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1권 8화
공간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뭐래! 미쳤냐?"
"오빠, 팔꿈치에 찍혀 볼래요?"
최후의 1인은 3학년만 되는 게 아니었다.
관계가 다시 방금 전처럼 거침없어지자 진호는 속으로 웃었다.
괜히 겉으로 웃었다가는 다시 어색해질 수 있었으니까.
"음?"
왠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던 남자 종업원의 서비스 때문에 남들 보다 한 단이 더 높은 젤라또를 베어 물며 걷던 진호는 저 앞에서 소란이 일자 절로 시선이 빼앗겼다.
"좀 더 당당하면서도 역동적이게! 아니야! 그런 자세가 아니라고! 다리만 강하게 뻗는다고 다가 아니야! 빌어먹을! 때려치워!"
덴디한 수염이 인상적인 40대중 반의 사진작가가 화를 내며 물러 서자 촬영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슈트를 입은 20대 초반의 모델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울상을 지었지만, 누구도 그런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곳은 냉혹한 프로의 세계였다.
"후우, 잘 들어 둬. 난 앞으로 저 에이전시 소속과 일 안 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 브랜드를 어떻게 보고!"
젊은 여성 관계자의 말에 사진작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다 보니 달궈졌던 머리가 식었다.
"내 요구조건이 그렇게 힘드나? 그냥 저렇게 당당하게 걸으면 되잖아! 그래! 저렇게 당당……."
한 곳을 보는 사진작가와 젊은 여성 관계자의 눈이 멍해졌다. 그곳엔 완벽한 피사체가 있었다.
"……데려와. 어떻게든."
"동양인인데요?"
"뭔 상관이야. 저렇게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데."
"풋, 저쪽 에이전시와의 계약은 정말 파기네요.
* * *
커다란 조명 판에요란한 셔터 소리와 몰려 있는 사람들을 구경 하고 있던 진호는 깜짝 놀랐다.
"촬영이요?"
여성용 정장을 입은 젊은 여성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혹시 에이전시가 있나요?"
"……아뇨. 여행 온 학생이라서요."
첫날 만난 에이전시를 떠올렸던 진호는 이내 일행들을 가리키며 크게 아쉬워했다.
만약 혼자 여행을 왔거나 혼자만의 자유 시간을 가지고 있는 중이었다면 무조건 승낙했을 제의였다.
"죄송합니다. 제의는 고맙지만, 일행들 때문에 힘들 것 같네요."
"아……."
여성은 어깨를 늘어트렸고, 여학생들은 눈을 빛냈다.
"진호야, 무슨 일이야?"
진호는 상황을 설명했다.
"뭐? 진짜? 해! 해도 돼! 우리들 때문이라면 신경 쓰지 마!"
"맞아! 우린 근처에서 놀고 있을 게!"
뭣 때문인지 흥분한 여학생들이 대동단결해서 외치자 남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인솔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진호는 그런 그들의 모습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원래 보물은 공유하는 거야!"
"아, 그러냐……."
고개를 저은 진호는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고 얼굴을 밝아진 여성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래서 돈은 얼마나 주나요?"
경험은 경험이고, 돈은 돈이었다. 부모님 선물을 사면, 용돈이 간당 간당했다.
* * *
"그런데 프로 모델 맞나요?"
"아직은 유명하지 않아서 에이전시가 없을 뿐이죠."
진호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괜히 불신을 심어 주는 것보다는 이편이 나았고, 스킬을 믿었다.
"당신의 나라는 정말 놀라운 곳 이군요. 아, 여기서 스타일링을 받으면 돼요."
"이거 하나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죠. 오늘 이후로는 절 부르지 않겠다는 것. 어차피 내일이면 밀라노에 없을 테지만요."
진호는 녹음 어플이 켜진 핸드폰을 내밀었다.
"……좋아요. 대신 당신도 진심으로 해 줘요."
"당연하죠."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니 꽤 많은 여성들이 화장품과 슈트를 든 채 대기하고 있었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옷을 벗고 있는 모델도 함께.
