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2권 7화
음식을 데워서 나온 진호는 이설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깐 고마웠어요."
하마터면 몇 년 동안 발이 묶일 뻔했다. 그런 일은 되도록 나중에하고 싶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괜찮을 거예요."
괜찮지 않아도 상관없다. 연예계나 모델계는 수많은 세상 중 하나 일 뿐이었다.
"그보다 바쁘지 않아요?"
"아, 맞아."
벌떡 일어난 이설아가 허리를 숙였다. 매니저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많이 바빠졌습니다. 고맙습니다, 진호 씨."
"아, 아뇨, 제가 한 게 있나요. 다 설아 씨 노래가 좋아서죠!"
진호는 진심으로 말했지만, 진호로 인해 디올이 움직였다는 걸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녀와 루엠 엔터테인먼트에게 있어서 진호는 은인이었다.
'그리고…….'
이설아는 지금 이 심장소리가 진호에게 닿지 않기를 바랐다.
"뭐 하냐? 갑질 중이야?"
깜짝 놀란 세 명이 한곳을 보았다. 구영재가 담배 냄새를 풍기며 다가오고 있었다.
"저, 전 메이크업 때문에 먼저 가볼게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이설아는 매니저를 납치하다시피 끌며 주점을 빠져나갔다.
"아……."
뻗어질 뻔했던 손을 갈무리한 진호가 구영재를 노려봤다. 오늘은 그가 얄미웠다.
"왜? 뭐?"
"……됐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뭔 일은, 일해야지."
"좀 있다가 시간 줄 거죠?"
"될 것 같냐?"
구영재의 손가락이 천막 안을 쭉 훑다가 밖을 가리켰다.
족히 30미터는 될 법한 줄, 그들 모두 한 손엔 술이 든 관악마트 봉지를 들고 있었다.
"악덕 사장."
"일하겠다고 한 건 너다."
"그러니까요."
갑자기 재미가 없어졌다. 입술을 삐죽 내민 진호는 몸을 일으켰다.
"아, 맞아. 진호야."
"네?"
"음…… 아니다. 일해."
"뭔데요?"
의미심장한 미소가 왠지 불안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파이팅."
"……네, 형도 수고하세요."
별일이야 있겠냐고 생각한 진호는 철판 앞에 서서 쌓여 있는 주문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축제의 밤이 저물어 갔다.
3.
결국 진호는 이설아의 공연을 관람하지 못했고, 테니스는 세 번 출 전하는 것으로 관악대동제의 막이 내리게 되었다.
경영학과의 성적은 테니스와 골프 우승으로 작년과 다를 게 없었다. 진호도 전승이었다.
"끄어어어."
"으어어."
6월, 여름이 빨리 찾아오려는지 급격히 더워진 한국대 교정에 피로에 전 사람들이 흐느적거리며 걷고 있었다.
경영학과 내지는 경제학과에 재학 중인 이들이었다.
그들 중 1학년은 낯빛이 검어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이들이 이렇게된 이유는 기말 시험은 리포트로 대체하겠다는 전공 교수들의 발언 때문이었다.
"이러다 뒈지겠는데……."
"이게 편한 거라고?"
타우린 음료와 피로 회복제로 버티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당장 이라도 학점을 포기한 채 푹 자고 싶었다.
"누가 대학교 가면 푹 잘 수 있다고 했어?"
지금이 고3인지 대학생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음음음."
그때 경쾌한 콧노래가 들려오자 그들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오늘도 모공 하나 보이지 않는 매끈한 피부와 빛을 발산하는 미모를 자랑하는 진호가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진호야."
"응?"
동기의 부름에 이어폰을 뺀 진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너…… 학점 포기한 거야?"
"아닌데?"
"너 다음 주에 파리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그런데 왜 그렇게 멀쩡해?"
"……아."
진호는 동기들을 안타깝다는 듯 보다가 저 멀리 하늘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굉장히 아련했다.
"세상엔 쓸모없는 재능은 없더라고."
"……그게 뭔 개소린데?"
