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2권 2화
순간 당황했던 이설아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다, 다섯 벌이요? 다, 다른 색상으로."
"오케이, 다섯 벌. 꽃무늬는 무조건 이모네 꺼."
"……다른 데도 가려고?"
"와, 우리 이모님은 TV 안 보시나? 드라마 한 편을 봐도 옷이 몇 벌이나 나오는데. 뮤직비디오 나올 때까지 가게 닫으시려고요?"
"……그래, 졌다, 졌어. 어떻게 미운 말을 해도 입지가 않아?"
"그게 제 매력 아닙니까. 그럼 오케이?"
"오케이! 신발은 저쪽에서 목 빼고 있는 언니네 가 봐."
"캬! 서로 돕고 사는 상부상조 정신! 내가 이래서 동대문을 좋아하지! 복 받으실 거예요. 아, 명함 주세요."
진호는 이설아와 여성 댄서들의 사이즈에 맞는 옷을 고른 후 매장 주인이 가리킨 신발 가게로 향했다.
그렇게 그들은 동대문 두타몰을 한 바퀴 돌았고, 설아는 양손에 가득한 공짜 옷 꾸러미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와.'
이설아는 이런 감탄사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한 푼이라도 깎으려고 별말을 다 했던 오늘의 수고가 그녀의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설아는 멍하니 진호를 보았다.
"이거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너무 많은 짐 때문에 소환된 매니저 박충식이 허리를 숙였다. 촬영에 쓰일 수십 벌의 의상과 신발을 공짜로 얻음으로써 2백만 원, 아니 무대 의상으로도 쓸 수가 있으니 그 이상의 돈을 아꼈다고 봐야 했다.
"제가 한 게 있나요. 설아 씨 매력이 아니었으면 힘들었어요."
이설아나 매출을 걱정하는 두타몰 상인들이나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뿐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덕제 형?"
"그럼─. 나야 당연히 좋지. 그런데 배 안 부르냐?"
버거 세트가 벌써 세 개째다.
"아깝다는 겁니까?"
"그러겠냐?"
"그럼 됐어요. 아직 멀었……."
우우웅!
핸드폰을 확인한 진호는 우울해하며 더블치즈버거를 내려놓았다.
미영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급히 몸을 돌리는 여성이 몇 명 있었다.
"하아, 여보세요?"
-아드을─! 그런 거 먹지 말랬지─!
"사랑해, 이모!"
-진희가 왜 그렇게 하소연을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네! 왜 말을 안 듣니! 오십 번만 더 말하면 백 번이야!
"사랑합니다! 오늘 운동 빡세게 하고 잘게요!"
-하아, 내가 앓느니 죽지. 됐고, 아들 뮤직비디오 출연한다며?
"……엄마한테 들었어요?"
-당연하지. 출연하는 이유가 뭐니?
"다른 이유가 있나요. 노래가 좋아서죠. 귀에 딱 꽂히던데요."
-타이틀이?
"아뇨, 후속곡이."
솔직히 진호는 타이틀곡보다 후속곡이 백배 더 좋았다.
-지금 그쪽 사람들 옆에 있지?
"네, 그런데요?"
-그럼 우리 디올이 후원을 해도 되냐고 물어봐.
"네. 디올이 후원을……. 네?"
진호는 눈을 크게 떴다.
* * *
"다들 모여서 이 노래들 좀 들어 봐."
부서의 사원들을 모은 조명희 부장이 하나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의아해하며 모였던 그들은 경쾌한 음률이 울려 퍼지자 곧 노래에 빠져들었다.
몇 분 후 노래가 끝났다.
"감상들은 어때?"
"좋은데요? 목소리도 좋고. 같은 가수죠?"
"특히 두 번째 노래의 마지막 부분, 그 세 번 올라가는 고음, 전 이런 노래가 좋더라고요."
"저도 두 번째 노래가 도입 부분 부터 귀에 확 들어왔어요."
"그래?"
"그런데 이거 누구 노래예요?"
"나중에 알려 줄 테니까 다시 일 들 해. 자, 수고하자고요"
크게 대답한 사원들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코톡! 코톡! 코톡!
핸드폰을 확인한 조명희 부장은 옅게 웃으며 부사장실로 향했다.
