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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39화 (39/424)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2권 14화

누군가는 금세 표정을 수습하고 신중한 눈으로 옷을 살폈다.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면서도 자신 때문에 감정이 변하는 사람을 보자 진호는 몸이 붕 뜨고 아랫배가 찌릿찌릿해졌다.

재준이와 인터넷 방송을 했을 때 느낀 그 감각이었다.

'으음, 기억나지 않아. 골든 빅 벨 때와 비슷하지만 달라.'

메슬로프가 말한 인간의 다섯 가지 욕구 중 존경의 욕구. 대체 이 감정을 무어라 정의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그러나 진호는 표정을 무너트리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옷을 돋보여야 하는 모델이었다. 가볍지만 무거우면서도 우아한 걸음으로 런웨이 끝까지 걸어가 포즈를 1초간 잡고 턴을 했다. 엄지를 치켜드는 재준의 모습이 그의 눈가를 스쳤다.

'중간까지는 일단 성공.'

나올 때만큼 중요한 게 복귀하는 길이다. 관객은 그쪽에도 있으니 말이다.

백스테이지까지는 연출가가 요구한 감정을 뿜어내며 걷다가 백스테이지에 몸이 가려진 순간 진호는 한숨을 내뱉었다.

'성공했다.'

작은 뿌듯함이 밀려왔다. 숨을 길게 몰아쉰 진호는 백스테이지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날듯이 달렸다.

웅성웅성. 시끌시끌.

"여기 팬티 찢어졌어!"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겁니다!"

진호는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때문에 전쟁 통이 따로 없는 백스테이지를 향해 크게 외쳤다.

"비켜요! 지나갑니다!"

모델들과 스태프들이 황급히 비켜서고, 달려오며 상의를 찢어 버릴 듯 벗은 그는 얼른 바지까지 내렸다.

"여기 다음 옷이요!"

"헤어 흐트러졌습니다! 고칠게요!"

"네!"

치익!

"끝! 메이크업 고칠 부분 없습니다! 가욧!"

스프레이에 헤어가 다시 고정되는 사이 옷을 모두 갈아입은 진호가 다시 날듯 백스테이지의 계단을 향해 뛰었다.

"지나갈게요!"

탁! 걸음이 멈추기까지 1분. 말없이 엄지를 치켜드는 팀 존스와 베르됨을 향해 진호는 씩 웃어 주었다.

'재밌다!'

어느 한 부분을 꼽을 수 없을 만큼 재밌어서 얼굴이 절로 달아올랐다.

'아, 진정. 진정.'

무슨 표정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대로 나갔다가는 큰일이 일어난다. 믿고 써 준 피에트로와 팀 존스에게 피해를 끼칠 순 없었다. 진호의 표정은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그런 그를 힐끔 본 모델들은 안 들리도록 혀를 찼다. 부족한 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욕을 퍼부어 줄 텐데, 진호에게선 티끌만 한결점 조차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패배였다.

"진호! 고!"

"네!"

차례가 되자 진호는 다시 런웨이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오프닝의 모델은 대체 누구지?"

관객석이 조금 시끄럽다.

디올 하우스의 아카이브를 탐구 한 디올의 리얼리티와 판타지, 여성의 꾸띄르 헤리티지를 예술적으로 강조한 팀 존스의 디올 옴므 데뷔작인 2019S/S 디올 옴므 컬렉션뿐만 아니라 등장한 순간 옷과 얼굴 모두를 한눈에 들어오게 만들었던 동양의 모델 진호 때문이었다.

"아, 그가 팀 존스의 뮤즈인가?"

"확실히 뮤즈라 불릴 만하군."

동양인을 거의 세우지 않는 디올 옴므가, 그것도 피에트로 베타리 혁신의 아이콘인 팀 존스의 디올 옴므 데뷔인 무대에서 진호를 메 인 모델으로 세운 이유를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이봐, 페터슨. 좀 위험한 거 아냐?"

"흥, 동양인 따위."

트와일라잇으로 톱스타 반열에 오른 로버트 페터슨, 빌보드의 리타오라, 빅토리아 베컴 등 수많은 톱스타들이 진호를 주목하기 시작 했다.

무대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팀 존스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 뮤즈다!'

* * *

"다 됐어요, 가요!"

"마지막까지 힘내요!"

'벌써 마지막이구나.'

왠지 아쉬웠다.

웃는 사람, 살까 라고 옆 사람한테 말하는 사람, 쏟아지던 플래시 세례.

