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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10화 (10/424)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1권 10화

"아니야! 이게 아니야!"

조금은 난잡하게 꾸며진 공간. 선이 몇 개 그려진 스케치북이 날아 갔다.

"후우."

통통한 체구의 중년인은 짧은 머리를 뒤로 넘겼다.

유난히 큰 눈망울이 그의 슬픔을 더욱 크게 비췄다.

그는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일어섰다.

그가 좋지 않은 표정으로 수석 디자이너 실을 빠져나오자 커다란 사무실에서 바삐 움직이던 다른 디자이너들은 숨을 죽여야 했다. 그걸 알아차렸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그는 모두 무시하며 길거리의 카페로 향했다.

"결국, 난 안돼는 건가."

커피의 향기가 머리를 식혔지만, 그 반동으로 그가 가진 부담감의 원인도 상기시켰다.

이번 6월 파리 패션 위크에서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여야 했다.

지금 일하고 있는 브랜드가 추구하는 궁극의 우아함 속에 자신만의 철학을 녹여야 했다.

이전에 있던 브랜드와 그리 좋지 않게 헤어졌기에 부담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땐 라커펠트 씨가 부럽군."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를 나라의 가수를 뮤즈라고 떠들고 다녔을 때만 해도 드디어 치매가 왔나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너무도 부러워 미칠 것 같았다. 시인과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 주는 여신 뮤즈. 그것은 신화나 음악에만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와, 이 브랜드가 동양인 모델을 쓸 줄 몰랐는데?"

"슈트가 너무 편해 보인다. 우리 자기나 한 벌 사 줄까?"

'그게 옷이고, 패션이지.'

그가 생각하는 패션의 정의는 입고 싶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무리 우아하고유니크해도 팔리지 않는다면, 그건 실패한 디자인이었다.

때문인지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그는 옅게 웃으며 옆자리를 바라 보았다가 그대로 시선이 붙들려 버렸다.

창공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르는 한 마리의 흑조가 있었다.

폭군이 하찮은 거리에서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우아함 속의 캐쥬얼, 일상의 아름다움이 그 속에 있었다.

그가 추구하는 패션 철학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퍼엉!

머릿속에서 감성이 폭발했다.

온갖 선들이 거침없이 뻗어가며 옷의 윤곽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 옛날 경이로운 자연을 보았을 때의 감동이 다시 밀려왔다.

그는 다급히 작은 연습장을 꺼냈다.

슥슥슥슥슥슥!

단 삼십 분.

그가 손을 됐을 땐 다섯 벌의 디자인이 완성된 뒤였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물에 경악하고 말았다.

그는 급히 옆자리의 여성들을 찾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급해졌다.

"차, 찾아야 해. 그 모델을, 아니 나의 뮤즈를 찾아야 해!"

그 여성들이 보던 잡지는 분명 보그였다.

* * *

입학식이 끝난 후 술자리 같은 건 없었다.

다만 다음 달 초에 있을 MT에서 기대해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 덕분에 꽤 각오를 하고 있었던 진호로서는 맥이 풀려 버렸다. 하지만 결국 뒤로 미뤄진 것뿐이었다.

"술 관련 스킬을 얻어야 하나?"

"네?"

"아뇨. 여긴가요?"

학생회관 건물. 외부는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지만, 내부는 굉장히 세련되고 깔끔했다.

고등학교와 대학, 그 한 단계만 넘어왔을 뿐인데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대학원생을 포함해 만 명이 넘는 인원이 한 학기에 수백만 원이 넘는 돈을 내고 다니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조명 기구와 삼각대에 거치된 카메라 등이 있는 스튜디오가 나타났다. 그렇다. 지금 진호는 수석 입학자로서 인터뷰를 하러 온 것이었다. '한국내일'이라는 오만해 보일 수 있는 이름을 가진 교내 잡지였다.

국내 최초의 대학 잡지임과 동시에 전국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한 잡지인 '대학의 내일'의 모티브가 된 한국내일.

