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2권 13화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소문이 무성하던 귀염둥이를 봐서 이 누나도 기쁜데, 뭘. 하지만 한 번뿐이다?"
이윤주는 참석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이번에 순산하신 거 축하드려요. 딱 두 분의 장점만 옮겨 놓았던데요?"
"히야! 너 싸가지가 됐구나? 그런데 아줌마 심장 떨리게 쳐다보는 너는 누구니?"
"안녕하십니까! 스트리머 박재준 입니다! 사인 좀 부탁드릴게요!"
"제 친구예요. 이번에 같이 여행 왔어요. 그리고 저도 사인 좀!"
"스트리머! 어머어머, 나 출연하면 출연료 주는 거야?"
"연락처 주시면 콘텐츠 기획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오호홍! 패기 있다, 얘! 난 너희 같은 애들이 참 좋더라."
"감사합니다!"
진호도 그녀가 호탕해서 절로 호감이 갔다. 그렇게 그들은 사인도 받고 서로 같이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진호야, 누나가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하이패션 모델이면서 이렇게 먹어도 돼? 몸매, 그거 한 순간이다?"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만날 이렇게 처먹는데 체중계에 올라가도 딱 음식 무게만 더 나가요. 절대 안 쪄요, 쟤."
"와후, 신의 축복을 받았구나?"
뜨끔!
"신의 축복……. 네, 그런 것 같네요."
진호는 환하게 웃었고, 이윤주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 팀이 홀린 이유가 있었네. 아."
그녀는 이쪽을 바라보는 일행들을 향해 오라고 손짓했다.
그렇게 다가온 일행들의 면모는 대단했다.
김혜진, 장윤아, 김승현 그 외 유명 모델들에 대배우 김혜교와 그의 남편 손중기도 있었다.
진호와 재준은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그들도 진호와 재준의 식사량에 입을 벌렸다.
"……아무도 안 믿겠지?"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되지."
출국한다는 기사 한 줄 없이 찾아온 이들이었다. 김해교와 손중기는 여행 중 잠시 참석한 것이라고 했다.
사는 세계가 다른 이들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작은 손짓 하나, 옷매 무새를 고치는 모습 하나하나가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왠지 부럽기도 하고, 그렇게 되어 보고 싶기도 했다.
아주 작은 불꽃이 진호의 가슴속에 생겨났다. 그는 오늘 그들과 교환한 전화번호와 같이 찍은 사진들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렇게 파리에서의 첫날이 저물었다.
다음 날, 진호와 재준은 아침 일찍 일어나 파리 탐방에 나섰다.
에펠탑, 몽마르트 언덕, 개선문 등등 볼거리가 너무 많았다. 먹거리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체크! 너무 비싸요. 깎아주세요. 프랑스어로 어떻게 되나요?"
열이 섞인 한숨을 내뱉은 진호는 마들렌을 파는 중년 여성을 향해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채팅창에는 ㅋㅋㅋ가 도배되었다.
"너무 비쌉니다, 마담. 조금만 깎아주실 수 있을까요?"
"……동양인이 내 심장을 뛰게 할 줄은 몰랐네요. 좋아요. 이렇게 많이 샀으니 깎아 드리겠어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후후, 애인이 질투하지 않겠어요?"
"쿨럭! 마, 많이 파세요."
마들렌이 가득 든 봉지를 받아든 진호는 재빨리 자리를 떴고, 카메라를 든 재준이 허겁지겁 따라 왔다.
"왜? 뭔데? 아줌마가 유혹했어?"
"모르는 게 좋아."
어느 프랑스어 능력자가 기계음과 함께 후원금이 쏘았다.
"헉! 우악! 진호는 내가 지킨다 님, 만 원 후원 감사합니다!"
진호도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토닥토닥.
┗뭐야, 뭔데? 같이 압시다.
위로해 주는 사람, 궁금해하는 사람, 웃는 사람. 핸드폰 작은 화면 속에 수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진호와 재준의 행동에 울고 웃었다.
'재밌네.'