부드럽고 섬세한 터치에 얼굴이 실시간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소년의 순한 눈매는 어느새 이글 거리는 사나이의 그것이 되었고, 수더분하게 내린 헤어는 뒤로 넘겨져 신사처럼 보이게 했다.
'역시 화장은 위대하구나.'
순간 메이크업 스킬을 익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했다.
"이번 촬영의 콘셉트는 운동복처럼 편한 슈트예요. 잠을 잘 때도, 요리를 할 때도, 달릴 때도. 이 정도면 충분하죠?"
스태프는 진호가 베테랑이라는 전제조건하에 설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진호는 모두 알아듣다 못해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할지 떠올리고 있었다.
티비나 잡지 등에서 봤던 자세들.
얼마든지 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나고 있었다.
미약한 걱정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물론이죠."
"휴우, 다행이네요. 다 된 것 같으니 나가시죠."
고개를 끄덕이며 간이 천막을 나선 진호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와."
"오우."
당당한 눈빛에 쫙 펴진 어깨.
마치 거인이 걸어나오는 것 같았다.
목을 빼고 기다리던 스태프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사진작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진호는 그런 그들의 반응에 더욱 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훌륭해!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군! 콘셉트는 들었나?"
"당연히. 어떤 주문을 해도 괜찮습니다."
재주넘기 같은 것만 아니면 됐다.
"하하핫! 그 자신감이 허세가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라지! 시간이 없어서 빠르게 갈 거야. 따라 올 수 있겠지?"
"준비됐습니다."
"좋아! 그 앞에 축구공이 보이지?"
사진작가는 빠르게 오더를 내렸다.
슛 모션을 취해 달라는 오더였다.
다만 단서가 붙었다.
'당당하면서도 강인하게!'
진호는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디딤발을 강하게 내디뎠다.
"멈춰!"
멈칫! 공을 향해 쇄도하던 발이 마법처럼 멈췄다.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진호도 놀라을 따름이었다.
'내가 제일 잘 나가에는 이런 능력도 있구나.'
아마도 모델 일 한정일 것이다.
반면 사진작가는 환희를 느꼈다.
자신이 생각한 이상적인 자세가 뷰파인더 속에 있었다.
"그대로 조금만 버텨─!"
찰칵! 찰칵! 찰칵!
"좋아! 최고다! 턱을 좀 들고 오만하게! 훌륭해! 조금만 더! 그래, 그거야! 다음 자세로 가자!"
사진작가는 다시 오더를 내렸고, 진호는 발레리나처럼 깨금발을 서며 허리를 꺾었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려는 듯한 날갯짓.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포즈가 취해져서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하지만.
'즐겁다!'
원해 왔던 새로운 이벤트에 너무도 즐거워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느낄수록 진호의 몸짓은 더욱 거침이 없어졌다.
"멋지다! 사랑스러워! 눈에 갈망을 담아서 한 번 더! 그렇지! 왜 이제야 나타난 거야! 좋다-!"
기쁨에 찬 외침은 계속되었고, 공간은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하며 지켜보고 있던 모델은 결국 눈물을 삼키며 돌아섰다.
* * *
"오늘 찍은 사진은 다음 달 보그지에 실리게 될 거야. 그나저나 정말 아쉬워. 우리 브랜드의 전속 모델이 되어 줬으면 싶었는데 말이야."
"그 문제는 당신이 더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생각해 보죠."
분명 촬영은 즐거웠지만, 어딘가에 얽매이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래서 진호는 정중하면서도 유쾌함을 담아 거절했다.
"끙. 그래도 내 개인 촬영에는 응 해 줄 거지?"
"당신이 한국에 온다면 생각해 볼게요."
"약속한 거야!"
사진작가는 진호가 혹여 말을 바꿀까 바로 도망쳤고, 진호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이탈리아 사람은……. 아, 저기요. 이 옷은 어떻게 하죠?"
탈의실이 철거되고 있어서 꽤 난감했다.
