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86화 (386/386)

36 의무전대(36th Medical Group) 병원.

앤더슨 공군기지. 괌.

삐, 삐, 삐, 삐.

주기적인 비프음이 감각에 들어왔다.

시각과는 달리 언제나 열려 있는 청각이 가장 먼저 그 소리를 포착했다.

남자는 잠에서 깨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의식을 되찾았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비프음, 남자의 몸에 덮여 있는 부드러운 리넨천의 느낌, 그의 얼굴을 스치는 딱 좋은 온도와 습도의 공기를 통해 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인식했던 장소와는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눈을 바로 뜨지 않았다. 그의 오랜 버릇에 따라, 그대로 눈을 감고, 청각과 다른 감각을 통해 현재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은은하게 풍겨 오는 향기, 크레졸과 포름알데히드의 향, 거기에 미세하게 섞인 라벤더 향이 느껴졌다.

청각이 천천히 제 기능을 찾아가면서, 비프음 이외에 다른 소리도 들려왔다.

은은하게 깔리는 음악 소리, 그리고 에어컨이 가동되는 기분 좋은 소음이 비프음과 섞여 남자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남자는 그때서야 확신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남자는 눈을 뜨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그렇게 눈을 감고서, 자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눈.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

그게 남자가 바라보던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 눈을 떠올리고 있는 남자의 감각에 새로운 소리가 포착되었다.

발소리.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 발소리가 자신을 향해 다가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 열린 문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

남자는 욕망을 이겨 내지 못했다.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밝은 빛이 그의 눈을 자극했다. 하지만 남자는 다시 눈을 감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빛에 적응한 눈이 사물을 판별하기 시작했다.

초점이 맞아 가면서 흐릿하던 사물의 선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초점을 맞춘 그의 시야에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물을 갈아 왔는지, 여자는 화병에 꽃을 담고 있었다.

남자는 말없이 그런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현실인지, 아니면 환각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화병에 꽃을 전부 옮겨 담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알아챘다.

여자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여자는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한참 동안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고, 여자는 천천히 한 걸음씩 남자를 향해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마치 조금만 급하게 움직이면 사라져 버리는 신기루에 다가가는 것처럼. 그렇게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와 남자가 누워 있는 침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여자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남자의 뺨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댔다.

손을 타고 남자의 온기가 흘러 들어왔다.

“나를 알아볼 수 있어요?”

여자가, 완이 물었다.

“그래. 알아볼 수 있어.”

남자가, 한규호가 말했다.

《기프티드》 마칩니다

기프티드 완결 후 독자님께 드리는 글

몇 년 전이었습니다.

아마도 5년 전? 6년 전? 아무튼, 그즈음 된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작가 형님하고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그 형님이 그런 말을 꺼내시는 겁니다.

웹소설 한번 써보라고.

저도 어릴 때부터 무협지랑 판타지 좀 읽었다면 읽은 사람이니까, 나도 한번 써 볼까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근데, 글이라는 게 마음처럼 그렇게 쉽게 써지는 게 아니더라구요. 한 두어 번 끄적거린 다음, 이건 내 길이 아니구나 하고 깔끔하게 접어버렸죠.

그렇게 또 한참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약속이 있어서 양재로 가는 날이었는데···. 약속에 늦어서 허겁지겁 뛰어가다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시간을 좀 느리게 흘러가게 할 수 있는 그런 능력 같은 거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냥 그 능력만 있으면 재미없으니까, 뭔가 발현조건 같은 거 있으면 재미있겠는데. 발현조건이 있으면, 유지 조건도 있고, 제한조건도 있으면 좋겠다. 불사 같은 능력은 아주 기깔나니까 웬만한 발현조건 가지고는 안 되겠지? 살부살모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망상을 떠올렸죠.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해외 출장을 나갔다가, 잠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커피숍에 들어가서 시간을 때우던 중, 양재로 뛰어가던 그때 했던 망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노트북을 열고 한번 끄적거려 보았죠. 그게 기프티드 1~2회 분량이었습니다.

***

대략 20개 분량 정도의 글을 만든 후, 문피아에 올려봤죠.

뭐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막 달려들어 너무 재미있어요. 너무 끝내줘요. 막 이럴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은 안 했죠.

하지만 그런 기대가 없었음에도 성적은 처참하더라구요. 조회수는 두 자리고, 댓글 하나 없고···.

아 망했구나. 내 길이 아닌갑다. 헌터물을 써야 하나? 역시 야설인가?

그런 고민을 하던 차에 첫 번째 댓글이 달렸습니다.

‘산은산강은’님께서 9화에 달아주신 “꼭 챕터2로 찾아와 주세요~~”라는 댓글이었는데,

아······. 진짜 너무 좋더라구요.

그렇게 첫 댓글을 시작으로, 하나씩 댓글이 달리고, 조회수도 점점 늘어가면서, 이 재미구나. 이게 글 쓰는 재미구나. 그런 느낌을 받게 되었죠.

첫 추천글을 받은 날도 기억납니다. 일요일 저녁이었는데, 조회수가 급속도로 올라가는 겁니다.

뭐지? 무슨 일이지? 하고 추천란을 가봤더니, 첫 번째 추천글이 딱!

