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1권 25화
대부분 중년인으로 이뤄진 그들은 눈을 빛내며 달리듯 달려와 진호를 감쌌다.
"왜 이러시는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불쾌했다.
"아, 저희의 행동이 실례를 끼쳤다면 사과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이진호 씨, 일곱 시 내 고향 피디 주상태입니다."
"사과함세. 인간 단막 극장 피디 유영철일세."
이 외에도 NBS 1TV의 방영프로그램 피디들이 가득했다.
진호는 그래서 더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만약 진호가 정말 일반인이었다면, 이들도 이렇게 직접 오지 않았을 것이다.
PD란 제작하는 존재였다.
일반인들의 우상인 연예인을 한 마디 명령으로 더 나오게 만들고, 언제든 그만두게 만들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이들.
물로느 톱스타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자존심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그들이 NBS 1TV 소속이라는 것이다.
10퍼센트를 넘지 못하는 시청률과 언제나 적은 제작비, 다양하지 못한 시청자층.
시골이나 장년인, 노인이라는 확실한 시청자층을 쥐고 있다 해도 결국 그들은 시청률에 목마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골든 빅 벨이 900회 특집을 대대적으로 준비한다고 하니, 회의 때마다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된다, 참신한 것 없냐' 등등의 말을 들어온 그들은 몸이 달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진호란 인물이 등장하고 말았다.
팀 존스의 뮤즈, 작년도 유일한 수능 만점자, 한국대 전체 수석, 요사이 핫해지기 시작한 디올의 모델, 어딜 봐도 욕심이 안 날 수 없었다.
시사교양, 다큐를 전문으로 하는 NBS 1TV에는 완전히 특화된 맞춤 인재였으니까.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PD들은 끝까지 잘 부탁한다고하며 퇴장했다.
도전 골든 빅 벨의 스태프들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네가 정말 성공하긴 성공했나 보구나?"
진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덜 성공해서 이러는 거죠."
"하긴……."
NBS 1TV는 톱스타의 출연료를 맞춰 줄 돈이 없다.
프로그램들의 성격도 톱스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인정을 받으니 기분은 좋네요."
자신의 기획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참기분 좋았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뛰어들어 보려는 거야?"
달그락.
다 먹은 접시를 내려놓은 진호가 일어서며 싱긋 웃었다.
"연예계가 저한테 뛰어들어야죠."
"……뭐?"
"그럼 이만 가볼게요."
돌아서는 그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 * *
"모바일 게임의 성공 요인에는 뽑기 시스템, 일명 가챠 시스템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남들보다 더 좋은 장비, 남들보다 더 예쁜 코스툼, 남들보다, 남들보다, 남들보다."
어 둔 강의실에 프로젝터의 밝은 빛이 스크린을 비추고 있고, 진호가 발표하고 있다.
"비슷한 스토리, 비슷한 캐릭터, 비슷한 게임 시스템. 그럼에도 많은 모바일 게임들이, 게임회사들이 적게는 수억, 많게는 수백 수천억 씩 버는데는 이렇게 사람의 성취욕,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을 자극 시킨 것이 컸습니다. 저희가 조사 한 혈통이라는 게임을 만든 LC 소프트 역시도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건드렸습니다. 그리고 성공했습니다. 왜냐, 이미 PC판 혈통으로 쌓은 빅데이터가 존재하기 때문이죠."
진호는 잠시 물을 마시면서 말라 가는 목을 축였다.
"혈통 모바일 버전 첫 발매 이후 역대 최고 매출액 달성, 주가 상승. 그러나 지금 모바일 혈통의 인기는 굉장히 잠잠해졌습니다. 유저들의 이탈도 심합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결국 지독한 현금 결제 유도로 귀결됩니다. 때문에 유저들은 PC 버전으로 갈아타거나, 붉은 사막이라는 비교적 라이트 유저들을 위한 게임으로 넘어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흠, 단점을 말하는 것 같지만, 결국 장점만 말하고 있군. 단점이 보이지 않아."
교수의 지적은 정확했다. 경영학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 LC 소프트의 경영 방향은 나쁘지가 않았다. 구매력을 갖춘 유저들을 손에 쥐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날카로운 지적에도 진호는 웃었다.