2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평생 동안 기억에 남을 경험을 했다. 그래서인지 더 아쉬웠다. 저벅. 저벅.

당당하면서도 우아하게, 시니컬하면서도 거만하게.

진호는 끝까지 본분을 잃지 않고 런웨이를 돌아 백스테이지를 밟았다.

그러자 피날레 음악이 울려 퍼졌다.

"후우."

"수고했어요, 진. 그리고 고마워요."

"팀……."

"자! 그럼 나가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요!"

지금 나가면 이 순간이 정말 끝날 것 같아서 진호는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가야 했다.

'그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지.'

진호는 우르르 몰려나가는 모델 들의 끝에서서 다시 걸을 수 있을까 싶은 런웨이를 밟았다.

그 순간이었다.

짝짝짝짝짝짝!

휘익! 휘이익!

진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든 관객들이 일어서서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었다. 누가 봐도 진호 자신을 향한 환호였다.

'……희열.'

번뜩 떠오른 하나의 단어가 진호의 온몸을 지배했다.

'그래, 희열이구나.'

"이거였구나."

대체 무엇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감정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지난 8개월 동안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골든 빅 벨에서 몰려들었던 반 아이들, 언제나 다가오던 동기와 선배들, 포토그래퍼의 흥분한 외침들, 생애 첫 사인, 무심코 넘겼던 SNS의 댓글들.

'이런 재미도 있구나!'

스윽!

옆을 보니 글썽이는 눈망울을 한 팀 존스가 손을 잡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저도요.'

둘은 동시에 팔을 높이 들었다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휘이이이익!

짝짝짝짝짝짝!

진호의 입가가 환한 미소를 그렸고, 그 순간 그의 외모가 폭발하듯 빛났다.

그리고 구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 보던 다미앙은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5.

잘생긴 외모들 중에서도 유독 빛난 디올 옴므의 뮤즈, 이진호.

팀 존스가 굳이 동양인 모델을 메인에 세운 이유는?

디올 옴므, 사고를 치다.

파리가 시끄럽다. 아니, 패션계가 시끄러웠다.

메인을 동양인 모델로 세운 탓이었다.

여성 의류는 종종 중국 시장을 의식해 동양인 모델을 메인으로 세우기도 하지만 남성 의류는 아니었다.

그 몸과 외모의 레벨이 서양과 비교해 너무도 차이 났기 때문이었다. 특히 골격이 그랬다.

이런 편견과 차별을 이겨 내고 메인 모델에 선 진호에게 관심이 쏟아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현장 구매율이 엄청났다.

"아쉽군요. 안 가면 안 되나요?"

사를 드골 국제공항. 팀이 진호의 손을 잡고 있었다. 피에트로 베타리까지 나와 배웅을 해 주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 이죠."

"인터뷰 때문에 도망치는 게 아니라요?"

수많은 잡지, 신문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세계적인 모델 에이전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들켰나요?"

셋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안건지 찾아온 기자들이 셔터를 눌렸지만 셋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다음엔 두 분이서 놀러 오세요. 아직 먹어 보지 못한 음식이 수두 룩하니까요."

"하하핫! 네, 기대하겠습니다."

"꼭! 꼭 가겠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에게 이별을 고했다.

출국 게이트로 향하는 진호에게 재준이 따라붙었다.

"히야, 정말 알찬 여행이었어. 그렇지?"

"이윤주 누나들을 만난 게 최고 였지, 쇼가 끝난 후 대한의 자랑, 역시 내 동생이라며 디올 디너파티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문자 폭탄을 날렸다.

진호는 그들과 인연을 맺은 건 파리에 와서 한 일 중 두 번째로 잘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야, 근데 김해인이라고 아냐?"

"누군데?"

"남자 배우. 옴므에 초청받아서 왔대."

"그런데?"

"그냥 그렇다고. 애써 초청받아왔는데 이쪽 신문에는 한자락 언급도 안 됐잖아."

"싱겁기는……. 그보다 왜 테니스 대회는 그렇게 빨리 끝난 거지? 조금만 빨리 올걸!"

그들이 파리에 도착했을 땐 프랑스 오픈이 끝난 뒤였다.

"그러게. 왜 늦게 왔냐, 이 게으른 놈아."

"그게 나 때문이냐! 과제 때문이지! 아오!"

둘은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출국 게이트를 넘었다.

다미앙이 웃으며 뒤를 따랐다.

* * *

"후아! 드디어 한국이군요!"

