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1권 4화
거실에 다과회가 열려 있었다. 염색약 냄새가 가득한 것을 보니, 단체로 미용실을 다녀온 듯싶었다.
"왔니?"
40대 초반의 어머니 나진희가 미소로 맞이해 주었다.
호들갑을 떨며 자랑을 하고 싶었던 진호로서는 다른 사람도 있다는 게 아쉬웠다.
"네, 다녀왔습니다. 이모들도 안녕하세요."
사사로이 이모라 부르는 어머니의 동네 친구들이 웃으며 반겨 주었다.
"우리 진호, 여전히 과하게 듬직하네?"
"어휴, 여드름만 아니면 딱 사위 삼았을 텐데. 아쉽다."
"그래서 진호는 어느 대학 갈 거야? 대학은 진학해야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속을 후벼 파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 팩트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진호는 어색하게 웃어넘기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고 돌아서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부끄러운 아들이 아니었다.
"엄마."
"응? 왜? 저녁에 뭐 해 줄까?"
"아니, 조금 있다가 계좌 번호 좀알려 줘요. 나 오늘 골든 빅 벨 울려서 학교에서 장학금 받았어. 너무 큰돈이라 엄마가 관리해 줘야 할 것 같아. 나 쓸 거 빼고 다 보낼게."
"응, 뭐?"
"오늘 골든 빅 벨 참가한다고 했잖아요. 그새 잊으셨습니까, 어마 마마? 진숙이모아들이 증인이야. 걔도 우리 학교잖아."
사람들의 시선이 진숙이모라 불린 여인에게 모였다.
그녀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자기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진호는 여전히 못 믿는 어머니의 모습에 속으로 씁쓸히 웃었다.
'이제는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될 게요.'
"아무튼, 그것 때문에 해외 연수를 가야 해서 여권도 만들어야 해."
"……저, 정말이야?"
'그 거짓말 진짜야?'라는 듯한 표정이 가슴을 울렸다.
"엉. 그래서 오늘 재준이랑 축하 파티 하다가 늦게 들어온 거예요."
띠링!
모두의 시선이 진숙 이모에게로 쏠렸다.
문자를 확인한 진숙 이모는 눈을 경악하며 진호를 보았다.
"지, 진호야."
"네?"
"호, 혹시 너 정말…… 수능 만점 이니? 오늘 교육청에서 학교로 통보됐다고……."
경악과 헛숨을 동시에 삼키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이모들의 모습을 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것 같았다.
"네. 맞아요. 그것 때문에 인터뷰도 했어요."
"헛!"
"으음!"
"그러니까, 엄마."
"으응. 그래. 아, 아들. 왜?"
"나 한국대 갑니다. 그렇게 아세요. 이만 들어 가볼게요. 이모들도 편히 쉬다가 가세요."
"으응, 그래."
"드, 들어가라."
정작 어머니는 너무 놀라서 그런 지 말을 잇지 못했고, 이모들만 겨우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래도 서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뿌듯했다.
이런 게 효도인 건가 싶었다.
쿵!
문을 닫고 들어가자 거실이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당황하면서도 자신만만해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 *
이모들도 저녁밥을 차려야 하기에 집으로 돌아간 후, 당연히 어머니의 추궁이 이어졌다.
그래도 몇 년 만에 이모들의 입을 꾹 다물게 해서 그런지 어머니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만큼 바뀌기 전의 자신이 못난 아들이었다는 생각에 입안이 썼다. 퇴근한 아버지 이형만도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합세했다.
"……허허. 내 아들이 천재였다니."
아버지가 살짝 벗겨지기 시작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당혹스러워했다.
"죄송해요. 그동안 너무 게임에만 빠져 살았죠?"
"……알긴 아는구나. 그런 거였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아빠랑 엄마는 그냥 RPG 게임인 줄만 알았잖아."
"죄송합니다. 엄마, 미안해요."
"홍, 알긴 아니? 내가 정말 말만 안 했지, 속이 얼마나 썩었는지 말하자면 한 달도 모자라."
"이제라도 밝혀 줘서 고맙다."
"헤헤헤."
"웃지 마, 정들어! 어휴, 속 터져서 정말!"
"그나저나 정말 놀라운 게임이구나. 고작 게임하는데 그런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다니…… 네가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이유가 있었어. 하긴 이 아빠라도 그런 게임 이라면 공부엔 신경도 못 썼겠다."
