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2권 11화
그는 축제 이후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찾아와 작은 선물과 함께에 이전시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속된 에이전시의 장단점뿐만 아니라 다른 에이전시와 캐스팅 디렉터의 장단점, 패션계의 숨은 이야기 등등을 말해 주었는데 너무도 유익한 정보라서 진호는 그의 방문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시아 담당이라면서 파리에 가시는 건가요?"
"전 세계의 패션 피플들이 모이기 때문이죠. 그중에는 재능이 뛰어나지만 여러 사정에 의해 묻혀 있는 이들도 많답니다. 그보다 정말로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으신 겁니까?"
진호는 단호히 거부했다.
"친구와의 첫 해외여행이다 보니 깨지고 부딪쳐 가며 추억을 쌓고 싶습니다."
"그럼요! 원래 여행은 현지에서 부딪치는 게 맛이죠!"
"흠, 파리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동네가 아닙니다만."
훗, 웃은 재준이 진호를 가리켰다.
"얘 고등학교 때 선택한 제2 외국어가 프랑스어입니다. 여차하면 얘 등 밀고 튀면 돼요."
"쿨럭!"
"……그래, 우리 우정의 깊이를 깨닫게 해 줘서 아주 고오맙다."
"에이, 뭘 그런 거 가지고……. 어허, 그러는 거 아니야. 주먹은 넣어 둬야지? 씁, 안돼."
"그냥 뒈져."
둘은 서로의 팔을 잡은 채 투닥 거렸고, 다미앙은 눈을 빛냈다.
'원래 찬란히 빛나는 보석 옆에는 다른 보석이 없는 법인데.'
재준도 커머셜 모델로 성공할 자질이 있었다.
"아, 들어갈 시간이 됐군요. 파리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네, 파리에서 뵙겠습니다."
지난 노력 때문에 첫날의 무례했던 첫인상을 많이 희석시키게 된 진호는 멀어지는 다미앙을 바라보다가 재준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재준의 캐리어 위에 올려진 사각 가방이었다.
"그건 뭐냐?"
"방송 장비. 이번에 스트리머 데뷔하려고."
"벌써 시작하게?"
"지난 몇 달간 쉬지 않고 알바했더니 엄마가 기특하다고 컴퓨터 바꿔줬어. 사양이 아주-."
"오, 축하한다. 그런데 왜 지금이야?"
"파리잖아! 프랑스! 거기다 후발 주자로서 다른 애들처럼 골방에서 시작할 순 없지. 그래서 그런데……."
뒷말이 무엇인지 깨달은 진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너 돕는 건데 거부하겠냐?"
"사랑한다!"
"거부한다! 오지 마! 혀 깨물 거다!"
"흐흐흐, 이리 와!"
"싫다니……. 악! 으악!"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훈훈한 광경을 보이던 둘은 이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한번 켜 봐. 어떻게 하는 건지 보자."
"그, 그럴까?"
재준이 연 가방 속에는 진호가 보지 못한 장비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제대론데?"
"내가 여러 BJ, 스트리머 방송 찾아다니면서 배운 것들이다. 잘나고 예쁜데 시청자 수 안 나오는 분들이 많거든……."
재준의 눈에 미약한 공포와 머뭇거림이 생겨났다.
진호는 모른 척 화제를 돌렸다.
"그래, 수고했다. 안 켜?"
"아, 그래야지."
재준은 곧 신이 나 여러가지를 조작하더니 방송을 켰다.
"오오오."
"훗, 내가 이 정도……."
"야, 사람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신입 스……
-에이, 남자네.
불끈뿅뿅 님이 퇴장하셨습니다.
"……그런데 너 춤추는 방송 한 다고 하지 않았어?"
"……너무 흔해서 콘셉트를 바꿨다. 한 가지 콘텐츠 가지고는 성공 하기 힘드니까 여러가지를 해 보면서 맞는 콘셉트를 찾을 거야."
그들은 그렇게 탑승 시간이 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시청자는 들어왔다 나갔다가를 반복했다.
* * *
화려하게 꾸며진 사무실 안, 안경을 낀 지적인 이미지의 이탈리아 출신 미중년이 서류를 보고 있었다.
"옴므의 뮤즈가 방금 전 비행기에 탑승했다는 보고입니다."
"흠."
안경을 벗으며 눈을 어루만진 그, 크리스찬 디올이라는 거대 명품 브랜드의 CEO인 피에트로가 비서를 보았다.
"그 외에 내가 알아야 할 정보는?"
"HU 에이전시 소속의 캐스팅 디렉터 다미앙 토마소가 뮤즈와 접촉했다고 합니다."
"다미앙……. 그 젊은 사냥꾼이 내 뮤즈를 노리는 건가?"