"그냥 입고 가시면 됩니다. 촬영을 오늘 안에 끝마치게 도와준 것에 대한 본사의 선물이에요."
왠지 다른 속내가 숨어 있는 듯 한 눈빛이었지만, 어쨌든 공짜였기에 진호는 감사함을 표했다.
싱긋 웃은 스태프는 등을 돌렸고, 진호는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행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일행들이 한껏 상기된 얼굴로 달려왔다.
그렇게 밀라노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 갔다.
* * *
그으으으으!
"음."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아뇨. 괜찮아요."
"아, 그러신가요."
빠르게 다가왔던 승무원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음, 그럼 맥주 한 캔 더 주실래요?"
"네, 알겠습니다. 손님!"
"고맙습니다."
온화하게 웃은 진호는 멀어지는 스튜어디스를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대학…….'
앞으로 보름 후면, 대학 입학이다.
한국대에선 과연 어떤 일이 있을 지 몹시 기대되었다.
어제와 같지는 않겠지만, 난생처음 겪어 보는 상황들이 펼쳐질 것이다.
그게 흥분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니지. 일단은 로마지.'
로마에서도 특별한 일이 생겼으면 싶었다.
진호는 애써 흥분을 누르며 잡지를 펼쳤다.
눈을 감고 있던 김승미는 그런 진호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스킬 : 내가 제일 잘 나가]
[사람이 언제 제일 잘나진다고 생각하나. 열심히 일할 때? 전문 지식을 뽐낼 때? 돈을 뿌릴 때? 아니다. 타인이 나를 볼 때다. 주목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따로 있다.]
3.
싹아아아아!
차가운 물이 쏟아지며 몽롱한 정신을 깨웠다.
탁!
수도를 잠근 진호는 거울 앞에서며 머리를 뒤로 넘겼다.
"진짜 잘생겼네."
매일 몇 번씩 보는데도 매번 감탄이 나왔다.
그런데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다. 몸 또한 일반적인 모델처럼 마르기만한 게 아니라 적당한 근육을 두르고 있었다.
적당히 넓은 어깨에 식스팩.
"그래도 가장 마음에 드는 건…… ."
슬쩍 밑을 본 진호는 씩 웃었다. 살 속에 의외의 것이 파묻혀 있었다.
이젠 대중목욕탕에 가도 부끄럽지 않았다.
대충 바지만 걸친 그는 화장실을 나섰다.
화장실 밖의 풍경은 일반적인 가정집이었다.
"다 씻었으면, 얼른 밥 먹으렴. 아들."
"옙!"
로마에서는 별일이 없었다.
밀라노에서처럼 바로크에 대해 공부했고,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나 음악, 미술들을 보았다.
중간중간 모델 에이전시에서 명함을 받고, 헌팅도 여러 번 당했다.
딱 그 정도뿐이었다.
드르륵!
자리에 앉은 진호는 아침부터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있는 어머니를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닮겠다."
"호호. 우리 아들이 사준 첫 선물인데,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녀야지!"
나진희는 진호가 밀라노에서 사 온 스카프를 목 뒤로 넘겼고, 진호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얘는, 이 엄마만 그런 줄 아니? 네 아빠도 차고 나갔어."
"그랬어?"
아버지에게는 시계를 사 드렸다.
본래 아버지는 십 년 전 어머니가 결혼 십 주년 선물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사 준 시계만 차고 다녔다.
"그랬어. 아주 얼마나 당연하게 집던지…… 어휴. 남편 뒷바라지해 봐야 영 헛일이지. 헛일이야."
"끙, 엄마."
"호호호."
피식 웃은 진호는 속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더 일찍 사드리지 않은 옛날의 자신을 질책한 진호는 미안함을 감추고자 밥을 크게 떠서 입에 가져갔다.
그래도 큰돈을 쓴 보람이 있어서 뿌듯했다.
통장 잔고가 확 줄었지만,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나진희는 그런 진호를 빤히 바라 보다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들,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