진호는 리셋 라이프를 위해 전력을 쏟았다고 두 분을 이해시켰다.
"여보!"
"어이쿠! 이 말은 취소다!"
"이이가 진짜!"
갑자기 싸우는 두 분의 모습에 진호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믿어 주시는구나.'
아버지의 승진 때문에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이후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붙이지 못해서 시작한게 리셋 라이프였다.
새로운 환경 적응문제도 있지만, 아버지는 지방에서 승진해 온 케이스였기에 책잡히지 않기 위해서 거의 2년간 집에 잘 들어오지도 못하셨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내조하기 위해 진호에게서 잠시 시선을 거두었다.
그사이에 리셋 라이프에 더욱 빠져들게 되었다.
이후 성적은 뚝뚝 떨어졌지만, 두 분은 성적이 뭐가 중요하냐며 건강하게만 자라 달라고 언제나 응원해 주셨다.
그때는 자식을 방목한 것에 대한 변명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부모님은 이렇게 계속 믿어 주고 계셨던 것이다.
"어이구, 사내자식이 뭘을고 그래. 그것도 이렇게 좋은 날에. 자, 한잔 받아라.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거야."
"넵!"
진호는 양손으로 공손히 아버지가 따라 주는 술을 받았다.
챙! 꿀꺽! 꿀꺽!
"크! 좋다! 아들과 처음 마시는 술이라서 그런지 정말 좋네! 당신도 한잔해요."
"흥! 이제야 주는 거예요?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잖아요."
"뭘 또 목까지 빠져. 자, 가득 들어갑니다."
진호는 여전히 금실이 좋으신 두 분의 모습에 헤실거렸다.
"어이쿠! 우리 아들을 잊었구나. 자, 진호도 한 잔 더 받아라."
"예!"
화기애애한 밤은 깊어져 갔다.
* * *
"그래서 이제 입학 전까지 어떻게 할 생각이냐. 과외라도 할 거냐?"
과외란 말에 어머니 나진희의 눈이 빛났지만, 진호는 애써 외면했다.
"아뇨. 잠시 여행을 갈까 해요."
"여행?"
"네. 제 새로운 면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펼쳐 갈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요. 그러는 와중에 학과도 정할 생각이에요. 아, 살도 뺄 생각이고요."
"살을?"
정확히는 외모를 변화시키려는 것이었지만, 크게 출렁이는 부모님의 눈을 보자 거짓말을 하는 듯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새로운 면, 미약한 준비, 그 모두 외모에 관한 부분이었다.
오늘 이모들이 한 말로 인해 더 다짐하게 되었다.
키는 큰 편이었지만, 130킬로그 램의 거대한 몸뚱이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국수석을 빼면 내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스킬.'
하나의 스토리에 하나의 스킬.
99가지 스킬 중엔 이보다 훨씬 더 좋은 스킬도 많았지만, 더 이상 외모로 놀림을 받고 싶지 않았다.
"어이구, 네가 그런 기특한 말도 할 줄 아니?"
진호는 깜짝 놀랐다.
"허, 허락해 주는 거예요?"
"네가 리셋 라이프인지 뭔지 한 답시고 새벽 늦게 들어오거나 외 박을 밥 먹듯 할 때부터 이 엄마는 이미 포기했다."
"……고마워요, 엄마! 사랑해요!"
진호는 어머니를 꽉 끌어안았다.
어머니도 그런 진호의 등을 토닥이다가 옆구리를 꽉 꼬집었다.
"억!"
"대신 하루에 한 번씩 전화 안 하면 죽는다, 진짜. 알았어?"
"네, 네! 아, 알겠습니…… 아아악!"
잠시 후 겨우 어머니의 징벌에서 벗어난 진호는 옆구리를 문지르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래, 잘 생각했다. 사내는 여행을 통해서 성장하는 법이지."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뭘, 네 의견을 이렇게 피력해 줘서 오히려 고맙지."
매일 게임만 하던 아들이 언제 이렇게 성장했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갑자기 큰 것 같아서 섭섭했다.
"자, 받아라."
진호는 내밀어지는 신용 카드에 급히 손을 저었다.
"아뇨. 용돈 모아 둔 것도 있고, 오늘 장학금……."
진호는 자신이 쓸 돈을 미리 빼놓았다.
"괜찮아. 이럴 땐 그냥 '감사합니다' 하면서 받으면 돼."