방송뿐만이 아니라 관심을 받는 다는 게 왜인지 재밌었다. SNS에 달린 수백 개 댓글로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물론 처음엔 신기하고 즐거웠다. 하지만 이 정도로 재밌지는 않았다.
'왜 일까?'
그런 그에게 어제의 경험이 떠올랐다.
'정상에 선 연예인, 그들도 이렇게 사랑과 관심을 받았기에 그렇게 된 건가? 연예인이라는 게 그렇게 매력적인 직업인가?'
진호는 생각에 잠겼다.
"뭐 해? 먹자."
"응? 응."
둘은 거리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서 마들렌을 한입 베어 물었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어떻게 거리에서 파는 게 우리나라 프랜차이즈보다 훨씬 맛있을 수가 있지?"
"빵의 고장은 달라도 다르구나. 흠, 그냥 여기서 살까?"
진호의 그 말에 채팅창이 시끄러워졌다.
농담이라고 말한 그는 다시 빵을 먹는데 집중하기 시작했고, 재준 도 질세라 빵을 크게 베어 물었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빵 들을 보며 놀랐다가,
"어, 저기 케밥 판다."
"그럼 가야지!"
"오케이!"
그들의 무한한 식성에 경악했다.
* * *
여행 & 먹방은 알차고 재밌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떠나기 전 관광 루트를 치밀하게 짠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이틀 동안 관광 겸 방송을 한 진호는 파리를 찾은 목적을 위해 움직였다.
"당당하고, 우아하게! 시니컬하면서도 거만하게! 화내지 마!"
보안이 철저한 실내 스튜디오. 수 많은 디렉터들이 화를 내듯 외치고, 수많은 남자 모델들이 그들의 주문에 맞춰 워킹을 한다.
런웨이 바깥에 선 팀 존스는 무감정한 눈빛으로 모델을 살피며, 옆에 선 스태프들에게 수정할 점을 이야기했다.
그 뜨거우면서도 서늘한 공기에 살짝 놀랐던 진호는 마음을 다스리며 팀 존스에게 다가갔다.
"팀."
"무슨 일……."
그를 보자마자 석고상처럼 굳어 버린 팀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약속을 지키려고 왔어요."
"진-!"
리허설은 잠시 중단되었다.
"대체 언제 온 겁니까? 연락은 왜 안 했고요? 그리고 약속을 지키려고 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 가요?"
다시 만난 팀 존스는 여전히 수다쟁이였다.
"그 말 그대로예요. 당신이 만든 옷을 입고 당신의 쇼에서 걸어도 손가락질 받지 않을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게 됐거든요."
진호는 한국에서 벌인 일과 그 결과를 말해 주었다.
"……피에트로 이 교활한 인간 같으니! 메인의 자리를 빼놓으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하핫."
"진도 다무십시오! 당신도 잘한 거 없어요!"
"……죄송해요. 놀래 주고 싶었어요. 당신이 반한 뮤즈가 이런 존재 다라는 걸 말이죠."
"후우, 정말 당신은 쓸데없이 성실하군요. 그래서 내 쇼에서기 위해서 왔다는 건가요?"
진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네."
팀 존스의 표정도 굳었다.
"쉽지 않을 겁니다. 런웨이 백스테이지는 전장이니까요. 그리고 저의 재시작을 알리는 무대인 만큼 준비되지 않은 모델은 쇼에 올리지 않을 겁니다."
보통하루 전 혹은 당일에 하는 리허설을 며칠 앞당겨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냉기가 심장을 찔렀다. 진호는 이를 악물었다.
"저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오지 않았겠죠."
축제가 끝난 후 진호는 거의 매일처럼 미영과 여러 트레이너에게 집중 훈련을 받았다.
"딱 다섯 번. 그 이상 실수하면 아무리 진이라고 해도 퇴출시킬 겁니다. 공적인 일인 이상 나도 냉정할 수밖에 없어요."
'열흘만 빨리 왔어도!'
진호는 걱정말라는 듯 웃었다.
"두 번이면 충분해요. 어디로 가면 되나요?"
"……베르됭!"
진호는 흑인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백스테이지에 들어간 순간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찌릿찌릿!
