레칭으로 간단히 몸을 푼 그는 런닝 머신 위에서며 이어폰을 꽂았다.
파앙! 팡! 팡!
실내 테니스 코트엔 사람들이 넘쳐 났다. 사람들은 로비에서처럼 진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혼자 왔네? 무슨 일 있어?"
진호는 거의 구영재와 함께 테니스 클럽을 찾았다.
"대학 동아리 리그 때문에 연습 이나 할까 하고요."
마음 같아선 연맹 사정에 의해 연기된 9월 전국 대학 대항 테니스 대회에 출전하고 싶지만 등록된 선수가 아니었기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오, 출전해?"
"아뇨, 멤버에는 포함됐는데 1학년이라서 후보예요."
실력과 출전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어차피 즐기자고 한 테니스 였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
"아쉽겠네. 이 아저씨랑 한 게임 할까?"
진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가볍게 치려고요."
더위를 피해 왔는데 몸을 혹사시킬 수는 없었다.
경기를 하다 보면 승부욕이 발생 할 수밖에 없는데, 눈앞의 장년인은 테니스 경력만 25년으로 웬만한 프로선수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니, 이곳 테니스 클럽에서 운동 하시는 장년인들은 대부분 실력이 뛰어났다. 동호회뿐만 아니라 프로 선수들도 이용하는 클럽이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말을 건넨 50대 장년인은 아쉬워 했지만 진호는 애써 외면했다. 예약한 코트에 선 진호는 반대편 코트에 세워진 피칭 머신을 조작했다.
'좌우로는 조금만, 딜레이는 길게.'
기이이잉! 통!
공이 빠르게 쏘아지며 바운딩됐다.
두 발을 내디뎌 가볍게 라켓을 휘두르자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타앙!
공은 깔끔하게 반대편 코트 베이스 라인 좌측 깊숙한 곳에 꽂혔다. 진호는 다시 자리를 잡았고, 공이 정면에서 쏘아져 왔다.
타앙!
공은 방금 전 그 자리에 그대로 꽂혔다.
'오, 럭키.'
의도는 했어도 성공을 하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이후로 그는 그 자리를 노리며 공을 쳤다.
팡! 팡! 팡!
"……."
말을 잃은 진호는 잠시 라켓을 내렸다.
반대편 베이스 라인에 딱 공 하나 크기로 새겨진 희미한 흔적. 놀랍게도 공은 모두 원하는 자리에 꽂혔다.
"……컨트롤이 세밀해졌다?"
손끝과 팔목, 팔꿈치가 마치 정밀한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테니스의 황태자가 테니스에 대한 재능을 극도로 올려 주는 스킬이라고 해도 이건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천부적 재능이라지만, 기량이 이토록 급격하게 늘어날 수는 없었다. 베이스 라인이라는 선과 점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어떠한 가설 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불을 지배하는 자 때문인가?'
촉각으로 재료의 신선도를 파악 하는 예민한 손가락, 1밀리로 재료를 자르고 모든 재료를 균일하게 볶는 팔 전체의 컨트롤과 촉각. 굉장히 의심이 갔다.
'흠, 실험해 볼까?'
축제 이후 쏟아지는 과제 때문에 테니스를 제대로 치지 못했기에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진호는 다시 피칭 머신을 조작했다. 가볍게 운동해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버린 뒤였다.
탕! 탕! 탕!
경쾌한 소리가 울리는 실내 테니스 코트로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 섰다.
"오오! 여기가 실내 테니스 코트!"
"열기가 엄청 뜨겁네!"
요란한 등장에 눈살을 찌푸렸던 사람들이 약간 술렁였다. 카메라와 조명 기구, 촬영이었다.
놀라서 어색해하던 사람들은 낯 익은 이를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이야, 시설 좋네요. 이곳이 박현 선수가 자주 다니는 테니스 클럽입니까?"
갈색 피부에 다부진 체격과 찢어진 눈의 박현.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테니스 플레이어다. 그는 자신을 알아보고 손을 흔드는 클럽멤버 회원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연예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예. 회원제로 운영되는 클럽이니 만큼 행동이나 말에 주의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딱딱한 그의 말에 연예인들은 입을 다물었다.
한창 바쁜 사람을 PD가 삼고초려까지 해 가며 코치로 데려다 놓았지만 사람이 너무 꽉 막혔다. 걸음이 빨라진 연예인들을 보며 박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게 아닌데…….'
