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1권 7화
진호는 방금 하나를 배웠다고 생각했다.
게임만 하느라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떨어진다는 걸 자 각하고 있던 그로서는 꽤 큰 배움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진심, 적극성. 맞아,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거야. 제대로 살려면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겠어.'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다시 아침식사를 즐겼다.
빵에 커피만 먹었을 뿐인데, 왠지 밀라노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 * *
오전엔 밀라노 대학교에서 간단한 이탈리어와 함께 바로크 시대에 대해 배웠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건물들이 즐비한 곳에서 현지역사 교수가 알려 주는 바로크 시대는 굉장히 재밌고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종교 개혁에 대항하기 위해 미술로서 대중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확장하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과 중산층의 등장, 절대왕정의 강화, 과학의 발달과 세계 탐험에 의해 자극된 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심 과 지적지평의 확대.
마치 예술의 발전을 위해 일련의 상황들이 일어난 것 같았다.
그런 역사를 알고 나자 밀라노의 고풍스런 건물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탈리아 국민들의 유쾌한 모습도 말이다.
대학교에서도 그들의 유쾌함은 여전했다.
서슴없이 모델이냐, 너 같은 애가 우리 학교에 있었냐는 질문을 던져왔고, 사진을 같이 찍자며 다가왔다.
개인 전화번호도 거리낌 없이 적어 줬다.
방금까지 입고 있던 속옷에도 적어 줘서 경악하기도 했다. 남녀노소.
이런 예술적인 문화가 번성했기에 그렇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진호는 이런 이탈리아를 더욱 겪어 보고 싶었다.
* * *
"끄응. 끙."
무언가 안 풀리는 게 있는지 한 여학생이 책을 잡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그걸 발견한 진호는 아침의 일을 떠올리고는 다가갔다.
앞으로 보름 넘게 같이 있어야 하는데, 피하기만 해서는 예전처럼 겉돌기만 할 뿐이었다.
어떤 재미는 누군가와 같이 즐길 때 배가 된다.
"뭐 안 되는 거 있어?"
"……아, 응! 이걸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바로크를 찾아서라는 주제가 있지만, 일단 명목은 해외 어학연수다.
이탈리아어는 하루 스케줄에서 빠질 수 없는 내용이었다.
"확실히……."
이탈리아어는 여태껏 의무적으로 배워 온 영어와 많이 다른 언어다. 진호는 세세히 발음과 악센트를 알려 주었다.
"아하, 고마워! 아, 난 김지영이야."
"어제 서로 소개했잖아. 이진호야."
이렇게 둘의 사이에 부드러운 공기가 흐르자 여학생들이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지, 진호야, 이건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려 줄 수 있을까?"
"아, 이거는……."
"진호야, 이탈리아어로 사진을 찍어 주세요는 어떻게 말해?"
"유럽은 소매치기가 많아서 타인에게 부탁하지 않는 게 좋아. 차라리 셀카봉을 들고 다니는 게 나아."
진호는 아이들의 질문에 성실히 답변해 주었다.
이전 같았으면 어색하고 부담스러워서 묻는 것에만 답해 주었을 테지만, 지금은 세심한 설명이나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고 있었다. 한번 물꼬를 트자 지난 시간 동안 왜 그렇게 다가가지 못했나 하는 자책감이 생길 만큼 수월하게 말이 쏟아져 나왔다.
이는 진호 자신조차도 놀라운 모습이었다.
'마음먹기를 잘했다.'
겨우 한발 다가섰을 뿐인데, 경험의 질이 달라졌다.
진호가 이렇게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할수록 김승미의 눈은 점점 빛나만 갔다.
짝짝!
"자, 이제 이동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벌떡 일어나 버스에 올랐다.
이제 바로크 시대로 갈 시간이었다.
* * *
세계에서 4번째로 큰 두오모 성당과 누구나 아는 최후의 만찬, 유 럽오페라의 중심인 스칼라 극장에서 듣는 오페라.