"그렇습니다. 그 단점이 보이지 않는 게 이 기업의 단점입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교수도 눈을 빛내며 계속 말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다양하지 못한 수익 모델. 혈통 모바일이 성공한 이유는 결국 과거 혈통을 했던 어린 유저들이 현재 막대한 구매력을 갖춘 사회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LC는 혈통 이후 수많은 게임을 개발하고, 또 성공시켜 왔지만, 결국 모두 혈통이라는 아성을 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그 성공을 기반으로 게임을 제작했기에 이들은 소위 말하는 현질하지 않으면 제대로 즐길 수 없는 게임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출은 여전히 뛰어나지. 수많은 게임 회사들 증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지 않나."
"맞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그것에 질려 가고 있습니다. 이 점이 고쳐지지 않고 십 년, 그리고 이십 년이 흐른다면, 그들은 결국 몰락하게 될 것입니다."
진호는 옆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조원이 화면을 넘겼다.
"보시다시피 수많은 게임 회사가 저마다 자금력을 갖춰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출이란 곧 빅데이터. LC의 경쟁 업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LC는 지금부터라도 혈통의 아성을 넘을 게임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도 한 명의 게이머로서 개인적인 의견을 내자면 이왕이면 VR로 만들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 화면은 VR기기였다.
"이만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짝짝짝짝짝짝짝!
불이 켜지며 박수가 터져 나왔다.
교수도 박수를 쳤다.
진호와 조원들은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훌륭하군. 아주 멋지면서도 현재 대한민국 기업들의 고질적인 문제 까지 꼬집고 있어. 좋은 발표 잘 들었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조?"
다음 조의 발표자가 전의 가득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서로 친하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학점을 위해 싸워야 하는 경쟁 상대였다.
"저희 6조에서는 오성전자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강의실의 불은 다시 꺼졌고, 진호와 조원들은 서로 만족스러웠다며 주먹을 부딪쳤다.
* * *
"캬! 우리 못해도 A는 받겠지?"
"쇼가 뭐냐! A플러스는 기대해도 되지!"
"하지만, 6조와 9조도 만만치 않던데?"
"이게 무슨 토너먼트냐?"
"아니었어? 교수님 에이뿔은 한 조밖에 안 준다고 했는데?"
진호는 흥분을 가득 발산하는 동기들을 보며 흐흐 웃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오늘 발표는 정말 완벽했다.
'아, 오늘 학식은 뭘 먹을까?'
압박이었던 첫 조별 과제에서 벗어나서 그런지 무엇을 먹던 꿀맛 일 것 같기는 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조별 과제 무임 승차도 없어서 더욱 그랬다.
"그런데 요새 그 사람들 안 보이네?"
"진호 보러 오는 사람들?"
"응? 나?"
"연예기획사 사람들 말이야. 난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은 기획사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 뭐, 올 곳은 다 왔으니 안 오는 거겠지. 거기다가 죄송하지만 정문 경비 아저씨들께서 고생해 주시고 계시니까."
관계없는 사람들이 학교 안을 기웃거려서 공부하기가 힘들다는 민원을 경영학과 집행부에서 넣었고, 그때부터 한국대 정문을 지키는 경비들은 등록하지 않는 차량에 방문 목적을 집요하게 캐묻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올 곳은 다 와서 그런지 몰라도 찾아오는 사람이 사라졌기에 괜히 미안 해진 진호는 매주 음료수와 간식을 드리고 있었다.
우우웅!
[오라버니, 지금 여의도에 벚꽃이 활짝 피었다고 합니다.]
[응. 시험 통과하면.]
[나빠!]
'아, 벚꽃 구경은 올해도 못 가겠구나.'
부모님과 재준의 부모님 모두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누구야?"
"동생."
핸드폰을 집어넣은 진호는 어느 새 오늘 점심은 어디서 먹을지로 이야기가 진행된 동기들 사이로 재빨리 끼어들었다.
"난 갈비 한 표. 근처에 맛집 알고 있음."
"거기 말이지? 오케이. 갈비 두 표."
"야 이씨, 누가 점심부터 고기를 먹어? 그냥 파스타 먹자!"
"밀가루는 집어치워! 고기가 진리 다!"
"소고기 샤브샤브! 얇은 한우 삭삭 해서! 음 맛있다!"
삽시간에 육식파와 파스타파로 의견이 갈렸다.