흐미. 이거 뭔일이다냐. 그러면서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데, 잠도 못 자고 계속 새벽까지 계속 페이지를 새로 고침하면서 조회수 올라가는 거 지켜봤네요.

이후로 투베에도 오르고, 컨택쪽지도 받고, 계약도 하게 되고, 처음으로 글 써서 돈도 벌어봤습니다.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뭐랄까···. 마치, 복권에 당첨된 것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요?

그렇게 즐겁고 신나게 글을 쓰다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두려움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내가 쓰는 이 글이 가치가 있나? 전문가도 아니고, 아마추어가 끄적거리는 글이 돈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을까? 능력보다 더 많은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한 번만 실수하면 그런 칭찬이 모두 비난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제 걱정이 현실화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점점 조회수도 떨어지고, 독자님들의 쓴소리도 조금씩 늘어가더라구요.

북한편을 쓸 때, 그때가 참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내 길이 아닌데, 이거 괜히 달려든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매일 했었더랬죠.

솔직히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뭐 도망갈 수는 없었죠. 자본주의사회에서 계약이라는 것은 아주아주 무서운 놈이니까요.

사실 뭐 계약을 떠나서, 독자님들께 드렸던 약속을 계속 떠올렸습니다.

단 한 분의 독자님이라도 계신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가겠다는 그 약속.

죽이 되었지만 엔딩까지 오기는 왔네요···.

***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과연 이 길이 맞는지, 내가 이 길을 걸어갈 만한 자격이 있는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조금 더 이 길을 걸어가고 싶다는 욕심이 납니다.

더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드는 것도 아니고.

아니, 자신감은커녕, 내글구려병은 만성 염증처럼 계속 고통스럽고, 사실, 구리기도 하고요···.

그래도, 이런 허접한 글이나마 재미있다고 말씀해주시는 독자님들의 너그러운 마음에 부끄러운 용기를 내볼까 합니다.

우선 2년 전에 멈춰버린 ‘가업을 이어라’를 자시 시작할 생각입니다. 아니, 꼭 해야 합니다. 계약이 되어있으니···. 아마 올해가 끝나기 전에 재편집을 거쳐 연재를 재개할 계획입니다.

문피아에서 연재를 이어갈지, 아니면 타플에서 새롭게 시작할지는 모르겠지만, 뭐, 아무튼 올해 안에 시작은 하겠습니다.

‘가업’도 약속드렸거든요. 엔딩까지 가겠다고.

그 다음글도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조금 더 가벼운 글을 써보고 싶네요. 무협이나···. 뭐···. 에로스? 아닌가? 에로스가 더 어려울라나?

현재까지 기프티드 2부에 대한 계획은 없습니다. 사실 쓸 이야기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규호와 완, 두 사람에게는 행복한 미래밖에 없으니까요.

현판은 당분간은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특히 첩보 장르는···. 첩보라고 말하기 부끄럽네요.

하지만 국정원 3인방에 대해서는 욕심이 좀 납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 세 명을 주인공으로 또 글을 한번 써보고 싶습니다.

그래도 첩보는 아닐 겁니다. 어설프게라도 첩보 흉내를 내기 위해 자료 조사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ㅠㅠ

아무튼,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조금 더 끄적여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잊지 말아 주시길···.

***

마지막으로 감사 인사로 후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글을 쓸 때 도움 주신 지인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먼저 저를 이 길로 이끌어주신 한상운 작가님. 아직 그날을 기억합니다. 형님 집 앞에 커피집에서 처음 글을 보여드렸던 그 날을. 평생 은혜 갚으며 살겠습니다.

정성숙 작가님도 감사합니다. 전화 걸어서 글 안 써진다고, 힘들고 괴롭다고 찌질찌질 거릴 때마다 말없이 들어주고, 힘내라고 해준 응원 덕분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역시 은혜 갚으며 살겠습니다.

옆에서 지켜봐 주고 함께 고민해준 교정 노예 1호 유병철. 너 없었다면, 이 글 못 썼다. 니가 1등 공신이다.

교정 노예 2호 최홍석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제수씨 모시고 오라. 밥 산다.

첫 번째 독자이며 헬리콥터 관련 자문을 담당해준 1호 독자 김대길. 고맙다. 아들 낳은 거 축하한다.

버팀목이 되어준 정무준 작가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정 작가! 라오스 갑시다!

글에 도움 주신 로크미디어 관계자님들에게도 깊게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종주 대표님, 이기헌 팀장님, 이런 보잘것없는 글을 계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책도 내주시고..ㅠㅠ

엉망진창인 글을 그나마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금성정 편집자님, 김예슬 편집자님께도 깊게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두 분이 안 계셨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대표님, 팀장님보다 두 분께 더욱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곽용신 부장님, 이규철 선배님을 비롯해 이름을 빌려주신 수많은 형님, 선배님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김승섭. 홍성민을 비롯해 이름을 빌려준 후배 놈들에게는 감사드리지 않겠습니다. 억울하면 선배 하던가. 술은 한번 살게.

또 누가 감사할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생각 안 나는 거 보니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가 봅니다. 나중에 생각나면 술 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독자님들께서 계셔 주셨기에 이 글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독자님들이 함께 해주셨기에, 힘들었지만, 행복한 2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님들과 독자님들 가족분들, 지인분들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마지막으로 독자님들께 깊게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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