"사원들 대부분이 좋다는 평입니다. 노래는 두 번째 곡이 훨씬 더 좋다고 합니다."
여자, 남자, 20대에서 40대까지, 저마다 각기 다른 성향과 성격, 취향을 가진 이들 대부분이 좋다고 한다.
미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래서 관계자 아닌 사람의 눈이 필요하지.'
"알았어요. 가서 일 보세요."
"그럼……."
"일단 승인은 받아야죠."
일어선 미영은 바로 사장실로 향했다.
다행히 자리에 있던 사장은 미영의 보고에 미간을 찌푸렸다.
"위험성이 큽니다. 이제 막 불이 붙은 불씨에 물을 끼얹는 격이 될 수 있습니다. 그건 인식하고 계십니까?"
"하지만 진호가 출연하죠. 언론만 조금 움직이면 돼요."
"……외국 톱 모델들처럼 말입니까?"
"네."
모델이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한국과 달리 외국은 모델을 일종의 연예인으로 취급한다.
그중 대표적인 한 명이 미란다 커. 할리우드 톱스타 올랜도 블룸과 결혼했다는 것 때문도 있지만, 그녀는 세계적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의 메인 모델로서 명성이 높았던이다.
여기에 지젤 번천과 나오미 켐벨, 트랜스포머 3에 출연한 로지 헌팅턴 휘틀리,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출연한 카라 델레바인 등. 이런 톱 모델들은 시간당 어마어마한 모델료를 받는데, 이 사실 때문인지 수많은 이들이 선망하며 그들처럼 되고자 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화제가 된다.
"흠……."
"솔직히 진호가 엮이지 않았더라면 대리 선에서 해결됐을 문제라는 건 인식하고 계시죠?"
"이진호 씨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디올이 인식할 필요도 없는 연예인이있겠지만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승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사장의 기획력을 한 번 더 발휘해보세요."
"오직 매출 상승만을 위해 움직 이겠습니다."
돌아선 미영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미국발 햄버거를 먹는 진호의 모습에 눈이 뒤집혀 전화했다.
* * *
며칠 뒤, 뮤직비디오 촬영이 시작 되었다.
두 시간 일찍 촬영장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빛내는 진호를 보며 오늘 메가폰을 잡은 감독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거 기회다!'
요즘 모델계에서 가장 핫한 진호의 출연과 디올의 후원. 잘만 찍으면 이쪽 계통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엠의 대표인 김형석과 친구 사이라 억지로 맡았던 그로서는 뜻 하지 않은 횡재라고 할 수 있었다.
'언제 입봉작을 찍을지도 모르고.'
스토리는 있지만 투자자가 없었다.
"허허, 신기해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좀 부산스러웠죠?"
"아니에요. 보기 좋은데요, 뭘. 망가트리지만 마요."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한 진호는 다시 촬영장을 둘러봤다.
"오, 이거 열리나? 아, 열린다."
촬영장은 굉장히 컸고, 세트도 여러 개였다.
여태껏 거의 하나의 세트에서만 촬영을 했던 진호로서는 모든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꾹 닫혀서 열리지 않는 창문이라 든지, 문을 열면 나타나는 벽이라 든지, 커다란 카메라도 굉장히 신기했다.
천진난만하게 돌아다니는 진호의 모습에 스태프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진호의 곁에는 6밀리 카메라를 든 사내가 있었다.
디올은 의상뿐만 아니라 뮤직비디오 촬영 비용까지 일부 투자했는데, 그 때문인지 세트를 짓고도 돈이 남았다. 그래서 메이킹 필름도 제작하려는 것이었다.
이윽고 이설아가 댄서들과 함께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늦었습니다!"
잠시 후 리허설 촬영이 시작되었다.
"설아야, 너무 딱딱하다. 좀 더 수줍게 훔쳐봐야지. 아니, 그건 음침한 거고! 여기 보지 마!"
"좋아요, 진호 씨. 조금만 더 온화하게, 감정 유지하고. 그렇죠! 하지만 옷이 너무 드러나요. 네, 그겁니다!"
"가슴이 벅차서 어쩔 수 없…….애교가 아니라! 보지 말라니까!"
둘의 온도 차이가 극명했다.
