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1권 13화
격하게 맞이해 주는 장덕제에 진호도 웃는 낯으로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형. 저기억 안 나요? 3년 전에 이 앞에서 이상한 짓거리 하다가 형이랑 같이 옷 떼러 다녔던 그 뚱뚱한 놈이요."
"……마, 말도 안돼!"
"기억나세요?"
"당연히 기억이 날…… 말도 안돼."
3년 전, 이곳에 가게를 오픈하고 며칠 후, 장덕제는 가게 앞 빈 공간에서 생쇼를 하는 진호를 보게 되었다.
대체 어떻게 들어오는 것인지 새벽에 들어와 핸드폰 앞에서 마치 옷판매를 하는 시늉을 하던 진호. 그것이 리셋 라이프 때문임을 몰랐던 장덕제는 어린 것이 벌써부터 일을 하려는 것으로 오해하여 음료수도 사 주고, 옷을 떼는 법이나 가게도 가르쳐 주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타나지 않아 곧 잊어버렸지만 말이다.
"말이 되더라고요. 그때 진 신세 갚으려고 왔어요. 요새 잘 나가는 스타일이 어떤 거예요?"
작은 옷가게로 시작해 끝내 우리 나라 인터넷 쇼핑몰, 아니 의류 기업의 사장이 되는 스토리를 관통하는 화술 관련 스킬을 얻기 위해 거의 보름 동안 이곳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부끄럽고 사람이 무서워 오직가 게 주인들만 있는 새벽에 왔었지만 말이다.
만약 리셋 라이프가 리얼 타임 게임이었다면 정말 골치 아팠을 것이다.
"이, 이게 우리 가게에서 나온 신상인데, 한번 입어 봐……요."
남색 셔츠에 스키니 핏의 베이지 색 면바지.
무난하면서도 깔끔한 스타일이었다.
재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진호는 눈을 빛냈다.
"말 편하게 하세요. 그리고 신발은 저걸로 주세요. 저게 어울리겠네요."
하얀색 캔버스 화였다.
"다 입어 봐도 되죠?"
"그, 그럼. 저기서 갈아입으면 돼…… 요."
진호는 참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예전에는 땀 묻는다고 만지지도 못했는데.'
장덕제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옷가게들은 모두 그랬다.
촤락!
커튼이 걷히자 장덕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닌 척 주위를 맴돌며 지켜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브, 브라보!"
저게 정말 자기네 옷이 맞나의 심이 가득한 장덕제의 눈빛.
진호는 멍해진 재준을 보았다.
"어때? 명품 맞지?"
"……하씨,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네. 진즉에 그렇게 입지, 새끼야!"
그냥 브랜드도 아니고 고급 명품 브랜드 옷처럼 보였다.
"사진 찍어 줘. 여기 핸드폰."
"……가지가지 한다, 진짜."
진호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 가벼운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옷의 품격은 한층 더 높아졌고, 주위에서 감탄이 터졌다.
"미친."
찰칵!
찍은 사진을 확인한 재준은 한 번 더 놀랐다.
핸드폰으로 대충 찍은 사진임에도 빛이 나고 있었다.
"괜히 보그 화보를 찍은 게 아니었구나?"
"어디 봐 봐."
핸드폰을 가져온 진호는 자신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SNS에 접속해 사진을 등록했다.
어깨너머로 보았던 장덕제는 눈을 부릅떴다.
[#생에 처음으로 한 코디. #이 정도면 괜찮나? #동대문 두타몰. #덕제 형님. #좋아요?]
"너 SNS도 했냐?"
"학과정보나 일정을 알려면 페이탈 북 계정이 필요하다고 해서 이번에 만들었어."
'그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지만.'
하얀색 캔버스화는 스스로 골랐으니 코디는 코디였다.
그렇게 등록한 진호는 고맙다는 듯 재준을 보았다.
'이제 남은 건 SNS에서 어떤 스타일이든 좋아요 천 개 이상을 받는 건가?'
그렇게 되면 '우리 동네 패셔니스타'라는 스킬을 얻게 된다.
패션 감각은 유달리 뛰어났지만, 벽촌 시골 출신이라 인정을 받지 못하던 주인공이 SNS란 세상을 만나면서 성공을 하게 되는 '앙드레 Lee예요'라는 스토리의 스킬이었다.
당시엔 해방촌이 그 시골 벽촌로 바뀌었다.
[스킬 : 지성이면 감천이다]를 얻은 선본사가 청담동 봉은사로 대체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좋아요 천 개만 받으면 더 이상 패션 고자라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다.
