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15화 (15/424)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1권 15화

손목뿐만이 아니라 팔이, 다리가, 전신의 근육이 마치 응축된 듯, 고무가 된 뜻 탄력적으로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면 100미터를 십 초대에 주파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좀 쉬자. 랠리도 백 번 정도 한 것 같으니까."

랠리 백 번, 체력을 엄청나게 요구하는 행위였다.

"예? 정말 괜찮아요."

진호는 얼른 다시 테니스 공을 쳐 보고 싶었다.

'만화 속의 기술도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힘들어서 그래, 인마."

"하하하."

잠시 후, 그들의 랠리는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철컹! 통통통!

"……야. 솔직히 말해. 너 테니스쳐 봤던 놈이지?"

"그렇지 않다는 건 선배님이 더 잘 알잖아요."

"맞긴 맞는데, 허어……."

하지만, 초보는 맞았다.

구영재의 눈이 혼란에 빠졌다. 진호는 얼굴에 철판을 깔곤 코트를 벗어났다.

"그럼 과외 때문에 먼저가 보겠습니다!"

진호의 선택은 도주였다.

* * *

미영의 집은 한강조망권까지 갖춘 80평대 고급 빌라였다. 으리으리한 내부는 절로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어서 오세요. 지영이는 곧 나올 거예요."

미영은 대체 얼마나 성공했는지 가사 도우미까지 두고 있었다.

"아, 네."

"커피로 드릴까요, 아니면 음료수로 드릴까요?"

"음료수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왠지 앉기가 부담스러운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은 진호는 주위를 둘러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동기나 선배들도 이런 곳에서 고액 과외를 한다고 했지?'

그는 그들에게 과외에 대한 노하우를 많이 들었다.

"이모. 곰돌이 오빠, 아니 진호 오빠 왔다며? 어디 있어?"

핑크색 파자마를 입은 소녀가 어느새 나타나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작은 키에 올망졸망 귀여운 얼굴, 예전의 외모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곰돌이는 모르겠지만, 과외 선생님은 저기 소파에 계세요."

"진호 오.빠?"

순간 눈이 몽롱하게 풀렸던 소녀, 강지영은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 핸드폰에서 본 엄마 애인!"

"쿨럭!"

따뜻한 해우를 준비하고 있던 진호로서는 날벼락을 맞아버렸다.

"뭐야, 엄마 애인이잖아. 괜히 귀엽게 입고 나왔네. 그래도 진짜 잘 생기긴 했다. 당신이 내 새로운 과외 선생님이야?"

진호는 후욱 당기는 뒷목을 꾹꾹 눌렀다.

"지랄."

뚝!

결국, 인내심이 끊기고 말았다.

그녀의 말버릇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야, 핑크 돼지. 이리 와."

지영의 눈이 커졌다.

핑크 돼지, 어릴 적 진호가 불러 주던 애칭이었다.

곰돌이 포우에 나오는 핑크 돼지 처럼 귀엽고 핑크색을 워낙 좋아 해서 붙인 애칭이었다.

"전처럼 똥꼬발랄 싸가지라고 불리면서 엉덩이 맞기 전에 이리와."

첫 만남, 지영은 무슨 이유에선지 진호의 핸드폰을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고, 생에 처음으로 화를 내게 된 진호는 그녀를 엎어 놓고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때렸다. 나중에 듣기로는 자신을 신경 써 주지 않아서 화가나 던져 버렸다고 했다.

"……고, 곰돌이 오빠?"

"내가 갈까, 네가 올래. 너 잡히면 엉덩이로 안 끝난다."

"……말도 안돼─!"

"돼."

진호는 몸을 일으켰고, 하얗게 질린 지영은 계속 다가오는 진호에 반사적으로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그대로 도망쳤다.

"거기서!"

"사, 살려 줘, 오빠! 잘못했어요!"

결국, 붙잡힌 지영은 무릎이 꿇린 채 손을 들어야 했다.

가정부는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떠야만 했다.

