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2권 9화
"있지, 아까 그 머리가 많이 아픈 것 같은 아저씨가 나 기타 쳐 준다고 했다? 아빠도 같이 듣자."
"……그래. 아빠가 내일은 빨리올게.
"응! 우웅, 졸려. 나 잘래."
"그래요, 내 공주님. 잘 자요."
지혜는 금세 잠들었다.
"후……."
불을 끄며 병실을 나서는 차현성의 얼굴이 어둡다. 그런 그의 옆으로 김이나가 스쳐 지나갔다.
"제 딸, 지혜는 정말 괜찮은 겁니까?"
"천공, 협착이 일어난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출혈은 잡았고, 약물 치료로 많이 호전됐어요."
"휴우……."
차현성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안도 했다.
"그런데 그보다 아버님이 먼저 치료받으셔야 할 상황 아닌가요?"
"제가 말입니까?"
"번 아웃."
움찔!
"무기력증으로 인한 영양소 섭취 감소. 빠져나오지 못하면 우울증이 올 수 있어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힘없이 고개 숙인 차현성은 터벅 터벅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순간 심장이 철렁한 김이나는 찌푸려지는 이마를 잡았다.
띵!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뭐야, 김 닥. 저런 아재 스타일이 취향이었어?"
"……한 번에 붙지 못하면 병원 나가야 하는 거 알지?"
"아주 고사를 지내라, 이년아."
목을 조르는 동기를 밀어낸 김이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난 정말 왜 이럴까?'
한편, 주차장에 세워 놓은 차에 오른 차현성은 물기 가득한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번 아웃."
맞다. 아내가 지혜를 낳다가 죽은 후 차현성은 어떻게든 딸을 잘 키우기 위해 뼈가 부서지고 영혼이 갈리도록 일했다.
더 맛있는 음식, 더 좋은 옷, 액세서리. 그것만이 딸을 잘 키우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한 통의 전화.
모든 일을 제쳐 놓고 병원으로 달려와 보니 조금만 더 방치됐으면 지혜가 수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듣게 되었다. 소아 소화성 궤양. 더 맛있는 음식은 오히려 독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요사이 간간이 배를 만지며 애써 웃던 딸을 얼굴을 떠올린 차현성은 지금 내가 뭐 때문에 일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번 아웃은 그렇게 찾아와 버렸다.
"후, 집에 가자."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지만 딸을 위해선 일을 해야 했다.
부르릉!
그는 오늘도 어두운 거리를 향해 엑셀을 밟았다.
* * *
거의 모두가 잘 준비를 하는 병원의 아홉 시 30분.
초와 마사지 오일을 만들기는 했는데……
수면 스킬을 얻기 위한 필수품, 양초와 마사지 오일의 조합법은 이미 리셋 라이프를 통해 알고 있었다.
"와, 미치겠네. 그냥 포기할까?"
3차 해금 조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괴악했다.
'그냥 재준이를 꼬드길까?'
순간 진호는 7년 우정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진호도 싫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던 진호는 시계를 흘끗 봤다가 옆에 놓은 기타를 매만졌다.
"늦네."
오늘 하루 테니스 연습까지 포기하며 요새 애들이 듣는 만화 주제가를 연습했다.
"똥꼬 발랄해서 약속을 잘 지킬줄 알았는데……."
"제가 나오지 말라고 했어요."
"김이나 선생님!"
벌떡 일어난 진호는 미간을 좁혔다. 이곳은 많이 아픈 사람이 입원하는 대형 병원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찬바람은 환자에게 좋지 않아서 그런 것뿐입니다. 그럼."
매정히 돌아서는 모습이 차갑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장이 아프진 않았다.
'그러네. 보라처럼 그냥 어린 날의 추억이네.'
추억이 불러일으킨 감정의 잔재, 그뿐이었다.
후련히 웃은 진호는 김이나의 등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면회 가능합니까?"
……끄덕.
"조용히만 하세요."
"옙!"
씩 웃은 진호는 기타를 들고 그녀의 뒤를 쫓았다.