그런 자부심과 최고 지성이라는 자긍심 때문인지 지금도 이름을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대단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진호를 발견하곤 순간 얼어붙더니 이내 비명을 지르면서 얼굴을 가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대부분, 아니 스튜디오 안에 있던 사람들 전부가 여자였다.

"하하. 이, 이쪽에 앉으시면 돼요."

진호를 이곳까지 안내해 주며 여러 이야기를 해 준 여성은 왠지 해탈한 표정으로 조명 한가운데에 있는 붉은 소파를 가리켰다.

소파는 단단하면서도 푹신했다.

"음료수? 커피?"

"커피로 부탁드릴게요."

"봉지 커핀데 괜찮죠?"

"당연하죠. 아, 말 편하게 하세요. 저보다 연상이시잖아요."

"윽!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커피를 받아든 진호는 못 들은 척 스튜디오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밖으로 뛰쳐나갔던 여성들이 예뻐져서 돌아왔다.

옷도 달라져 있었다.

"나도 데리러 가지 않았으면 화장을 했을 텐데…….'

진호는 원망스러워 하는 눈빛을 한 번 더 무시했다.

"하아, 일단 사진부터 몇 장 찍고 갈게요. 포즈 부탁해요."

"어떤 포즈로 할까요?"

순간 여성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일단은 '내가 왕이다'라는 느낌으로."

"……네?"

"전체 수석 입학자의 패기부터 보도록 하죠. 최대한 거만한 모습을 취해 봐요."

"흐음. 뭐, 그러죠."

진호는 소파의 등받이에 등을 눕는 듯 기대며 가슴께에서 깍지를 끼고는 모든 걸 깔보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

"헉!"

"어머!"

마치 진심으로 깔보는 듯한 눈빛에 그들은 울컥하면서도 안절부절 못했다.

그렇게 우왕좌왕이 계속되자 진호는 눈빛을 풀며 입을 열었다.

"사진 안 찍나요? 자세가 좀 힘든데……."

힘없이 처량한 눈빛.

천하의 개싸가지인데 너무 잘 생겨서 미워할 수 없는 나쁜 남자가 순식간에 비 맞은 강아지, 초식 미남이 되었다.

여성들은 입을 헤 벌렸다.

"……아, 아! 찌, 찍어요! 아까 그 표정 다시 해 봐요. 대신 눈에 힘 좀 빼고. 적당히 패기 있게요."

"아, 네."

내가 제일 잘 나가 스킬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았다.

바로 오케이 사인이 나왔다.

"자, 한 번만 더!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다시 한 번만!"

찰칵, 찰칵, 찰칵! 좌라라라라! 진호는 이게 교내잡지를 위한 사진 촬영인지 아님 화보를 위한 촬영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물론 이 자체로서도 꽤 신선한 경험이지만,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득이 없는 일에 이 이상의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었다.

"저기요. 계속 찍으실 건가요? 저 이제 시간 없는데요."

"……아. 아! 야! 그만해! 그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사진사는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괘, 괜찮아요? 미, 미안해요! 내가 너무 흥분했어요!"

"……후, 괜찮습니다. 이제 인터뷰 시작하시죠?"

진호를 데려온 여성은 사진사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진호에게 다가갔다.

"일단 이거 마시고 화 풀어요. 알 지는 모르겠지만, 이 학교에서 미남 보기 힘들어서 그랬던 거예요."

"네에."

"……호호. 그나저나 정말 잘생겼네요. 본인이 잘생긴 거 알죠?"

"요즘 들어 매일매일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쿡. 그쪽 때문에 학교 대나무 숲이 난리 난 것도 알아요?"

"네?"

대나무 숲은 SNS에서 운영되고 있는 커뮤니티다.

한국대학교 대나무 숲, 가람대학교 대나무 숲 이렇게 말이다. 진호는 여성이 보여 주는 핸드폰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입생 대표 존잘!

┗우리 대학교에도 연예인이 들어왔구나!

┗흔한 한국대생.

게시판이 난리였다.

이런 건 처음 봐서 그런지 놀란 진호는 이내 머리를 긁으며 쑥스러워했다.

