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1권 5화
우우웅.
그날 저녁, 공양을 마친 후 이탈리아어 공부를 하다가 핸드폰의 알람 소리에 정신을 차린 진호는 미리 준비한 국그릇과 물병이 든작은 가방을 들고 방문을 잡았다.
"가자!"
끼이익!
"마침 나오셨군요."
화들짝 놀란 진호는 커다란 플래시를 들고서 기다리고 있는 상대가 낮의 그 행자승임을 알아차리곤 놀라고 말았다.
"아니, 혼자 올라가도 되는데요."
"갓바위까지 석조 공사를 하느라 길이 험합니다."
"아."
미안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기색을 읽은 듯 행자승은 부드러이 웃었다.
"시주님께서 많은 시주를 하셨기에 본사에서도 편의를 봐 드리는 겁니다."
진호는 원래 템플 스테이 금액에 50퍼센트를 더 얹어서 돈을 냈다.
"그럼 가시죠."
"아, 네!"
미안함을 조금 덜어낸 진호는 힘 차게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하악! 하악!"
폐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무릎과 허벅지는 당장이라도 꺾일 듯 힘이 없고, 심장이 머릿속에 들어 있는 듯 머리가 거친 심장 박동에 따라 울렸다.
옆으로 맨 작은 가방은 던져 버리고 싶을 만큼 거슬리고 무거웠다.
'아, 안 되겠어!'
그는 마치 절벽 끝에 매달린 동 아줄을 잡듯 다급히 옆의 난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억! 허우억!"
후두둑!
겨울산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할 퀴고 지나갔지만, 땀이 비 오듯 떨어져 내렸다.
'펴, 평소에 우, 운동 좀 할걸!'
갈비뼈마저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아프니, 돌아가 체력을 길러서 나중에 다시 도전하자는 유혹이 맹렬하게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화들짝!
놀라서 보니 행자승이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빠드득!
진호는 정상을 올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고작 이 정도 노력도 안 하고 인생을 바꾸려고 했어? 너 벌써 잊었어?'
안경 돼지, 여드름 돼지, 게임 돼지, 돼지, 돼지, 돼지.
언젠가부터 빠지지 않는 살은 매일매일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아무리 게임에 빠져 주위를 외면 했더라도, 흘려들었더라도 마음엔 계속 아물지 않는 상처가 생겨났다.
너무 많이 그어져 만성이 될 법한데도 결코 만성이 되지 않는 상처들, 매일같이 흘렸던 좌절의 피. 웃거나 무시하며 넘긴다고 하여도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 그럴 리가! 후우욱!"
그런 스킬을 날로 먹으려고 할 정도로 양심이 없지는 않았다. 인생을 바꾸려고 왔는데, 겨우 이 정도에 무너질 수는 없었다.
쿵!
이를 악문 진호는 가슴에 불을 품으며, 발을 강하게 내디뎠다. 고개를 끄덕인 행자승도 다시 앞을 보며 걸었다.
쿵! 쿵! 쿵!
느리더라도 끊임없이.
바람을 맞더라도 가슴의 불은 꺼지지 않도록.
그는 돌아서자는 유혹을 뿌리치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끝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 다왔…… 푸허어어!"
철푸덕!
무릎이 절로 풀려 버렸다.
"흐억! 흐억!"
온몸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마음만은 뿌듯했다.
'헤헤, 해냈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한 진호는 급히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5분 정도 여유 시간이 있었다.
진호는 다리를 주무르다가 숨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갓바위 앞에는 불이 켜진 전구가 주렁주렁 달린 슬레이트 지붕이 설치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엄청난 숫자의 매트가 깔려 있었다.
'여기에 불공을 드리러 오는 분들이 많다는 게 정말이었구나.'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준비를 해 놨을 리가 없었다.
"……후우, 하자."
신발을 벗고 매트 위에 선 진호는 가방에서 꺼낸 하얀 국그릇에 물을 따랐다.
그리고 갓바위를 향해 두며 절을 올렸다.
"한 번……."
그 순간.
우두둑!
무릎이 비명을 질렀다.
"아."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108배라는 ' 진짜 난관'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진호의 낯빛이 검게 죽었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방금 전의 다짐을 깨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를 악문 진호는 두 번째 절을 시작했다.
그렇게 세 번, 네 번.
서른 번이 지나자 진호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사라졌다.
쉰 번이 지나자 지금까지 몇 번을 했는지도 가물가물해졌다.
지금 절을 하고 있는 건지, 절이 몸을 움직이고 있는 건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잘생겨지겠다는 일념조차도 흐릿 해져 갔다.
일흔 번, 아흔 번, 백 번.
"하악! 학! 백여섯……."
털퍽!
"끄그윽!"
땅을 짚는 팔은 후들거리고 허벅지는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등산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이 전신을 지배했다.
하지만, 이제 두 번이다.
"백일고옵!"
이제 한 번.
"끄아아악! 백여덟─!"
털퍽!
머리에 닿는 매트의 차갑고 푹신한 감촉을 느끼며 진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으아아아아아!"
결국…… 해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 이후 누구의 도움 없이, 스킬의 조력 없이, 스스로 해냈다.
그 기쁨, 그 뿌듯함, 그 달성감은 몇 시간 전 정상에 올랐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묵묵히 진호의 고행을 지켜보던 행자승은 조용히 합장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 * *
새해가 밝고, 2월이 되었음에도 추위는 가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 발악을 하는 듯 더 거세게 휘몰아치는 한파가 사람들의 옷깃을 굳게 닫았지만, 인천 공항 만큼은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
웅성웅성!