모두 감동이었고, 엄청난 경험이었다.
그 시대에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길 정도였다.
거기다가 한국에선 맛볼 수 없는 이탈리아만의 색채를 가진 여러 음식.
다만, 피자는 역시 한국 피자였다.
피자는 이탈리아 피자라는데, 진호에게는 토핑과 여러가지 치즈가 듬뿍 올라간 한국 피자가 더 맛있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맛이 없다는 것은 아니었고, 취향 차이였다.
그래도 다른 음식들은 정말 맛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같이 파스타, 피자, 스테이크 같은 것만 먹다 보니 아이들은 결국 한인 마트를 습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험들을 다 같이 하다 보니 이번 연수에 온 학생들은 서로 빠르게 친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밀라노에서의 마지막 날, 골든 빅 벨 측은 학생들에게 자유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거기엔 제약이 걸렸다. 모두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치즈-! 찰칵!
다시 찾은 두오모 성당.
오늘따라 맑고 높은 하늘에 카메라 셔터가 절로 눌렸다.
"야, 이번엔 나야! 얼른 바꿔!"
"오, 진호야! 그 포즈 멋지다! 다른 포즈 좀!"
"이, 이런 거?"
"자, 진호야. 허리 펴야지? 다리 모으고? 어후, 넌 그렇게 잘생겨 놓고 왜 그렇게 등을 굽히고 다녀?"
마네킹의 심정이 이런 건가 싶었다.
'내가 너희를 너무 우습게 봤구나. 괜히 허락했어.'
첫날의 그 수줍어하던 여학생들은 어디 간 건가 싶었다.
그렇게 30분 동안 시달린 후에야 풀려난 진호는 넋이 나간 얼굴로 남자들 사이에 앉았다.
토닥토닥!
"수고했어. 한 모금 마실래?"
남자들은 처음에 진호가 세상을 혼자 산다고 질투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초원의 암사자에게 둘러싸여 이리저리 굴려지는 새끼 사슴, 거미 줄에 걸린 나비처럼 안쓰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아니, 많이 마셔서 됐어."
여학생들은 영악하게도 진호가 힘들어할 때마다 어깨를 주물러 주거나 칭찬을 하거나 음료수를 주어서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 모습들은 진호에게 꽤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휴우, 사람은 잘생겨도 피곤하구나."
한 친구의 말에 진호는 씩 웃었다.
다들 좀 친해져서 그런지 입이 근질거렸다.
"긁히지도 못하는 복권보다는 낫지."
"……이 나쁜 새끼야!"
"저거 죽여!"
진호는 달려드는 몇몇 남학생들을 피해 도망쳤다.
그러다 이내 하얗게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다 됐다! 남자들, 우리 다 됐어. 다음 장소로 가자!"
진호는 두 눈을 부릅떴다.
"또오?"
"뭘 또야. 아직 볼 곳이 얼마나 많은데. 젊은이들의 거리라는 나빌리오라는데가 봐야지. 저녁엔 명품 거리도 가야 해!"
간담이 서늘해지는 소리였다.
물론 진호도 당연히가 보고 싶은 곳들이다.
하지만, 또 다시 사진을 찍히는 건 사양이었다.
진호는 조금 떨어져서 인솔자로 따라온 김승미를 향해 제발 좀 어떻게 해 달라는 뜻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흔들어 주는 것으로 진호의 바람을 배신했다.
"저녁에 우리가 술 살게! 안주도 듬뿍!"
여자들은 이번에도 영악한 말을 뱉었다.
고등학생이란 고삐가 풀린 남자들로서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진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가자, 가."
어차피 인솔자가 있기에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다.
그럴 바에는 이렇게 친해진 친구들과 더 교류를 나누는 게 좋았다.
진호는 다음엔 꼭 혼자 오겠다고 다짐하며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이었다.
"어?"
"왜?"
"아, 아니……."
진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걷는 게 무척이나 어색해졌다.