그는 몇 년 사이 패션계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캐스팅 디렉터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에이전시를 나와 개인적으로 활동해도 성공할 만큼 그의 손에 발굴되어 명성을 얻은 아시아계 모델들이 제법 있었다.
"상황이 재밌게 됐군. 다른 건?"
'그자라면 다른 디렉터들의 접근을 막으려 수를 쓰고 있겠지.'
그렇다면 오히려 안심이었다.
"여기…… 이것을 봐 주십시오. 늦게 발견해서 죄송합니다."
"흠?"
의아해하며 비서가 보여 주는 이탈리아어 자막이 깔린 영상에 피에트로 CEO의 표정이 굳었다. 영상의 주인공은 진호였고, 조연은 다미앙 토마소였다.
"언제 찍힌 영상이지?"
"5월 9일에 대학 축제에서 찍힌 영상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패션계가 다 알아 버렸다는 소리다.
"……후우. 안젤라, 이 장난꾸러기 아가씨 같으니."
미영이 일부러 전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진호의 친구까지에어프랑스의 비즈니스 클래스에 태워 보낸 것을 보면 악한 마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고개를 저은 피에트로 CEO는 눈빛을 서늘하게 가라앉혔다.
"호텔을 옮기고, 자네가 직접 가서 데려오도록 해. 영상을 봤다면 이유를 알고 있을 테니까 반론은 듣지 않겠어."
"하지만 저희의 움직임이 그들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반론은 듣지 않겠다고 했다만?"
굳은 얼굴의 비서가 물러나자 피에트로 CEO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렇게 가치를 드러내 버리면 어떡합니까, 내 젊은 친구여."
어느 소아외과에서의 공연으로 인성의 종지부를 찍었다. 진호가 커팅이 끝난 300캐럿 다이아란 사실을 패션계 전부가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지켜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신의 가득한 발언에 미소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손을 흔들며 빠져나가는 승무원들을 보며 둘은 주먹을 부딪쳤다.
"캬! 내가 외국인에게 먹히는 얼굴이구나!"
"원래 미인은 만국 공통어야."
장시간 비행 때문에 생긴 피로가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함박 미소를 지으며 입국 게이트를 넘은 둘은 표정을 굳혀야 했다. 험상궂은 사람들을 대동한 여성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무슈 리. 피에트로 베타리 CEO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분의 비서인 오드리 끌레르 라고 합니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영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아, Bonjour enchantee. madem oiselle Claire."
만나서 반갑다는 프랑스어 인사였다.
"이쪽은 제 친구인 재준 박입니다."
진호의 능숙한 프랑스어에 비서는 살짝 놀랐다.
비서와 재준도 인사를 나눴다.
"그럼 호텔로 가실까요? 밖에 차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너무 과분한 대우로군요."
"당신은 뮤즈니까요."
싱긋 웃은 그녀는 발을 떼었고, 진호와 재준은 경호원들에게 둘러 싸여 공항을 빠져나가야 했다.
"야, 근데 무슨 일이냐?"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재준에게 진호는 사정을 설명했다.
"올, 너 엄청 인정받는다?"
"그러게……."
'아직 이런 대우를 받을 정도는 아닐 텐데 말이야.'
세계적인 패션쇼에 선 것도 아니고,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작은 명성을 얻은 것뿐이다.
거기다 이쪽을 아쉽다는 듯 보고 있는 남녀들과 옅게 웃으며 돌아서는 다미앙.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파리에 있을 동안 묵게 될 호텔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대단한 곳이었다.
* * *
시작은 어떤 오지랖 넓은 이의 나눔 때문이었다.
님들, 나 방금 은혜로운 인방을 발견하게 됐음. 신입인데, 얘들임. 좌표 찍는다.
┗뭐 이런 은혜로운 사람들이…….
┗지금 간다.
┗갔다 왔는데, 아직 방송 안 함.
타이밍이 맞지 않아 관심이 시들 해질 때쯤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진호 오빠?
┗헐, 맞네. 진호 오빠 스트리머 데뷔하는 건가?
┗진호? 우리 진호 지금 프랑스 갔을 건데?
┗신입도 친구랑 프랑스 간다고 했음.
┗진호야─!
인터넷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 * *
"…….여긴 하룻밤에 얼마나 할까?"
"내 이틀 치 일당?"
"……썩을 놈."
영화나 인터넷에서만 보던 커다랗고 화려한 스위트룸이었다. 방이 무려 세 개였고, 술이 가득한 미니 바도 있었다.
재준이 방송 장비를 꺼낼 때, 진호는 비서를 보았다.
"여긴 너무 과합니다."
아직 그의 금전 감각은 망가지지 않았다.
비서는 살풋 웃었다.
"전년 대비 매출 5퍼센트 상승, 문의 60퍼센트 상승."