진호가 소아 병동에 나타나자 간호사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이 병실이에요."
"감사합니다."
드륵!
2인 병실에 지혜 혼자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진호 자신의 손목보다 얇은 팔뚝에 링거가 꽂혀 있는 모습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아저씨!"
"어이쿠, 그렇게도 이 오빠가 보고 싶었어?"
"……어제 선생님께 물어봤는데, 머리 아픈 사람은 여기서 치료받는 게 아니래. 다른 곳에 있는 병원이래."
순간 진호는 뒷목이 당겼다.
"왜 이렇게 예쁜 말만 할까, 응?"
"아프아."
진호는 지혜의 볼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갑자기 나오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서 깜짝 놀랐잖아."
"죄송합니다……."
진호는 살짝 놀랐다. 지혜는 변명 보다는 사과를 했다. 정말 귀여운 아이였다.
"부모님은? 어디 가셨어?"
"아빤 지금 지혜를 위해서 일하는 중이야. 엄마는 하늘나라에서 지혜를 보살펴 주고 있어! 그래서 이 정도만 아픈 거랬어!"
어제부터 왜 그리 눈에 밟혔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진호는 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잔잔히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랬어?"
"응!"
드륵!
"지혜야, 아빠 왔……. 누구신지?"
"아빠!"
진호는 벌떡 일어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진호입니다. 지혜가 너무 예뻐서 늦은 시간까지 실례를 하게 됐습니다."
"……아, 모델 겸 테니스 선수 겸 기타리스트 겸 요리사 겸 스타일 리스트인 그분이시군요."
굉장히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지금은 여기 창고에서 일하고 있대요─! 이나 선생님이 그랬어!"
"……하하, 알바를 좀 하는 거죠."
"디올 코리아 매출 상승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지혜 아빠 차현성입니다. 증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 어렵고 힘든 일을 하고 계시네요."
그가 내민 명함을 보니 놀랍게도 과장이었다.
"공부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죠."
인사를 마치자 진호는 일어설 준비를 했다.
"아저씨, 나 기타 쳐 줘."
"응? 그게……."
"쳐 준다며, 응?"
진호는 난처해하며 차현성과 어느새 병실 문 앞에서 있는 김이 나를 보았다.
갑자기 물기가 서린 지혜의 눈이 둘에게로 향했다.
둘은 당혹스러워했다. 특히 차현성은 당혹을 넘어 큰 충격을 받았다.
'얘, 얘가?'
지혜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떼를 쓴 적이 없는 아이였다.
마치 힘들게 일하는 차현성 자신을 이해라도 하는 듯 그 흔한 인형 한번 사 달라고 하거나, 밥투정 한번 하지 않았던 아이다.
그래서 언제나 안쓰럽고, 그래서 언제나 미안했다.
그랬던 딸이 또래 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었다.
"부, 부탁드리겠습니다."
"……후. 딱 한 곡만이에요. 시끄러우면 안돼요."
"와아!"
탁! 탁! 기타 케이스를 열어 기타를 꺼낸 진호는 한번 훑은 현을 조금 잡아 뜯었다.
"어? 이건?"
지혜의 눈이 동그래졌다. 김이나와 차현성도 마찬가지였다. 지혜완 다른 의미였지만 말이다.
진호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The snow glows white on the mountain tonight."
"와아! 얼음 왕국이다!"
"같이 부를래?"
"응!"
"자, 그럼 하나, 둘!"
"Not a footprint to be seen A kingdom of isolation."
"아! 외로운 한가운데 나 홀로 남겨졌네."
작은 병실 안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주 희미한 소리였다.
하지만 옆 병상의 숨소리마저 들리는 조용한 병실이라서 그런지 문가에 누운 아이의 귀가 종긋 솟았다.
매일같이 부르는 만화의 노래. 잠이 들려는 눈을 비빈 아이는 소리를 쫓아 움직였다.
드륵! 아이는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알지 못하게─! Let it go! Let it go!"
흥을 주체 못한 지혜의 높은 목소리가 병동을 울렸다.