여성은 그런 진호의 모습에 눈을 빛냈다.

"후후, 그럼 이제부터 인터뷰를 시작해 볼까요?"

"아, 네."

진호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 * *

정작 인터뷰 내용은 그리 대단한 게 없었다.

공부 비법이라든지 앞으로의 포부, 계획 등을 물었고, 진호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다.

동아리의 목적성이나 진짜 목적이라든지, 학생이 맘대로 고를 수 있는 교양 과목은 결국 한 개라든 지, 등등 인터넷으로는 알기 힘든 알찬 정보들이었다.

사진을 오래 찍은 것이 미안했는 지 그들은 각 동아리와 각 교양 과목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프린트해서 주기도 했다.

교수의 성향, 수업 내용 등 그 정보의 양이 굉장히 방대하고 많았지만, 진호는 감사히 받았다. 인터뷰가 끝난 후 여성들이 술 한잔하자며 은근히 권유해 왔지만, 진호는 정중하게 거절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와, 한국대 빡세네. 어떻게 교양이 세 과목이나 정해져 있냐?"

재준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커다란 편의점. 유니폼인 앞치마를 입은 재준이 얻어맞은 왼 팔뚝을 문지르며 말했다.

재준의 부모님은 이제 재준도 대학생이니 네 용돈은 네가 벌라면서 이렇게 아르바이트를 시켜버렸다.

두 배의 시급을 미끼로 말이다.

"그러니까…… 하아."

덕분에 계획이 조금 틀어지고 말았다.

"너흰 어때?"

"우리? 교양 과목은 모두 마음대로지. 너무 많아서 고르기가 힘들다."

"필수 교양은?"

"없는데?"

"……너희 학교에 갈걸 그랬나?"

"지랄. 너 내신하고 봉사 활동이 꽝이라서 못 와, 인마. 그래서 남은 한 가지 교양 과목은 뭘로 정 할 건데?"

"음악으로의 여행이라는 기타 연주. 수강 신청 변경할 거다."

"엥, 왜?"

"살면서 악기 하나는 연주할 줄 알아야지. 그리고통기타 메고 전국 돌아다니는 거 로망이잖아."

"……지금이 쌍팔년도냐."

사실 과목 이름도 쌍팔년도였다.

'이딴 게 친구라니!'라는 경멸이 가득한 재준의 눈빛에 진호는 눈동자를 굴렸다.

"내가 인터넷 좀 하라고 했지! 인터넷 방송 좀 보고!"

"했는데?"

"리셋 라이프 자료 조사한 거 빼고!"

진호는 입을 다물었다.

정답이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 있었다.

"야, 솔직히 생각해 봐라. 여름날 해변 가에서 내 얼굴로 통기타까지 치고 있어. 거기에 너도 있어. 눈과 귀를 다 자극하는 거야. 여자가 몰리겠냐, 안 몰리겠냐."

이제 대학생이고 성인이었다. 거리와 날짜에 제약을 받지 않고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그래서 시간에 쫓겨 다른 교양을 선택했던 그 선택을 고치기로 한 것이었다.

굳이 돈 주고 학원에서 배울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학교를 다니며 비싼 등록금을 내고 있으니 말이다.

"……몰리지."

"그림이냐, 아니냐."

"그림이지. 아주 감상하려고 바글바글할걸."

"거봐. 클래식한 건 시대를 불문 하고통하는 거야. 너 여름에 바다 안 갈 거야? 가서 그냥 재미없게 대화만 나누면서 술만 마실 거야?"

"……가야지. 추억은 많이 남겨야지. 아씨, 이러면 할 말 없는데. 얘가 언제부터 이렇게 논리적이 됐지?"

"자, 이제 이 형님의 선택이 어떠냐."

"……씨불."

재준은 졌다는 듯 얼굴을 구기면서도 엄지를 치켜세웠다.

진호는 옅게 웃었다.

"그리고 나 MT 때 장기 자랑도 단독으로 해야 한다. 새터 안 왔다고 다들 벼르고 있다더라."

선배님들의 눈빛을 떠올린 진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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