비즈니스 클래스라고 해도 장시간의 비행은 사람을 피곤하게 했다. 다미앙은 살았다는 듯 기지개를 켰지만 진호와 재준은 아니었다.

"우린 파리에서 대체 뭘 한 걸까?"

"……."

비행기에 오르고 나서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에어프랑스 승무원들이 준 전화번호를 말이다. 파리까지 갔는데 프랑스 오픈을 본 것도 아니고, 여자들과 썸씽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시꺼먼 남자 둘이서 일과 관광만 하다가 돌아왔다. 생애 첫 해외여행에서 말이다. 지금 둘의 심정은 우울 그 자체였다.

다미앙은 그런 둘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참 순수한 한 쌍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저나…… 자신을 드러냄으로 써의 희열과 재미를 알게 되었는 데도 이렇게 미지근하다니.'

비행기를 같이 타고 오는 내내 진호는 계약에 관련된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미앙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어필하지 못해서 이런 건가 싶었다.

'이런 타입은 처음이다.'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시길 바랍니다."

다미앙은 잠시 물러나 다시 분석 하기로 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드르르륵!

캐리어 끄는 소리가 멀어지자 재준이 진호의 옆구리를 툭 쳤다.

"왜 계약을 안 한 거야? 너 패션 쇼에서 엄청 재밌어했잖아."

그런 식의 만족스런 웃음을 처음 봐서 그런지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호는 다미앙의 등을 보며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그런 재미도 있으면 이런 재미도 있는 법이니까."

'다미앙 씨가 개인 자격의 캐스팅 디렉터나 매니저라면 모를까, 에이전시 소속이면 뭐…….'

세계적이라는 것만 다를 뿐 여타 기획사나 에이전시와 똑같았다.

"한 가지 재미만 쫓기에는 우린 너무 젊잖아?"

"……미친놈. 너 그러다 훅 가, 인마."

"이 외모가 흑 가겠냐? 역변할 나이도 지났는데?"

맞는 말이라 재준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둘은 그렇게 입국 게이트를 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둘은 놀라고 말았다.

차라라라!

"이진호 씨! 디올 옴므의 메인모델이 되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이진호 씨! 여기 좀 봐주세요!"

겨우 세 명 정도였지만 기자가 나와 있었다.

"……너 한국에서도 유명해졌나 보다."

"그러게……."

진호는 얼떨떨해하며 기자들에게 다가갔다.

* * *

그렇지 않아도 더웠던 날씨는 7 월이 되자 정점을 찍게 되었다.

띠링! 수우우우!

띠리링!

"아, 엄마!"

"전기세 나가!"

"내가 낼게!"

"아직 자식한테 돈 받을 나이 아니다."

"이러다 죽어! 죽는다니까?"

밖의 온도가 34도를 넘어섰다.

"그렇게 죽겠으면 도서관이나 가! 집에만 있지 말고!"

"언제는 쉬엄쉬엄 하라면서!"

패션쇼에서 메인 모델에서고 기자들과 인터뷰도 했지만 진호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아들일 뿐이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시간당 대기업 과장급 월급을 준다고 해도 말이다.

"시끄러워! 더워!"

"……입습니다, 어마마마!"

쿵! 문을 닫고 들어온 진호는 방안에 있는 모든 선풍기를 켰다.

"와, 틀어도 덥네."

선풍기 두 대를 틀었는데도 더웠다.

순간 눈앞에 시원한 계곡이 아른 거렸지만,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때문이었다.

자신은 아들에게 방해될까 봐 따라가지 못했는데 재준은 무려 비즈니스 클래스까지 태워 파리에서 놀았다는 것에 어머니 나진희가 굉장히 삐져 있는 상태였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파리는 예뻤니? 재준이랑 즐거웠니?'

같은 말들로 압박을 해 오고 있었다.

재준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훌쩍 피서를 떠났다가는 식탁에서 밥그릇이 치워지는 수가 있었다.

진호는 돈이 있어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이 이런 건가 싶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지!'

후회해 봤자 버스는 떠나간 뒤였다.

"하아, 8월까지 언제 기다리냐?"

아버지 이형만의 휴가 날짜가 8 월이었다.

"안 되겠다."

진호는 옷을 차려입고 일어섰다. 어디든 집보단 나을 것 같았다.

"나갔다 올게요!"

"어디 가게!"

"클럽이요!"

빵빵한 에어컨 바람을 마음껏 쐬어도 눈치조차 받지 않는 곳, 테니스 클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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