본 촬영처럼 웃기려 하지 말고 진지하게 임해 달라는 의도였는데, 말이 왜 그렇게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한 분은 잘하고 계시니까 다행이려나."
박현의 눈이 진지함으로 가득한 한 여성에게 향했다. 몇 달 전 '좋은 하루'로 음악 프로그램 2위를하며 존재감을 알린 이설아였다.
"운동 신경이 조금만 좋았어도……. 응?"
앞서 걷던 이설아가 갑자기 멈춰서 한쪽을 보았다. 이설아를 따라 고개를 돌린 박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같은 남자가 봐도 잘생긴 사내. 연예인들과 스태프들도 잠시 넋을 놓았다.
"……진호 씨?"
정신을 차린 PD가 조심히 물어 왔다.
"아는 사람이에요, 설아 씨?"
"네, PD님. 디올 옴므 전속 모델 인데, 제 좋은 하루 뮤직비디오에 출연하신 분이에요. 한국대 경영학과에 다니고요."
"아, 그분!"
몇 달 전 대체 누구냐며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이었다. PD는 눈을 빛내며 진호를 보았다. 이설아도 마치 한 마리의 백조를 보는 듯 우아하면서도 격정적인 몸놀림을 보이는 진호를 넋을 놓고 보았다.
그러다 무언가 이상함을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 아프나? 왜 계속 한쪽으로만…….'
"어머?"
이설아는 깜짝 놀랐다. 눈치 좋은 몇몇 연예인들과 PD는 눈을 비볐다. 박현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게…… 가능해?"
"Oh, my god!"
공이 오직한 지점에서만 바운드 되고 있었다. 너비는 사과정도. PD가 흥분해서 박현을 보았다.
"박현 선수도 저거 가능합니까?"
박현은 눈을 파르르 떨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푸하!"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온몸은 전율로 짜릿짜릿했다. 머신을 끈 진호는 몸을 이리저리 잡아당기며 숨을 골랐다.
"역시."
예상이 맞았다. 의식을 하고 치니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팔목이, 라켓을 쥐는 힘의 배분이 전보다 훨씬 더 정교해졌다. 마치 팔 속의 톱니바퀴가 두 배는 더늘어난 느낌이었다.
"와, 이렇게도 되는구나……."
스킬과 스킬의 시너지 효과는 경악할 정도였다.
'아니, 난 이미 이걸 알고 있었어.'
생각해 보면 내가 제일 잘 나가 스킬이 테니스 폼을 다듬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부족한 근력으로도 시속 200킬로미터가 넘는 서브를 넣을 수 있었다.
'이러면…….'
엔딩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기존에 습득한 스킬들과 시너지를 낼 스킬들을 떠올렸다.
"이번엔 코트 곳곳에 마킹을 해 볼까?"
그러면서 그동안 수없이 본 테니스 경기의 선수들과 가상으로 싸우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흥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처음은 올라운더 노박 조코비치가 좋겠지?'
"으흥, 매점에서 마커 칩을 팔던데……. 응?"
주변이 어수선했다. 고개를 돌린 진호는 깜짝 놀랐다.
'설아 씨?'
의외의 곳에서 의외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본 그녀는 몇 달 전보다 훨씬 더 예뻐진 것 같았다.
진호는 다급히 그녀를 향해 걸어 갔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잘 지냈어요?"
요사이 그녀가 바빠져 연락을 자주 못하다 보니 더욱 반가웠다.
"네. 덕분에 우리 동네 스포츠 테니스 편에 출연하게 됐는데, 오늘 여기서 박현 선수가 저희 초보자들을 위한 레슨을 시켜 준다고 해서요. 그걸 촬영하러 온 거예요."
우리 동네 스포츠, 지쳐 있는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는 스포츠를 소개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TV를 보지 않는 진호는 잘 모르지만 말이다.
"박현 선수!"
한국을 대표하는 플레이어라기에 진호도 경기 영상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한국의 노박 조코비치.'
올라운더, 무결점의 플레이어라불린 노박 조코비치의 스타일을 자신만의 것으로 승화시킨 선수다. 흥분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 경기 정말 아쉬웠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혹시 프로 선수십니까?"