얇은 외투를 입고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사람들, 열린 창구를 향해 뛰는 사람들, 바들바들 떨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도전 골든 빅 벨이란 작은 피켓 아래 모인 남녀노소는 오늘따라 더 복잡하고 시끄러운 인천 공항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연예인 오나 본데?"
"아이들?"
누가 봐도 앳된 티가 나는 학생들이 눈을 빛내며 목을 길게 뽑았다.
슬금슬금 발을 움직이는 이들도 있었다.
인솔자들 가운데 30대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 가지 마라. 그러다 제때 티켓팅 못하면 너희만 손해……."
와아아아아!
사내의 잔소리는 갑작스럽게 터진 환호성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수현이다!"
"강준이다!"
몇 년 전부터 뜬 차세대 미남 배우들, 거기다 아이돌도 있었다.
아이들은 가까이서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그 순간, 무슨 일인지 공항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의아해하며 목을 길게 뺀 아이들은 눈을 부릅떴다.
짙은 속눈썹에 날카로운 턱선, 선 함이 느껴지는 부드럽게 흰 눈매에 일자로 다물어진 붉은 입술. 그곳엔 미남 배우와 아이돌들마저 오징어로 만들어 버리는 격이 다른 미남이 있었다.
"어? 어? 이쪽으로 오는데?"
그 미남이 딱 이쪽을 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빛이 난다는 게 이런 걸까.
접힌 보딩 패스와 여권, 캐리어를 끌고 움직이던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춘 채 한곳을 멍하니 바라봤다.
십 년 전에 유행했던 디자인의 구닥다리 코트조차 명품으로 만들어 버린 미남이 분홍색 캐리어를 끌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미남은 [스킬 : 지성이면 감천이다]로 다시 태어난 진호였다. 그는 몰려드는 시선에 씰룩이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선본사에서 과업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계속 이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벌써 몇 주째라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아직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아, 진정해야지.'
자만심은 크나큰 독이었다.
그 독에 중독되었다가는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으리라.
누구보다 스킬의 양면성을 잘 아는 진호는 77일간 만난 여러 스님과 나누었던 대화와 마음공부를 위해 읽은 불가의 가르침을 곱씹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우우웅!
그 순간,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재준이었다.
-어디냐, 이 배신자야!
"이제 막 공항에 도착했어."
-나쁜 새끼, 배신자 새끼. 지 혼자 좋은 거 처먹고! 너 솔직히 말 해. 성형했지? 성형했잖아! 그렇지 않고 어떻게 그런 얼굴이 나오는데! 긁지 않은 복권도 정도가 있어야지!
"뭔 개소리야. 만날 사진 보내 줬잖아. 바쁘니까 끊어."
[스킬 :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77일 후 외모가 바뀌는 스킬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천천히, 그리고 급격히 외모를 바꾸어 갔다.
덕분에 신분증과 여권을 발급받는데 꽤 애로사항이 있었다.
-끊지 마! 나도 가고 싶다고-! 형, 나도 데려가라! 이탈리아!
"……어후, 진상 새끼. 끊는다."
통화를 종료한 진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을 친구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은 그는 걸음을 옮기려다 소란스러운 앞을 보고 잠시 멈추었다.
"연예인인가?"
수십 대의 카메라와 젊은 남녀들의 비명 같은 함성이 건널목에서 있는 몇몇 남자들에게로 향해 있다.
연예인에 관심이 없었던 진호로 서는 누가 누군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들이 신호가 한 번 바뀌었는데도 길을 건너지 않고 있다는 것.
시간을 확인한 진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서 더 지체했다가는 약속 시간에 늦게 생겼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지나갈 게요."
"아, 뭐야. 헉!"
"누구…… 허억!"
진호가 움직이는 길을 따라 점차 소음이 사라져 갔다.
건널목에서 있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깜짝 놀랐던 연예인들도 슬금슬금 옆으로 물러났다.
진호는 그들의 얼굴을 쏙 훑어보고는 다시 신호등을 확인했다.
가끔 어머니 때문에 강제적으로 시청했던 드라마에서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얼굴에, 모두 남자라 금세 관심을 끈 것이다.
"저…… 혹시 연예인이세요?"
어려 보이는 미청년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아뇨. 일반인인데요?"
"……네에?"
"아, 신호가 바뀌었네요. 즐거운 여행 되세요."
눈인사한 진호가 급히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는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 * *
"여기가 골든 빅 벨 소집 장소 맞나요?"
"네, 네. 그런데 누구……."
"안녕하세요! 오늘 같이 가기로 한 이진호입니다."
"……이진호?"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거짓말─!"
어디선가 들어 본, 아주 익숙한 외침이었다.
* * *
역대급 불수능의 유일한 만점자. 수능 성적표가 배부될 때까지 이 타이틀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기에 각 학교에서 골든 빅 벨 최후의 일인으로서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도 그의 외모를 기억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학생으로서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평가한 진호의 외모는 반드시 공부에 재능이 있어야 하는 세상 못난 뚱땡이였다.
한데, 그랬던 그가 엄청난 미남이 되어 나타났다.
키마저도 웬만한 모델들의 뺨을 칠 정도로 컸고, 비율도 이기적이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눈과 귀를 믿지 못했으나, 진호가 내민 여권을 보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지난 후, 진호를 제외한 학생들은 왠지 힘이 빠진 모습으로 출국 게이트를 넘었다.
그 짧은 사이에 인터넷이 난리가 난 것도 모른 채.
-……강준 오빠 미안.
-와, 오징어 자판기다. 피하는 것 봐라.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네.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진호는 난생처음 본 면세점에 눈을 빛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