"있어, 그런게."
진호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불이 켜진 방안에서 진호가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탁!
엔터를 강하게 친 그는 잠시 머리를 뒤로 젖히며 눈가를 매만졌다.
"후우, 죽겠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축제가 끝나고 2주가 지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과제가 쏟아졌다. 교양 수업은 상관이 없는데, 문제는 전공 수업이었다. 과제는 과제대로, 기말고사 리포트는 리포트대로.
'차라리 시험을 보는 게 낫지!'
양이 너무 방대하다 보니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제출일은 6월 29일이었지만, 그 보다 보름 전에 출국을 해야 하기에 남들보다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때문에 도전 골든 빅 벨의 역대 최강자전에도 불참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기획사와 에이전시 때문이기도 했다. 관계가 나쁘게 얽히다 보니 조심하는 게 좋았다.
스륵 문이 열리며 어머니 나진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안 자니?"
"아, 곧 잘 거예요."
"쉬엄쉬엄 해. 벌써 며칠째니."
"내일 토요일이잖아. 늦게까지 자 면 돼요."
"……커피라도 타 줄까?"
"오늘 치는 거의 다 했어요. 들어가서 주무세요."
"……그래, 아들도 잘 자."
일그러지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자 마음이 썩 좋지 못했다. 문이 닫히자 한숨을 내뱉은 진호는 핸드폰을 보곤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약속 잊지 않았제? 아홉 시까지데이.
-저녁에 알지? 클럽에서 기다린다. 사랑하는 영재 형이.
지금 시각은 새벽 네 시. 앞으로 네 시간이라도 자면 다행이었다.
"……자자."
그는 노트북과 불을 끄곤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못 다한 분량 때문 인지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다.
'끄어어.'
약국에서 피로회복제를 사 먹었는데도 눈이 뻑뻑하고 몸이 축 처졌다.
"니 괘안나?"
박 코흐트가 걱정 어린 표정을 짓는다.
"괜찮아요, 교수님.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요새 느그 쪽 애들 다 죽올라 카드만, 무슨 일 있나?"
대학 내에서 좀비 몰골로 돌아다니는 애들을 보면 경영학과 내지는 경제학과였다.
"매일매일 리포트 내용이 추가되고 있어서요. 하. 하. 하."
두 전공 교수는 강의가 끝날 때 마다 그날 강의한 내용에 참고할 서적과 논문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즉, 너희 기말고사 리포트에 추가하란 소리였다.
'1학년이 편하기는 무슨!'
이 말을 한 사람과 아웅다웅하고 싶었다.
2학년이 아니라 당장 전공 수업의 숫자가 늘어나는 2학기부터 걱정이었다. 그땐 어떤 시련이 있을 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진짜 딱 여섯 시간만 자도 소원이 없겠네!'
고3 수험생 신분이었어도 하루 여덟 시간 이상씩은 잤던 그였기에 더 괴로웠다.
"……욕본데이. 그래도 내 수업에서 흐물거리면 내쫓을 거다. 알았나?"
"그, 그럼요!"
"따라오그라."
박 코흐트는 몸을 돌렸다.
"아, 맞아. 내가 플레이팅은 뭐라고 했제?"
"한 그릇의 미학이요."
길거리 분식 트럭에서 떡볶이를 담아내듯 했던 축제 주점의 음식들.
진호의 재능을 안타까워한 박 코흐트는 플레이팅을 가르쳐 주기로 한 것이었다.
불을 지배하는 자를 얻은 이후 요리에 대해 부쩍 관심이 높아진 진호로서는 당연히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플레이팅은 한 그릇의 요리를 완성시키는 열쇠다. 그렇다고 너무 긴장하지는 말그라. 넌 패션 센스가 뛰어나니까 금방 배울기다. 플레이팅은 색감이 필수 요소거든."
"옙!"
진호는 힘차게 대답했고, 박 코흐트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리 가르쳐서 요리에 대한 재미만 알려 주면……. 으흐흐.'