동월이 아니라 전년 매출보다 5 퍼센트나 상승했다. 이제 겨우 6 월인데도 말이다.
"머무시는 동안 마음껏 즐기시면 됩니다. 그리고 CEO님께서 저녁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응하시겠습니까?"
"……당연히. 피에트로 CEO를 한번 뵙고 싶었으니까요."
"슈트는 저희 쪽에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녁까지 편히 쉬십시오."
비서와 경호원들이 나가고,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서던 진호는 굳어 있는 재준을 보곤 의아해했다.
"왜 그래? 뭐 깨 먹었어?"
"이, 이, 이것 좀 봐."
"뭔데 그래?"
진호는 재준이 내미는 핸드폰을 보았다.
┗꺄악! 정말 이진호다!
┗프랑스어 섹시한 것 좀 봐! 하악, 하악!
┗진이루!
채팅이 미친 듯올라왔다.
"……2백 명?"
지금 이 시간에도 접속자 수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이, 이거 왜 이래?"
재준이 말하길 신입은 열 명도 감지덕지라고 했다.
"나, 나도 몰라, 인마!"
채팅창이 ㅋㅋㅋㅋㅋㅋ로 도배되었다.
"맞아, 인사. 인사해, 얼른!"
"그, 그렇지! 어…… 안녕하세요. 여기 신입 스트리머 재준의 친구인 이진호입니다."
알아요! 진호야! 같은 채팅이 빠르게 올라왔다.
진호는 멍하니 재준을 보았다.
"……야, 나 아는 사람들이래."
기분이 왠지 이상했다.
"그러게. 너 같은 겜폐 찐따를……. 아! 페이탈 북!"
"……아! 오, 박재준."
"왜 이래. 나 가람대 입학한 남자야."
┗ㅋㅋㅋ
┗저기요? 여기요? 안 들리나요?
┗진짜 실친이네! 실친도 잘생겼다!
채팅창이 시끄럽자 재준이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처음이다 보니 모든 게 어색하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생짜 신입이니 너그럽게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너 말 잘한다?"
원래 잘하는 줄은 진호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떨지 않고 잘할 줄은 몰랐다.
연습을 했는지, 재능이 있는지, 아님 둘 다인지는 모르지만 참 보기 좋았다.
"야 이씨, 방송 중인 거 안 보이냐?"
"나 때문에 오신분들 같은데?"
"……그렇지."
"형이라고 불러 봐."
"뒈져라."
둘은 방송 중이란 걸 다시 잊은 채 몸으로 투닥거렸고, 결국 카메라가 흔들려서 어지럽다고 시청자들에게 혼나야 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둘은 프랑스에서 방송을 하게된 이유를 설명하며 숙소와 호텔 이곳저곳을 보여 주었고, 채팅창은 한 번 더 시끄러워졌다.
진호는 순식간에 천 명을 돌파한 방송을 신기하다는 듯 보았다.
'나 때문에 온 거라고?'
이 많은 사람들이 진호와 재준의 언행에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SN 드에 올리는 사진에 리플을 달아주는 20만을 훌쩍 넘긴 팔로우와는 느낌이 달랐다.
진호는 아까보다 기분이 더 이상 해졌다. 몸이 붕 뜨는 것 같으면서도 숨이 조금 가빠졌다.
'이건 무슨 감정일까?'
어디선가 한 번 느껴 본 듯한, 그것도 최근에 느껴 본 듯한 감정. 진호는 생각에 잠겨 갔다.
방송은 이후로도 어찌어찌 두 시간 가량 진행되다가 두 사람이 오랜 비행의 피로를 이기지 못함으로써 끝이 났다.
* * *
화려하게 꾸며진 연회홀, 빠르고 경쾌한 비트가 빵빵 터지는 크리스챤 디올의 디너파티에 선남선녀들이 그득했다.
그중엔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배우나 가수, 그 나라에서 유명한 배우나 가수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웃음꽃을 피우며 그 동안 못한 안부 인사를 나누면서도 가끔씩 출입문을 응시했다.
"피에트로 CEO가 비호한다는 말이 떠돌게 만든 디올 옴므의 뮤즈가 과연 나타날까?"
"그룹 내 사정이 아니었다면 메인으로 세웠을 정도로 매력이 있는 존재라고 하니 궁금할 수밖에 없네."
한 가지 의미가 아닌 여러가지 의미로 궁금했다. 호기심과 무관심, 시기와 질투.
피에트로 CEO는 이런 분위기를 알아차렸지만 아무 말 없이 와인을 기울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입구에서부터 소음이 지워져 가는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왔군.'
그의 어린 친구는 실제가 더 매력적인 것만 같았다.
피에트로의 심장이 기분 좋게 박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