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1권 2화
1.
[스킬 : 전국수석]
[인생과 성공은 99퍼센트의 재능과 1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뤄진다. 공부도 재능이다. 아무리 책상에 앉아 있어도 안 될 놈은 영원히 안 된다.]
10대의 커다란 카메라. 바삐 움직이는 수많은 스태프.
환한 조명이 두 눈을 시리게 만들고 있지만, 복슬복슬한 강아지 같은 기다란 마이크는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21번 문제입니다! 이는 신미양요의 발단이 된 사건으로서 1866 년 7월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인 이것을 불태웠습니다. 이 상선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커다란 체육관이 천연에코가 된것인지 예쁘게 생긴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렸다.
역시 저렇게 예쁘고, 발음이 또박 또박하니까 아나운서를 하겠다는 감탄이 절로 들었다.
진호는 마카를 들어 여러가지가 적혀 있는 다른 학생들의 화이트 보드와 다르게 아무런 글귀도 없는 자신의 화이트보드에 답을 적었다.
"오! 게임 마니아 이진호 학생이 이번에도 문제를 듣자마자 바로 답을 적었습니다! 이번에도 정답이라고 확신합니까?"
다시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네,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오오!"
25번 문제에서 잠시 브레이크 타임을 가졌다.
"오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이야! 너 다시 보인다?"
지난 1년간 말을 잘 섞지 않았던 같은 반 학생들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자 낯설고 어색했다.
뚱뚱한 데다가 여드름도 많아서 다가오지 않았던 그들.
물론 자신의 잘못도 있었다.
너무 게임에 열중하느라, 다가가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지난 6년 동안 게임만이 인생의 전부였고, 유일한 재미였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 수는 없었다.
"흐흐. 그런가?"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야.'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어, 그래. 이후에도 파이팅이다!"
"이진호, 파이팅!"
돌아선 진호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게 메슬로우가 말한 인간의 다섯 가지 욕구 중 존경의 욕구인가 싶었다.
"흐. 진짜 나쁘지 않네."
인생이 바뀐 게 조금씩 실감이 되고 있었다.
처음으로 실감을 한 것은 수능이었다.
"히힛."
턱!
그 순간, 누군가의 거친 손길이 그를 붙잡았다.
"잉?"
"너 뭐냐?"
남자가 봐도 잘생긴 얼굴에 화장 까지 한 7년 지기 친구 재준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있었다.
"너 누구야?"
지방에서 올라온 뚱땡이에게 선뜻 다가와 사람과 친해지는 법을 알려 준 고마운 친구 박재준의 이상한 물음에 목까지 올라온 욕을 삼킨 진호는 씩 웃었다.
"누구긴 누구야, 네 친구지."
"지랄! 너 이렇게 똑똑한 놈 아니었잖아."
"내가 원래 좀 천재였어. 숨기고 있었을 뿐이지."
6년 동안 한 리셋 라이프의 올 클리어 보상으로 똑똑해지는 스킬을 얻었다고 말했다가는 미친놈 소리밖에 듣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얼굴에 철판을 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처음 싸웠던 곳은?"
"6학년 9월 3일 하교 후, 동네 놀이터. 이유는 내가 네 떡꼬치를 뺏어먹어서. 이게 누굴 외계인으로 보나. 진짜 돼지 새끼가."
재준은 엄청나게 먹지만, 살은 찌지 않는 신의 은총을 받았다. 먹는 족족 살로 가는 진호와는 전혀 달랐다.
거기다가 머리도 제법 똑똑했다.
그래서 가끔 짜증이 나는 놈이었다.
"그, 그랬나?"
"……그랬어."
'이게 기억나네?'
오래전 기억인데도 그때 나눴던 대화 한마디까지 다 기억났다.
경악스런 상황이었다.
원래 자신은 이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임과 관련된 게 아니라면 당장 며칠 전에 겪은 일도 까먹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중요한 일이 있으면 무조건 핸드폰에 메모했었다.