스킬의 2차 해금 조건은 미용실에서 패션 잡지 10권을 읽는 것이었다.
진호는 당분간 SNS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동기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너 페이탈 북에 글 올렸더라?
"……빠르네."
-전에 친추했잖아, 멍충아. 그런데 옷 되게 멋지다. 평소에도 그렇게 입고 다니지. 어디 브랜드야?
"음…… 버킷. 버킷 리스트의 그 버킷. 아는 형님 가겐데, 동대문 브랜드야."
-오! 그럼 값도 싸겠네. 쇼핑몰도 하셔? 곧 동생 생일이라서 한 벌 사 주려고. 스타일이 웬만한 브랜드보다 낫네.
진호는 어느새 바로 옆에 다가와 있는 장덕제를 보았다.
"형, 여기 아직도 인터넷 쇼핑몰 하죠?"
"……그, 그럼! 당연하지! 이름은 같습니다! 버킷닷컴!"
"그런다네. 아, 전화 온다. 월요일에 봐."
발신자를 확인하니 또 동기였다.
역시나 같은 용무였고, 그런 식으로 몇 번 전화를 받은 진호는 아예 비행기 모드로 돌려 버렸다. 전화 대신 코코아 톡이 쌓이고, 그가 올린 사진 아래로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좋아요 숫자도 순식간에 50개를 돌파했다.
"좋아, 좋아."
"쳇, 인기 많아서 좋겠다."
"고3까지는 지가 이래 놓고. 헛소리 말고 다른 거나 찍어 줘."
"아예 뽕을 뽑아라."
"3만 원대 뷔페가 싼 건 아니지?"
진호는 오늘 뷔페를 먹이로 재준을 꼬셨다.
"구천구백 원까지 꽉꽉 채울 거다!"
"그러든가. 형, 다른 옷 좀 추천 해 주세요."
"……저기, 진호야."
"네?"
조심스럽게 진호를 불렀던 장덕제의 눈빛이 돌변했다.
"아니, 손님!"
진호는 갑자기 손이 잡히자 깜짝 놀랐다.
"왜, 왜 이러시는지……."
너무도 간절한 눈빛에 손을 뻘 수도 없었다.
"지금 입은신 옷, 아니 원하시는 옷 다 드릴 테니까 사진 몇 장만 찍어 주라! 아니 찍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내일이면 고아원에 줘 버렸을 거! 보그 화보도 찍었다잖아!'
장덕제는 마지막 도박이라는 생각으로 크게 질렀다.
진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은은하게 웃었다.
"그런 걸로 도울 수 있다면 당연히 해야죠. 전에 형이 그렇게나 도와줬는데요. 아, 그런데 식사는 주죠?"
"4만 원, 아니 한우 스테이크라도 사 줄게! 사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고요. 삼겹살이면 돼요. 요 앞에 맛 집 있잖아요."
진호는 재준을 보았고, 일련의 상황에 어이없어 하던 재준은 고기란 말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거래가 성립되었다.
* * *
촬영은 장덕제가 급히 대여한 근처의 스튜디오에서 했다.
난생처음 하는 경험이라서 그런 지, 아니면 식사 외에도 옷을 몇 벌 얻게 돼서 그런지 재준도 군소리 없이 자리를 지켰다.
총 3시간의 촬영.
진호는 내가 제일 잘 나가 스킬을 마음껏 발휘했다.
만족스런 결과에 결연한 표정을 지은 장덕제는 다음에 연락하겠다며 연락처만 교환하고는 부리나케 사라졌고, 오늘 갈아입은 수십 벌의 옷들은 진호와 재준의 소유가 되었다.
식사는 현금으로 갈음되었다.
"거참, 어떻게 옷을 사러 와서 돈을 벌 수 있는 거지? 인생 참 불 공평하네."
"그게 내가 지난 7년 동안 너한테 느끼던 감정이었어, 인마."
어려서부터 그랬다.
같은 값을 치러도 재준은 서비스를 받았고, 진호는 그 받은 서비스를 나눠 먹어야만 했다.
못마땅해 하는 어른들의 표정을 받으며 말이다.
그 부러움, 비참함.
사춘기 전부터 함께했던 친구가 아니었다면 벌써 멀어졌을 것이다.
"하아……."
과거를 떠올리자 살짝 언짢아진 진호는 이걸 때릴까 하다가 그만 두며 페이탈 북을 확인했다.
그 짧은 사이에 좋아요가 100개를 돌파했다.
"좋아, 학교에도 퍼지고 있군."
타 학과임을 밝히고 쓴 댓글들도 세 개나 있었다.