한 시간 동안 모든 세트에서 행해진 리허설 촬영에 이설아는 녹 다운이 되어 버렸다.
울상이 된 그녀는 생생한 진호를 경이로운 듯 보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예요?"
모델이란 상품을 부각시키는 존재지 연기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진호는 간절한 그녀의 눈빛에 작은 조언을 하기로 했다. 이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그녀이니까.
"음, 삼겹살 보면 어떤 감정이 들어요?"
이건 그가 인터뷰 촬영에서 감정을 과하게 드러낼 때 쓰는 노하우다. 모델들의 자서전이나 인터뷰를 보며 익힌 거다.
"치이익, 불판 위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삼겹살에 옆에 놓인 소주 한 병, 콧속을 파고드는 고소한 기름 냄새와 눈앞에서 흩어지는 하얀 연기."
"……꿀꺽."
"방금 체중 관리 생각하며 갈등 했죠?"
"힉?"
"그거예요. 날 사람으로 보지 말고, 음…… 그래, 기타. 에릭 클랩튼의 사인이 적힌 통기타가 악기 가게의 격자유리 창문 안에 진열 돼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가격은 한 2천만 원."
이설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기타를 치는 이라면 누구나 우상으로 생각하는 세계 3대 기타리스트 중 한 명인 에릭 클랩튼, 그의 사인 기타가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다. 근데 비싸다.
'오?'
진호는 순식간에 변화하는 그녀의 얼굴에 놀라고 말았다.
'재능이 있는데?'
그녀는 연기에 재능이 있었다. 발성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에이, 나도 발성이 안 되는데 누굴 평가해.'
모델의 연기라지만, 그래도 재능이 있기에 진호는 대사도 한번 읊어 봤었다. 하지만, 결과는 끔찍했었다.
핸드폰으로 촬영한 자신의 모습은 인간과 똑같이 생긴 로봇이었다.
"방금 좋았어요."
"그, 그래요?"
"형, 카메라 좀 보여 주세요."
"……어?"
너무 자연스러워서 주위에 카메라가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곁에도 카메라를 든 사람이 있는데 말이다.
그러다 곧 화면 속의 자신을 보곤 다시 놀라 버렸다.
"이게…… 나?"
화면에는 갈망하고 안타까워하고 초조해하는 여자가 있었다.
진호가 해맑게 웃었다.
"마이크 없는 카메라는 참 어린 아이 같아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표정과 몸짓만 읽고 판단해 버리죠. 상황이 그 표현을 이해시켜 버리니까 속이기가 쉬워요. 현실이라면 어림도 없죠."
두근!
갑자기 이설아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후속곡을 재녹음했을 때 솟았던 감정이 다시 솟구쳤다.
"아……."
"아, 디올이 왔네요."
디올 코리아의 사람들이 수많은 가방 들고, 많은 옷이 걸린 행거를 밀며 촬영장 안으로 들어왔다. 진호는 그런 그들을 향해 움직였고, 설아는 그런 그의 등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린 그녀는 이번 촬영의 최대 후원 업체를 향해 달렸다.
그의 첫인상은 굉장히 독특했다.
"오홍홍! 반가워요. 이재형이라고 해요."
웃음소리가 말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 설아가 부른다는데 천릿길 이라도 가야지. 홍흥홍!"
촬영장이 순식간에 복작복작해졌다.
그렇게 이설아의 노래 스승이라는 이재형과 이설아가 디올 스태프들에 의해 메이크업과 의상을 입고 나오자 본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녀가 세트에 서자 숨소리조차 잦아들었다.
"설아야, 리허설 한 번 더 갈까?"
이설아는 세트 바깥에서서 디올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진호를 슬쩍 바라보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콩닥콩닥 심장이 설레게 뛰었다.
'멋진 사람.'
그녀 자신의 몸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더욱 설랬다.
'자신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만…….'
"설아야?"
"……아뇨! 바로 갈게요!"
감독은 깜짝 놀랐다. 힘차게 대답 하는 그녀의 모습은 사랑에 빠진 소녀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얘가 연기에 소질이 있었나?'
"그, 그럼 뮤직 틀고. 하이 큐!"
-뺨빠밤! 빠밤.
-어쩜 하늘은 왜 이렇게.
노래와 동시에 시작된 그녀의 연기에 촬영장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