다들 과외를 해서 그런지 비싼 메뉴도 척척 말했다.
결국, 가위바위보까지 갔고, 승자는 갈비였다.
"아싸!"
"아자!"
"얼른 가자. 버스 놓칠……."
초롱초롱 빛나던 진호의 눈이 이 쪽을 향해 다가오는 중년인들로 인해 삽시간이 죽어 버렸다. 동기들은 진호의 등을 두드렸다.
"네 몫까지 맛있게 먹고 올게."
"……나쁜 놈들, 기다려 주지도 않는 거냐."
"오후에 봐─."
한숨을 푹 내쉰 진호는 중년인들을 원망스럽다는 듯 바라보다가 놀라고 말았다.
그들의 뒤에서 낯설지 않은 여성이 걸어나왔기 때문이다.
'3년차 신인가수 이설아?'
* * *
한국대 근처 카페의 분위기가 조용했다.
이설아와 박충식, 루엠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는 기분이 나빠 보이는 진호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신경질적으로 달콤한 커피를 마시던 진호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당분이 들어가서 그런지 짜증이 내려갔다.
"계약 관련으로 오셨습니까?"
어떻게 됐던 한국대까지 찾아온 이들이었다.
이야기는 들어 봐야 했다.
이런 진호의 온화한 말투에 셋은 깜짝 놀랐다.
대표가 급히 손을 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대형 기획사들이 움직였을 때부터 저희는 두 손 들었습니다."
대형 기획사와 소규모 기획사는 자금력부터 달랐다.
황금만능주의 사회에서 인정에 호소해 봤자 씨알조차 먹히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대표였다.
"음, 그럼?"
진호는 살짝 달아오르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자세를 바로 했다. 계약이 아니면 일이었다. 새로운 경험을 시켜 줄 일이 분명했다.
'인간 단막 극장처럼 부담스럽지 않은 일이면 좋겠는데.'
한 달 내내 붙어 다닌다는데 부담스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
"혹시 여기 설아의 노래를 들어 보셨습니까?"
"아, 네. 엄청 좋던데요?"
복합적인 매력을 지닌 그녀의 목소리와 댄스음악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여태껏 왜 이런 음악을 하지 않았는지 아쉬울 정도로.
셋의 표정이 풀렸다가 이내 다시 굳었다.
대표가 약간은 기대하는 얼굴로 물었다.
"혹시 뮤직비디오도 보셨습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예."
진호는 미안해 하는 눈빛을 지었다.
"솔직히 몰입이 안 됐습니다. 음원만 들었을 때는 정말 좋았지만……."
새침한 미소녀 감성인데, 정작 부르는 사람이 소녀가 아니었다.
짧은 옷으로 드러낸 성숙한 몸매가 많은 걸 망쳐 놓고 있었다.
아니 여기까지는 가사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러나 진호는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순간, 대표가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자 배우의 외모가 걸리시는 겁니까?"
"……아하하."
맞았다. 그렇다고 남자 배우가 못 생겼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설아가 짝사랑하는 사람치고는 서로가 너무 선남선녀였다. 뮤직비디오를 보는 내내 한쪽이 매달리는 그림이 머릿속에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대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진호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뮤직비디오 발표 이후 가파르게 상승하던 음원 성적이 멈춰 버렸다. 팬들과 SNS도 그 문제를 지적 하고 있었다.
'몰입이 안 된다.'
이번 앨범에 거의 모든 걸 투자한 대표로서는 미쳐 버릴 노릇이었다.
"저희가 진호 씨를 찾아온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진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뮤직비디오를 재촬영하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대표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영세한 기획사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 벌어질 터였다.
"하지만, 뮤직비디오 출연 의뢰는 맞습니다. 후속곡으로 예정해 둔 곡인데, 아무래도 조금 빨리 선보여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설마 그 고음이 인상적인?"
"그, 그렇습니다! 그 곡입니다!"
진호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러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네. 하죠."
새로운 일, 새로운 경험이었다.
명함을 건넨 후 연락이 없는 기획사들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부담도 없었다.
이런 진호의 거침없는 대답에 셋은 양팔을 번쩍 들었다.
"꺄악! 고마워요!"
"윽?"
스무 살 청년의 심장이 잠시 멈췄다.
풋풋한 마음에 성숙한 육체는 너무도 위험한 자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