머리가 좋아진 것은 이미 얼마 전에 본 수능 때 경험해서 알았지만, 까마득한 과거의 일을 기억해 낼 정도로 좋아졌을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스킬의 힘이 두뇌를 개조하다시피 바꾼 듯싶었다.
"오올, 이진호! 기억력 쩌는데? 비결이 뭐야?"
"머리에 간판 맞고, 교과서와 교과에 단 한 단어라도 관련된 파일 5만 건만 외우면 이렇게 돼."
리셋 라이프 내에서 [스킬 :전국 수석]을 얻기 위한 조건이었다.
'이걸 먼저 계승 받아서 천만다행이지.'
이젠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한마디로 목숨을 걸어야 했다.
"지랄, 알려 주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해."
"응, 싫어."
진호는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고, 둘은 낄낄 웃었다.
"야, 근데 저놈 보이냐? 아까부터 널 죽일 듯 노려보는데?"
원래라면 진호 대신 주목을 받았을 전교 1등 김창섭.
썩 좋은 학교가 아니었음에도 모 의고사 성적이 전국 상위 1퍼센트 안에 드는 대단한 모범생이었다. 제법 큰 키에 큰 덩치를 지녔지만, 수능도 끝났고, 곧 졸업이니 오늘 이후로는 볼 일도 없을 터라 딱히 겁이 나지는 않았다.
"무시해. 골든 빅 벨은 내 거야."
최후의 1인만 되어도 교장이 장학금을 준다고 했다.
그것도 무려 대학교 1학기 등록금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고도 앞으로의 계획을 위한 자금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었다.
대학 입학까지 앞으로 약 3개월 반.
부모님께 큰돈을 달라고 요구할 생각이 없는 그에게 가장 좋은 수단은 골든 빅 벨밖이었다.
재준은 그런 친구의 모습에 실짝 놀랐다.
'얘가 이렇게 공부에 호승심을 불태우는 놈이 아닌데?'
게임이라면 달랐지만 말이다.
"그래. 긴장한 것보다는 그런 모습이 낫지. 꼭 울려라."
친구의 응원이 참 듬직하게 다가왔다.
"당연히 그럴 거다. 그런데 넌 공연하려고 화장한 거냐?"
"성공적인 BJ 데뷔를 위한 사전 작업이라고 해 주라. 그래도 지상 파 방송이잖아."
"그 시간에 공부를 해라. 내신도 나보다 좋은 놈이."
드립도 썩 좋지 않은 놈이 인터넷에서 BJ를 한다고 하니 걱정이 앞섰다.
"대학은 대학이고, 꿈은 꿈이야."
"……에휴, 그래. 열심히 해라. 또 안무 틀리지 말고."
"너나 잘해, 새까."
서로 주먹을 맞댄 둘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고, 잠시 후 패자 부활전을 하기 전에 분위기 환기를 위해 보문고등학교 댄스 동아리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 * *
한 문제, 한 문제.
진행될 때마다 생존자는 한두 명 씩 줄어들었고, 공기는 점점 싸늘하게 식어 갔다.
"하…… 씁!"
"아, 씨발."
꿀꺽!
진호도 마른침을 삼켰다.
30번 문제까지는 너무도 쉬웠는데, 31번 문제부터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다.
한 단씩 높아지던 계단이 세 단, 네 단으로 껑충껑충 뛰고 있었다. 어깨를 늘어트린 채 퇴장하는 학생들.
서늘한 바람이 심장을 할퀴고 있었다.
그러다 정점인 문제가 나타났다.
"37번 문제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그의 논문<존재와 무(無)>에서 전개한 '눈길을 돌리는 주관으로서의 나'의 구체적 존재 방식을 나타내는 말로서 원래 계약, 약속, 구속의 뜻인데, 정치나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한국대학생이라고 해도 풀 수 있을까 의심이 들 만큼 경악스러운 난이도였다.
"헛!"
"으음!"
"아오, 씨!"
선생들의 낯빛은 어두워지고, 관객석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뒤집어졌다.