"히잉…… 아, 맞아! 뭐야! 나 이제 고등학생이거든! 그때 그 꼬맹이 아니거든!"

벌떡 일어난 지영이 양손을 허리에 얹으며 눈을 부릅떴다.

지영이 푼 문제지를 보던 진호는 그런 그녀를 서늘하게 응시했다.

"그래서 더 맞겠다고? 정말 그때 내 핸드폰 부셨을 때처럼 엉덩이가 불나도록 때려 줄까?"

지영은 첫 만남 때 엔딩을 코앞에 둔 세 번째 스토리가 들어 있는 핸드폰을 아파트 밖으로 던져 버렸다.

진호는 그때, 생에 처음으로 크게 화를 냈었다.

그때의 공포가 아직도 크게 남아 있는 지영은 슬그미니 고개를 돌렸다.

"무릎 꿇고, 손들어."

입술을 삐죽 내민 지영은 다시 무릎을 꿇으며 손을 들었다.

그는 다시 문제지를 살폈다. 미영이 보내 준 지영의 시험 문제지들과 답, 그리고 지영이 다니는, 그리고 다녔던 학교의 10년 전까지의 시험문제들이었다.

'흐음.'

대충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알 것 같았다.

동기들에게 들은 것 중 한 가지 유형의 학생이었다.

탁!

진호는 몸을 움츠리는 지영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잘 지냈어?"

"……히잉!"

지영은 날듯 그에게 안기려다가 멈췄다.

진호는 쭈뻣거리는 지영을 보며 실소를 지었다.

"어이구. 네가 여자냐? 오빠 서운 해진다."

눈을 굴리던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진호에게 안겼고, 그는 그런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헤헤, 내 오빠다."

그렇게 둘은 긴 시간만의 해우를 즐겼다.

"그나저나."

딱!

진호의 주먹이 지영의 머리를 쥐어 박았다.

"악! 또 왜!"

"너 왜 반항해? 이모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아?"

지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진호는 그녀가 왜 반항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집에 들어오기 힘든 미영, 많은 과외. 다시 외톨이가 된 것이다. 특히나 엄마 애인이라는 말.

진호 자신과 지영이 나이 차이가 있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친해 질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서로 외톨이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지영이 밝히지 않았어도, 미영이 계속 데려오자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나마 진호 자신이야 중학생에다가 재준까지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그때의 지영은 초등학생에다가 친구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지영이 그런 짓을 벌였는데도 동생처럼 여기며 참 예뻐 했다.

'어이구, 이모. 이것까지도 여전 하면 어떡해요.'

지영의 아버지는 지영이 6살 때, 병으로 죽었다.

어머니 나진희가 말하길 그때부터 미영은 일에 미쳐 살았다고 했다.

"일단 이제부터 내가 한 주에 한 번씩 영어를 가르칠 거야."

"저, 정말? 정말 이제부터 오빠가 매주 오는 거야?"

"그래. 이모가 70점까지만 올려 달라고 하더라."

"에…… 불가능할 텐데. 나 리스닝도 안 되는데."

"그걸 가능하게 하려고 그 돈을 받는 거지."

진호는 일부러 말했다.

"……오빠도 돈 받아?"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진호는 가슴이 아팠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럼 안 받겠냐? 이모가 뭘 사 줄지 모르는데?"

"……아, 그랬지. 엄마는 오빠한테 약했지."

그녀의 눈에 미약한 질투가 스쳐 지나갔다.

"너한테도 약하니까 만날 너랑 우리 집에 놀러 오셨지. 기억 안나? 이모가 너 먹을 건 직접 준비해서 왔잖아. 체질 때문에. 그래서 우리 집 식탁에서도 유기농만 나오게 됐고."

정말이었다. 이후로 진호 자신의 집 식탁에서는 일반 가공품 햄이나 스팸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몸무게는 계속 늘어만 갔었다. 참으로 미스터리였다. 지영은 해연히 놀랐다.