"……감사합니다."
"그래, 여행은 언제 떠날 생각이냐?"
"내일요."
"뭐?!"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잖아요. 마음이 섰으니 움직여야죠."
진호는 놀라는 부모님을 보며 배 시시 웃었고, 어머니에게 다시 한 번 옆구리살을 헌납해야 했다.
* * *
침대에 돌아와 누운 진호는 술기운 때문인지 천장을 보며 웃었다.
"정말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될 게요."
오늘에서야 확인하게 된 두 분의 마음.
진호의 두 눈은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버지가 가끔 낚시하실 때 애용하는 여행용 배낭에 속옷과 옷가지, 그리고 준비물을 챙긴 진호는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시끌벅적. 우글우글.
한파가 찾아오는 겨울이지만, 터미널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기 의자에 앉은 그의 얼굴은 꽤 상기되어 있었다.
난생처음 홀로 벗어나는 서울. 대체 어떤 이벤트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몹시 기대되었다.
그런 그의 흥분을 알아차린 것인지 옆에 앉은 할머니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이구, 학생은 어디 가나?"
"네. 팔공산에 있는 선본사에 가요!"
"그 먼 곳까지? 왜?"
"인생을 바꾸려고요."
진호는 활짝 웃었다.
2.
[스킬 : 지성이면 감천이다.]
[지식은 배우면 된다. 건강은 운동하면 된다. 옷은 마네킹 따라서 입으면 된다. 하지만, 외모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산속이라서 그런지 바람이 더 날카톱게 몰아치는 팔공산의 선본사.
휘이잉.
아직 법명을 받지 못한 또래 행자승의 뒤를 따르던 진호는 주위를 둘러보며 크게 감탄했다.
'산사의 적막함이라는 것이 이런 건가?'
절로 숨이 트이는 풍광.
언제나 귀를 가득 채웠던 시끄러운 소리들이 사라지고, 자연의 소리만 들려오자 왠지 어색했다. 그래도 어깨와 목에서 힘이 풀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 때문인지 절로 눈이 감겼다.
"좋다."
이런 게 힐링인 건가, 이래서 사람들이 휴양림으로 떠나는 건가 싶었다.
"이곳에서 머무시면 됩니다, 시주 님."
3평정도 될 법한 방엔 이불과 반상, 한 칸의 장롱이 전부였다. 그래도 굉장히 깔끔하고, 온기가 가득했다.
행자승은 낭랑한 목소리로 주의 사항을 말해 주었다.
"그럼 저녁 공양까지 편히 쉬십시오."
"주지 스님께 제 억지를 들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하다 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겨울이라 시주님들께서 많이 찾지 않으시니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감사한 건 감사한 거죠."
마주 합장을 한 진호는 등 뒤로 문이 닫히자 창문을 열었다. 시리도록 맑은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의 눈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이 스킬은 자정에 정화수를 떠 놓고 77일간 108배를 올리고, 정화수를 얼굴에 바른 다음, 남은 걸 마시면 습득할 수 있었다.
떨어지는 간판에 맞아야 하는 전국 수석 스킬에 비하면 너무도 심플한 조건이다.
하지만, 전제 조건이 달렸다. 무조건 선본사의 소원을 들어주는 불상인 갓바위, 관봉석조여래좌상에게 108배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소원과 치성이라는 단서를 가지고 갖은 노력 끝에 알게 된 획득 방법.
이후 77일을 지키는 것이 2차 해금 조건이자 온전한 습득 방법이었다.
다행히 리셋 라이프 속 배경이 지방이나 해외일 경우에는 근처 다른 비슷한 공간으로 대체되었으므로 삼성동의 봉은사에 77일간 출석을 찍었다.
하나, 게임이 현실로 바뀐 지금은 온전히 조건을 채워야 했다. 이곳 선본사에서 말이다.
"만약 대학 정시 입학 때문에 해외 연수를 내년 2월에 가지 않았다면, 이 스킬을 나중에 얻을 수밖에 없있겠지."
합격자 발표는 늦어도 2월 초, 골든 빅 벨에서 고3 수험생들을 배려해 일정을 조정해 준 것이다.
"그래도 갓바위가 경내가 아니라 밖에 있으니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예전처럼 꽤 민폐를 끼쳤을 것이다.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손전등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은 진호는 일단 경내를 구경하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갔다.
앞으로 77일간 머물 곳이니 제대로 둘러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