'역적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호의 어린 시선이 하나도 없다.
180센티미터 후반대 장신의 사내들이 온몸으로 적의와 살의를 뿜어내고 있었다.
거기다 그들의 외모 또한 대단해서 절로 마음이 꺾일 것 같았다. 잘 빠진 근육질 몸매에 작은 얼굴을 아름답게 채운 이목구비. 인터넷으로 찾아봤던 한국 남자 모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이 정도에 물러설 순 없어! 각오했잖아!'
이미 누군가가 섰어야 할 자리를 뺏었다. 이 정도 압박에 물러설 것이었다면 파리에 오지도 않았다. 아니, 모델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당당하고 의연해져야 해! 내가 자리를 뺏은 누군가 때문이라도!'
"제 자리는 어딥니까?"
"……이쪽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진호의 모습에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낸 흑인 스태프 베르됭이 안내한 곳은 의상들로 꽉 찬 백스테이지에서 유일하게 비어 있는 2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이걸 입으십시오."
손바닥만한 천이 전부인 T팬티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듯 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진호는 거침없이 옷을 벗었다. 처음 강습을 받을 땐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음."
"으음."
모델 그 자신들보다 선이 뚜렷한 근육질의 잘 빠진 몸매. 모델과 스태프들은 그가 최소한 몸을 대주고 얻은 낙하산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인정할 수 있었다.
"흠, 최소한 수선은 안 해도 되겠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번 입어 보세요."
드르르! 옷이 걸린 행거가 날듯이 달려왔다.
진호는 헬퍼의 도움을 받아 옷을 빠르게 입었다.
"두 달 전에 잰 것과 단 1밀리의 오차도 없다니! 울랄라!"
베르됭의 경악한 외침이 백스테이지를 쩌렁쩌렁 울렸다.
진호는 동요하는 모델들을 외면 했다.
"제 순서는 어떻게 되죠?"
"오프닝, 중간, 피날레 바로 전입니다. 동선은 이렇게 연출됩니다."
"정말 메인의 자리군요."
피날레는 모든 모델이 한꺼번에 워킹하는 걸 말한다.
베르됭이 보여준 차트 커버를 보자 진호는 부담감이 밀려왔다. 쇼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인 오프닝과 피날레를 맡게 됐다. 그러나 도망칠 순 없었다.
'가자!'
"다 외웠습니다."
"호오, 자신감이 대단하군요. 알겠습니다. 시작해 보죠."
짝!
"모두 대기! 뛰어!"
우르르르! 20명이 넘는 남자 모델들이 백스테이지의 계단을 향해 뛰었다. 그 선두에는 진호가 달리고 있었다.
다시 의미심장하게 웃은 베르됭이 헤드셋 마이크를 잡고 외쳤다.
"뮤직 큐! 쇼 시작! 모델 기다려!"
빠른 비트가 터지자 진호는 심장이 뜨거워지고 숨소리가 귀에서 들렸다. 그러나 표정은 어느새 당당하고 우아하며 시니컬하면서도 거만하게 바뀌어 있었다.
'난 할 수 있다.'
가까이서 지켜보던 스태프의 표정이 변했다.
"기다려. 기다려. 기다려……. 오프닝 고!"
"Qui(네)!"
'난 할 수 있어!'
숨을 크게 내쉰 진호가 힘차게 런웨이에 발을 내디뎠다.
검은 벽을 끼고 90도로 꺾자 내려쬐는 햇빛에 더욱 빛나는 백색의 런웨이와 꽃으로 만든 커다란 사람 조형물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중간 리허설이 끝난 지 벌써 3 일. 지금 이곳은 야외에 지어진 디올 옴므 2019 S/S의 패션쇼장이었다.
'엄청 많네.'
…… 촤라라라라!
오프닝을 동양인이 장식해서 그런지 한 박자 늦게 터진 카메라 플래시들과 커지는 관객들의 눈.
비트 소리가 아득히 멀어지고, 중간 리허설 때처럼 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황한 얼굴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 기자와 관객들의 모습이 한눈에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