장덕제에게 은혜를 갚은 것도 있으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
"야, 이거 봐라. 너 아니냐고 묻는다. 이거 너 맞지?"
"뭘…… 응? 나네?"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는 모습이었다.
"큭콕, 흔한 동네 오빠란다. 미친, 이건 또 언제 찍혔냐?"
"몰래 찍히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학교에서도 매일 셔터 소리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재수 없네. 그래도 뭐, 네가 요새 좀 동네에서 유명하긴 하지?"
그냥 유명한 게 아니었다.
동네 아주머니들 모두가 일등 사윗감으로 꼽고 있었다.
'아, 그래서 엄마가 운동 멤버가 늘었다고 했구나.'
"밥이나 먹자."
* * *
"음! 역시 비싼 값을 하네!"
점심부터 삼겹살이었지만, 참 맛있게 넘어갔다.
좋은 일을 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식사는 그렇게 장덕제에게 받은 식비와 진호가 재준에게 약속했던 식비까지 모두 탈탈 털고 나서야 마칠 수 있었다.
"……돼지 새끼."
둘이서 먹은 삼겹살 값만 16만 원이 나왔다.
"지도 4인분을 처먹어 놓고는."
진호는 입을 다물었다.
팩트라 할 말이 없었다.
"이진호?"
"응?"
고개를 돌렸던 그는 놀라고 말았다.
아담한 체구에 통통한 볼살을 지닌 여성.
"맞구나! 나 기억 안 나?"
'기억나지. 기억날 수밖에 없지.'
중학교 첫사랑이었으니 당연히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뛰어난 두뇌는 쓸데없는 것도 떠올려 버렸다.
외모는 옛날 그대로, 화장했다는 것만 달랐다.
"오랜만이다, 보라야."
"어머, 나 기억하는구나!"
"그럴 수밖에 없지."
'네가 날 그렇게 잔인하게 찼으니까.'
'뚱뚱한 여드름 돼지는 싫어!'라면서 악을 쓰며 외쳤다.
소각장 앞에서 고백했는데, 학교 안에 있는 재준이 들었을 정도였고, 반년 후에 보라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 버렸다.
그 때문에 사람들과 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그래? 헤헤헤. 아,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커피라도 한 잔 할래? 나 정말하고 싶은 말이 많거든! 흔한 동네 오빠로 유명해진 너에 대해서도!"
'SNS 때문에 알아본 거였군.'
어머니도 처음엔 완전히 변한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 그건 내가 사정이 있어서 안 될 것 같다."
진호는 들고 있는 짐과 재준을 가리켰다.
"만나서 반가웠어. 이쪽에 일 보러 온 것 같은데, 수고해."
신보라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 잠깐만!"
"왜?"
"해, 핸드폰 번호 좀 알려 줄 수 있을까?"
"그건 힘들 것 같아. 아니, 안돼. 이유는 너도 알잖아."
진호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우, 웃겨! 내가 너한테 작업 거는 줄 알아? 어? 얼굴 그거 어차피 한순간이야!"
왠지 속이 후련했다.
과거의 얼굴마저 흐릿해져서 그런지 더 후련했다.
"가자."
"……푸하핫! 그래, 가즈아─!"
그렇게 걷던 둘은 갈림길이 나오자 멈춰 섰다.
재준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너 오늘 좀 멋있더라. 진즉에 이러지!"
"흐흐. 그래?"
"그래, 아주 말로 조곤조곤! 캬흐!"
유치하게 깔아뭉개지 않아서 더욱 좋았다.
재준은 변한 친구의 모습이 너무도 기꺼웠다.
"아, 맞아. 엄마가 이번엔 꼭 벚꽃 여행 같이 가자고 하던데, 가능 하겠냐?"
진호가 미간을 좁혔다.
"글쎄다. 아버지가 월차를 내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
재준이네는 주말이 바쁘고, 진호네는 평일이 바쁘다.
그래서 계속 시간이 맞지 않았다. 두 가족이 함께 마지막으로 여행을 갔을 때가 벌써 2년 전 9월, 시즌이 모두 끝난 여름 바다였다. 그때도 겨우 날짜를 잡은 것이었다.
"일단 말씀은 드려 볼게."
"그래, 알았어. 수고."
"응. 너도 수고."
그렇게 재준이 멀어지자 진호는 기지개를 펴며 하늘을 보았다.
3월의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스킬 : 우리 동네 패셔니스타.]
[패션은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내게 잘 맞으면 그것이 패션이고 스타일이다. 하지만, 패션 고자는 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