힘을 뺀 처진 어깨도, 편히 구부린 등도, 모두 어색했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온몸의 톱니바퀴가 어긋난 느낌이었다. 의아해 하던 그는 다시 발을 내디 뎠다.
그러자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다리가 힘차게 뻗어졌다.
절로 허리가 펴지며, 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런데 그게 편했다.
"……서, 설마?"
진호는 급히 여자아이들을 보았다.
"너희들, 나랑 찍은 사진 SNS에 올렸어?"
여학생들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그녀들의 미소는 참 해맑았지만, 진호는 충격을 받았다.
"스, 스킬을 더 얻었다고?"
이 현상은 세계적인 모델이 되는 '나는 TOP이다' 스토리를 관통하는 '스킬 : 내가 제일 잘나가'를 얻었을 때 일어나는 일이었다.
오직 모델을 위해 태어난 존재, 타고났지만 인식하지 못한 재능. 해금 조건은 남이 내 사진을 SNS에 올려 리트윗을 1만 건 받는 것이다.
그때는 삼각대를 이용해 몰카 형식으로 찍은 후 게임에 생성된 가상 SNS에 여러 계정을 만들어 올림으로써 해금시켰다.
1차는 조건은 모델 권유인데, 이는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모델 권유를 받음으로써 해금되었다.
이 스토리는 주인공인 진호가 기본적으로 잘 생겼다는 설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스킬을 또 얻다니!'
한 가지 스토리에 한 개의 스킬 이라는 법칙이 깨졌다.
그와 동시에 '나만의 인생'의 참 뜻이 확실하게 이해되었다.
'99가지 스킬을 모두 익힐 수 있구나!'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클로즈 베타 보상을 받고, 오픈 베타 이벤트 보상까지 받았는데, 출석 보상까지 줄줄이 있는 기분이었다.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진호가 생각에 빠지자 여학생들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왜? 시, 싫으면 그냥 내릴까? 꽃으로 가려 줄까?"
"미안해. 우리가 성급했어. 물어 봤어야 하는데……."
"아니, 고마워! 정말 고마워!"
"으, 응?"
'너희가 지금 어떤 걸 알려 줬는 지 모르겠지!'
[스킬 : 전국수석]과 [스킬 : 지성이면 감천이다]를 토대로 짜 놓았던 삶의 계획이 크게 수정되었다.
몇백 배는 더 좋게.
입술이 절로 꿈틀거렸다.
이곳을 뛰며 크게 웃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다음부터는 꼭 내 동의를 얻어 줘. 알았지?"
진호는 확실하게 말했다.
남의 간섭에 의해 변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내 삶의 주체는 오직 자기 자신이어야 했다.
"……응!"
"역시 우리 착한 진호! 뭐 먹고 싶어? 누나가 다 사줄게!"
"누나는 무슨."
피식 웃으며 말한 여학생의 이마를 톡 건드린 진호는 다시 발을 내디뎠다.
그 여학생과 그 모습을 본 여학생들은 멍하니 진호의 등을 보았다.
익숙해졌던 미모가 갑자기 바라 볼 수 없게 빛나기 시작했다. 처음보다 훨씬 더 말이다.
* * *
모든 행동에서 존재감이 폭발한다는 게 이런 것인가 싶었다. 진호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시선이 잠시 머무르기만 했던 방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진호를 보면 넋을 잃으면서도 카메라를 찾아 주위를 살폈다.
젤라토를 먹으며 나빌리오를 바라보는 모습조차도 마치 광고를 찍는 것 같았다.
"왜?"
"아, 아니……."
첫날처럼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여학생들의 모습에 진호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이거 조금 위험한 스킬이네.'
인식하지 못하는데, 알아서 페로몬을 뿌리고 있다.
그렇다고 자세를 흩트리자니 몸이 간지러워 미칠 것 같다.
진호는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뭐야, 또 반했어? 에휴, 그러지 마라. 너희들만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