"와아!"
"아저씨! 더요! 다른 곡도 해 주세요!"
갑작스레 시끄러워진 소아 병동에 안절부절못하던 간호사들과의 사들은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그들도 사람이었다. 아무 아픔 없이 웃는 아이들의 미소를 보고 병실로 돌아가라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들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인 진호는 어느새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까르르 웃고 있는 지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친구가 생겼구나?'
'히히힛!'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진호는 자신도 모르게 차현성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 아버님?"
차현성이 울고 있었다.
"아, 아빠 울어?"
"으응. 지혜가 다 나은 것 같아서…… 우리 까칠한 못난이 공주님에게도 친구가 많다는 걸 알게 돼서…… 너무 기뻐서 그래. 어른은 너무 좋아도 눈물이 나오거든."
미안하고, 감사했다.
"못난이 아니거든!"
한바탕 웃음이 터졌고, 지혜는 아니라고 방방 뛰었다.
진호는 웃음으로 슬픔과 안도를 감추는 차현성에게 기타를 내밀었다.
"한번 쳐 보실래요?"
"네? 아, 아뇨! 괜찮습니다."
"나! 듣고 싶어!"
"그래요. 옛날에 쳐 보셨다면서요."
차현성은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지혜의 눈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오랜만이라 제 실력이 나올지 모르겠군요."
"예쓰! 아저씨!"
진호는 지혜가 번쩍 든 손바닥을 향해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러곤 차현성을 초롱초롱하게 쳐다보았다.
잔뜩 긴장했다가 풀썩 웃은 차현성이 기타의 바디를 쓸어내렸다.
'예전엔 참 좋아했는데.'
하늘나라에 간 아내도 참 좋아했었다.
환하게 웃는 지혜를 보자 차현성은 갑자기 아내가 떠올랐다.
디리링!
그는 천천히 현을 뜯었다.
담담하면서도 먹먹한, 어느 노인의 서글픔 가득한 푸념이 울려 퍼졌다. 우리 이렇게 늙자며 가사를 고쳐 함께 부르던 그 노래가 말이다.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지혜는 내가 잘 키울게.'
병실이 조용했다.
고쳐 불렀던가사를 다시 원곡의 가사로 부른 차현성은 후련해하며 눈을 떴다가 당황했다.
가만히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 때문이었다.
"와아! 우리 아빠 최고!"
'……지혜야.'
힘차게 박수를 치는 딸을 보니 얼떨떨했다.
너무 오랜만에 잡아서 코드도 많이 틀렸는데도 웃어 주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런 걸 위해서였구나……, 내가 열심히 일한 건.'
갑자기 온몸에 힘이 났다.
"아이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노래였나 보네요."
진호는 갑자기 웃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방금 전보다는 훨씬 나아 보여서 보기 좋았다.
"아뇨, 정말 잘 부르시던데요?"
이게 연륜인가 싶었다.
"여기 있습니다. 잘 썼습니다."
"아니, 계속 치시지 않고요."
"하핫! 제가 아는 노래는 모두 옛날 노래라서요."
지금 이 자리에서는 어울리지 않았다.
진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가 넘겨주는 기타를 가져왔다. 아이들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자! 이번엔 우리 꼬마가 어떤 곡을 듣고 싶니?"
진호는 가까이 있는 아이를 콕 찍어 말했다.
방금 전 아이들에게 어떤 곡을 듣고 싶냐고 말했다가온갖 노래 주문을 중구난방으로 받은 경험이 있었다.
"모나요!"
"꼭 떠날 거야?"
"으응……. 네!"
"얼레리 꼴레리. 남자가 여자 노래 부른대요-."
진호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끼리 놀리는 거 아니야. 알았지?"
"네-!"
"자, 서로 사과해,
"미안해."
"응! 괜찮아!"
역시 아이였다.
흐뭇하게 웃은 진호는 다시 기타 줄을 강하게 훑었다.
섬을 떠나 광활한 바다를 여행하고 싶은 모나의 열망을 담은 경쾌한 선율이 병실 안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