나지막하게 외치는 생존자들의 탄성이 곧 진호의 마음이었다. 진호는 미간을 좁혔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머릿속이 간질거렸다.
"하하, 여태까지 문제가 나오자마자 답을 적었던 진호 학생마저 주저하고 있군요. 하지만, 모두 걱정 하지 마십시오. 이 문제는…… 객관식입니다!"
"하우."
베테랑 MC가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굉장히 얄미웠다.
이윽고 여자 아나운서가 낭랑한 목소리로 보기를 읊었다.
"1번 알레르망, 2번 안데르망, 3 번 앙가르망, 4번 앙가주망."
보기가 나왔는데도 학생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진호는 아니었다.
"……아!"
머릿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 바보, 이것도 텍스트 파일로 만들어 놓고는!'
이 역시 [스킬 : 전국수석]을 얻기 위해 핸드폰에 저장시켰던 책이었다.
그렇게 인식을 하자<존재와 무>의 모든 내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몇 페이지 몇 번째 문장을 말하라고 해도 막힘없이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
'역시 전국수석! 나이스, 제2 외국어!'
귀찮기도 하고, 선생이 열의가 없다고 해서 선택했던 프랑스어.
그게 이렇게 도움을 줄 줄은 몰랐다.
그는 급히 답을 적었다.
"잠시만! 진호 학생, 답을 드는 걸 잠시 미뤄 줄 수 있나요?"
남자 아나운서가 급하게 개입하자 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이트보드를 잡은 손을 놓았다.
"어휴, 인터뷰하기가 참 힘드네요. 너무 열의가 넘치는 거 아닙니까? 옆에 있는 친구들도 배려해 줘야죠."
갑자기 한 방 얻어맞은 전교 1등을 비롯한 남은 생존자 2명의 얼굴이 붉어지고,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호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몰입 했음을 깨달았다.
"아, 죄송합니다. 창섭아, 미안. 너희들도 미안."
"아, 아니, 괜찮아."
모두 전혀 괜찮지 않은 억지 미소였지만, 진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장학금이라는 같은 목표를 둔 라이벌이었다.
'리셋 라이프의 테니스 황제 스토리에서 어느 은퇴하기 직전인 테니스 선수 NPC가 그랬지. 전력을 다하라. 그것이 날 존중하는 것이다.'
어설픈 배려는 오히려 독이 된다.
배려한답시고 행동했다가 스토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던 경험이 있는 진호로서는 결코 봐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게임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다.
지금도 조금씩 깨닫고 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데다 열심히 해도 뒤탈이 없을 테니, 전력으로 임할 셈이었다.
"놀랍게도 진호 학생과 다른 학생들의 답이 다릅니다! 아니, 진호 학생만 답이 다릅니다!"
"와아아아아아!"
"진호 학생?"
"아, 네!"
"오직 혼자만 다른 답을 쓰셨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최후의 1인이 가려질 텐데요. 자신이 쓴 답이 정답이라고 확신합니까?"
"네! 이번에도 확신합니다!"
왜인지 조목조목 설명해 주고 싶은 마음에 입이 달싹거렸지만 꾹 참았다.
"오! 자신감이 넘치시군요!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음…… 많이 긴장됩니다."
어느새 카메라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긴장은 하나도 되지 않지만, 적당히 꾸며 낼 필요가 있었다. 이곳은 아무 말이나 해도 상관없는 게임 속이 아니라 현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친구와 약속한 것처럼 계속 살아남아 골든 빅 벨을 울려 보고 싶습니다!"
정석적인 답변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진심이었으니까.
진호는 재준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재준은 모이는 카메라에 잠시 당황했다가 이진호 파이팅을 크게 외쳤다.
"하하하! 친구와의 우정이 정말 보기 좋군요!"
남자 아나운서는 남은 학생들과도 인터뷰를 가졌다.
"자, 이제 최후의 1인이 나올 것인지, 아니면 남은 세 명의 학생이 다시 경쟁을 벌일 것인지. 그 갈림길에서 있습니다! 정답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