"아뇨, 대학 동아리 선수예요."
"그 실력, 그 재능으로요?"
"즐기면서 하는 거죠."
"……프로에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지, 아깝다고 할지."
땀으로 샤워를 할 만큼 테니스에 푹 빠진 모습, 테니스를 얕보는 게 아니다. 말처럼 정말 즐기고 있을 뿐이다.
'이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 프로가 되어야 하는데.'
"반갑습니다, 박현입니다."
"이진호예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한참 동생입니다."
"그래. 궁금한 점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 대회 3일 전까지는 대부분 여기 클럽에 있으니까."
"넵!"
"그럼 난 촬영 때문에 먼저 가볼게."
그렇게 그가 떠나자 진호는 이설아를 보았다.
"그런데 촬영치고는 꽤 소박하네요?"
카메라 두 대에 조명 기구도 두 대뿐이다. 연예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다섯 명이나 되는데 말이다.
"아, 오늘 촬영은 본 녹화가 아니라 저희 같은 초보들이 발전하는 모습을 찍는 거예요. 한 회 분량으로 치면 한 2분?"
"아아, 그렇구나."
대답은 했지만 진호는 전혀 이해 못했다.
"진호 씨는요? 테니스는 언제부터 그렇게 잘 쳤어요?"
"이 정도는 연습만 하면 누구나 쳐요."
"난 안 되던데……."
입술을 삐죽 내미는 그녀의 모습이 참 귀여웠다.
"그러면 좀 가르쳐 드릴까요?"
"정말요?"
"지금 뭐가 가장 힘들어요?"
"그게……."
진호는 그녀의 고민을 열심히 들어 주었다.
'마커 칩은 좀 있다가 사자.'
어차피 해질녘까지 예약해 놓았기에 시간은 많았다.
* * *
탕! 탕탕!
작은 플라스틱 원판이 테니스볼에 맞고 살짝 옆으로 튕겨진다. 이어 날아온 테니스볼이 그 원판의 중앙을 때린다.
그게 계속 반복된다. 코트에 깔린 20개의 마커 칩 모두.
클럽사람들은 촬영도 잊은 채 그 광경에 흥분했다.
박현과 연예인들의 레슨을 지켜 볼 의무가 있는 PD도 중간중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크, 진짜 미쳤네. 저런 걸 방송에 내보내야 하는데……."
옛날처럼 함부로 찍어 내보냈다 가는 큰일 난다.
"아마, 힘들 겁니다. 국내외 패션 계에서 가장 핫한 신인 모델이라 페이가 높은데다 방송 출연을 꽤 꺼리는 타입입니다."
조연출은 한국대 축제 때의 일화를 말해 주었다.
"끄응……."
출연이 물건너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연예인이 되기 위해 모델이 되는 이들과는 다른 존재였다.
"일단 말이라도 건네 볼까요? 저 얼굴이면 몇 초만 나와도 순간 시청률이……."
시청률. PD로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PD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박현에 의해 테니스가 많이 유명 해졌다고 하지만, 테니스는 여전히 비주류 스포츠고 시청률은 저번 테마의 스포츠보다 낮았다.
대회 때문에 바쁜 박현이 우리 동네 스포츠에 출연한 이유도 테니스를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한 명의 스타를 통해 유명해진 피겨 스케이팅과 수영처럼 말이다.
"음……. 설아 씨한테 20초 단독으로 준다고 하면서 저 진호란 청년과 따로 연습할 수 있냐고 꼬드겨 봐."
"그렇게나요?"
이설아처럼 조금 뜬 신인에게 공중파 예능 단독 샷 20초는 엄청난 혜택이다.
"아까 둘이 꽁냥꽁냥한 거 못 봤어? 일단 한번 출연시켜서 여지를 만들자는 거지."
"먼저 물어보기만 할게요. 20초는 나중에. 이번 편 시청률 유지하는 거 설아 씨 때문이잖습니까."
그녀의 육감적이면서도 늘씬한 몸매와 짧은 테니스 웨어가 제법 이슈를 몰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 그렇게 해. 그럼 일단 쉬는……. 응? 잠깐."
PD는 박현이 넘기는 공을 받아 치는 이설아를 보며 의아해했다.
"설아 씨가 저렇게 잘 쳤나?"
"에이, 그 둔한 운동 신경 아시면…….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