"몰랐지?"

"으응……."

"암튼 내가 너 중간고사에서 70점 맞게 만든다."

진호는 그녀를 타이르려고 하지 않았다.

이건 누군가 타일러서 될 문제가 아니다.

본인 스스로 이해를 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함께 있어야만 완화되는 것이다.

진호는 자신이 그런 이가 되어 주기로 했다.

"힘들 텐데?"

"걱정 마라. 게임만 하던 이 오빠도 한국대에 갔다."

그녀도 진호가 한국대에 갔다는 말을 들은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녀의 기억 속 진호는 그 포근한 배를 언제든 빌려주면서도 너 때문에 게임을 못하게 됐다며 투덜거리던 친오빠 같은 존재였다. 어떤 투정을 부려도 받아주던 친 오빠.

그래서 이젠 바빠서 갈 수 없다는 엄마 미영의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절망했는지 모른다.

아마 그때부터 엇나가게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일단 이거 다음 주까지 다 외워."

진호는 영어 문장이 빼곡하게 적힌 20장의 A4 용지를 내밀었다.

"무리입니다!"

"외울 수 있을 만큼만 외워. 결과 좋으면 이모한테 말해서 다음 주 토요일에 너 가고 싶은데 데려간다."

"저, 정말? 알았어, 외울게!"

"좋아.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응? 이제 끝 아니야?"

"뭔 소리야, 이제 30분도 안 지났는데. 앞으로 4시간 반 남았어. 오늘부터 이 오빠랑 빡세게 공부 해 보자."

"……이 악마야!"

"응, 그래. 음료수 챙겨서 네 방으로 가자."

진호는 지영을 질질 끌고 갔다.

"아, 안돼! 이모! 살려 줘-!"

* * *

늦은 저녁, 피곤한 얼굴로 한 손에 서류 가방을 들고 퇴근한 미영은 가정부의 이야기를 듣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지영이가 무릎 꿇고 손들었다는 건가요? 애교도 부리고?"

"네에! 그 청년이 아주 쥐 잡듯이 잡던걸요? 지영이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지영이의 그런 모습은 처음 봤어요."

여태까지 그 어떤 과외 선생이 와도 깔보고 비웃던 지영이었다.

"……그럴 수밖에요."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영은 돌봐주지 못했던 것 때문 인지 제멋대로 자랐다.

처음엔 그 조용하던 진호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에 놀랐지만, 이내 지영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놔두었다.

'난 때릴 수가 없었으니까.'

일에 치여 가정을 돌보지 않는 년이 뭐가 그리 잘나서 딸을 혼낼 수 있을까.

이후 진호는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지영의 마음을 얻어 버렸고, 지영은 언제나 그 집에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보했었다.

어찌 보면 지영이 겨우 이 정도만 엇나간 것도 진호 덕분일 수 있었다.

"수업은 어떻던가요?"

"그 선생님 괜찮을까요? 정말 기본적인 회화부터 가르치더라고요."

"걱정 마세요. 그래 보여도 한국대 전체 수석 입학이니까요."

"그래도 오늘 날씨가 어땠냐, 밥은 먹었냐는 좀……."

미영은 튀어나오려던 헛기침을 눌렀다.

"그, 그보다 지영이 반응은요?"

"그게 이상한 게…….정말 열심히 하더라고요."

"……그럼 됐어요. 피곤하실 텐데 가서 주무세요."

가정부가 돌아서자 미영은 와인 잔을 든 채 창가로 향했다.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땐 장난으로 말했는데, 정말 임자를 만나 버렸다.

"역시 널 부른 게 답이었던 것 같구나."

정말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진호를 부른 게 아니었다.

혹시 몰라 도박을 했을 뿐이다. 그녀의 입가가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솔직히 딸이 웃을 수만 있다면, 점수 따윈 상관없었다.

그녀는 왠지 어깨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날로 먹어서는 곤란해, 아들."

그녀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나며 서류 가방을 보았다.

"내일 보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