그녀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 * *
"정말…… 딱 죽겠는데?"
몸을 격하게 움직인 후 샤워를 하고 나니 잠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문제는 이제부터 리포트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빵빵!
잘빠진 흰색 스포츠카가 진호의 앞에 섰다.
"타! 집까지 데려다줄게!"
"어? 이거 영재 형 차예요?"
아우디 R8. 억대의 자동차였다. 진호는 일단 차에 올랐고,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요새 할 만해?"
"죽을 것 같죠. 원래 이럽니까?"
"괜히 한국대겠냐……. 1학년은 그래도 개강 후 두 달 반까지 봐주잖아. 2학년은 한 달이고, 3학년은.... 흐흐흐."
더 물어봤다가는 위험할 것 같아서 진호는 입을 다물었다.
"아, 저기에 세워 주세요."
"됐어. 어차피 가는 길이야."
"응? 제가 집을 알려 드렸던가요?"
"형이 과대다."
"아…….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월요일에 밥 살게요."
"내비나 입력해."
진호는 냉큼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고, 차는 속도를 좀 더높였다.
탁!
"그럼 월요일에 뵐게요."
"그래, 수고해라! 죽지 말고! 요령 생기면 살 만할 거야!"
부우우웅!
순식간에 사라지는 차를 바라보던 진호는 입을 벌리고 하늘을 보았다.
차 안에서 깜빡 졸고 말았는데, 그 때문에 더 피곤했다.
"그런데 학생 신분으로 저 차를 살 수 있던가?"
'……과외를 열심히 했거나 건물 주 아들이겠지.'
뭐든 상관없었다. 구영재는 구영재일 뿐이었다.
기지개를 켠 진호는 집으로 향했다.
"다녀왔습니다."
"……아들, 괜찮아?"
"응, 아직 살아 있어."
"살아만 있는 거잖니. 아주 얼굴이 반쪽이 됐네. 모델 일을 잠시 그만두는 게 어떠니? 아니면 지영이 과외나 취미 활동이라도."
진호가 더 시간에 쫓기는 이유는 코앞에 다가온 여름용 화보 촬영과 워킹 연습, 지영의 과외, 그리고 하루에 최소한 시간 이상씩 할애하는 취미 활동 때문이었다. 다행이라면 토익이나 토플 등 웬만한 영어 자격증 시험을 끝냈다는 것이다.
"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더l 뭐. 2주 후면 끝나. 아버지는?"
"……야근이래."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밥은?"
"먹고 왔어요. 샤워도 테니스 클럽에서 했고요."
진호는 구영재가 다니는 테니스 클럽에 가입했다. 토요일 저녁엔 대학교 테니스 코트에 불이 들어 오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빨래는 좀 있다가 바구니에 넣을게요."
그렇게 방으로 들어간 진호는 책상 앞에 앉아 사이트에 접속했다. 뚝뚝!
"……어, 피다."
고개를 얼른 뒤로 젖힌 그는 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싹아아아!
화장실 벽에 기댄 진호는 어이없는 듯 웃었다.
"나한테도 이런 일이 생기네."
공부하다가 코피를 흘린다는 건 여태까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 같아서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정말 취미 활동이라도 좀 줄여야 하나?"
하지만 줄일 시간이 없었다. 테니스는 과동아리였고, 요리는 박 코흐트의 개인 교습이었다. 기타는 이동시간에 악보를 보거나 음악을 듣다가 집에 오면 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잠시 연주하는 수준이었다.
'테니스라도 좀 줄일까?'
그래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하루가 찌뿌둥했기에 썩 내키지 않았다.
"하아, 진짜 두 시간만 자도 여섯 시간 잔 듯 푹 잘 수 있는 능력 같은 건 어디서 안 파……. 잠깐?"
'있잖아?'
너무 사소한 재능이어서 그동안 잊어버렸던 스킬이 있었다. 지성이 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후천적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재능.
"……앞으로 좀 더 바빠지겠네."
지금 같은 상태라면 잠을 위해서 영혼이라도 팔 수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