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LUDE. 100일 후 (2)
동원석재유통.
경기도 하남시.
곽용신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사무실 앞, 임시로 만들어 놓은 흡연 구역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곽용신은 담배를 피우면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지 벌써 석 달이 지났지만, 그날의 기억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다면, 절대로 믿지 못할 장면이었다. 아니, 직접 눈으로 봤음에도 아직도 믿기지 않는 그런 장면이었다.
그날로부터 100일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그날의 충격은 아직 곽용신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아, 젠장. 끊어야 하는데.”
곽용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짧아진 꽁초를 바닥에 비벼 껐다. 그러고는 잠시 고민하다 담뱃갑에서 다시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런 그의 귀에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이거. 이거 봐라. 신입이 빠져 가지고, 벌써부터 짱 박혀서 몰래 담배 피우고 있네.”
곽용신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 김승섭이 다가오고 있었다.
“뭐, 인마?”
“이 양반 보게. 선배 보면 얼른 일어나 인사 안 합니까?”
김승섭이 곽용신의 손에서 담뱃갑을 뺏어 들며 말했다.
“아침부터 술 퍼마셨냐? 무슨 개소리야, 그게.”
담배를 입에 문 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곽용신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불을 붙이며 말했다.
“사표 썼잖아요.”
“그런데?”
“사표 썼으면 관둔 거고, 다시 들어왔으면 그때부터 후배지. 이 양반이 이거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집합 걸어서 제대로 함 굴러 봐야, 아, 내가 성심성의껏 선배님들을 모셔야 회사 생활이 잘 풀리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려나 본데. 안 되겠네. 형님 위로, 내 밑으로 오늘 저녁에 전부 집합. 이게 아무리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도 그렇지, 어디 감히 하늘 같은 국정원 선배에게 말이야.”
곽용신은 말없이 김승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에는 고민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때릴까. 어떻게 때려야 가장 큰 고통을 줄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담겨 있었다.
일단 패자.
그렇게 결심하고 막 몸을 일으키려는 그에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 다 뭐 하는 거야. 조금 있다가 돌 들어오는데!”
홍성민이 그렇게 투덜거리며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 홍성민에게 김승섭이 말했다.
“형님, 이게 말이 됩니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신입이 몰래 짱 박혀서 담배나 피우고 있고. 아무리 민주 국정원이고 해도,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깁니까?”
김승섭이 건네준 담뱃갑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던 홍성민이 김승섭을 보며 인상을 썼다.
“야, 인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곽용신은 그런 홍성민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라도 짬밥을 더 먹은 놈이 그나마 낫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이어진 홍성민의 말은 곽용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네가 관리를 잘했어야지. 일단 패라고. 저렇게 조또 모르는 신입들은 일단 패야 해. 패서 사제의 기운을 쫙 빼놔야 한다고. 안 되겠다. 야, 김승삽. 네 위로, 내 밑으로, 전부 집합. 오늘 한 따까리 하자.”
“이 양반이 아침 커피 믹스에 술을 타 마셨나. 내 짬밥에 무슨 집합이야.”
그렇게 투덕거리는 두 사람을 보면서 곽용신은 결정을 내렸다.
둘 다 패자. 매가 약이다.
그렇게 결심한 곽용신에게 또 다른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김형원이었다.
“곽 부장, 이사는 잘 마무리했고?”
두 사람에게 킥을 날리려던 곽용신도, 헛소리하던 홍성민과 김승섭도, 김형원의 등장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의를 차려야 했다. 김형원이 ‘네 위로, 내 밑으로 전부 집합’이라고 말하면 국정원 전 직원이 모여야 했으니까.
“네, 뭐. 잘 마무리했습니다.”
곽용신의 대답에 김형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집들이해야지.”
“예. 안 그래도 집사람하고 이야기 중입니다.”
“뭐 대단한 거 준비하지 말고, 간단히 식사나 하자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형원은 그렇게 끄덕이고는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렇게 두어 발 걸어나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곽용신에게 말을 건넸다.
“아, 그리고 그거. 승인 떨어졌으니까 조만간 입금될 거야.”
김형원의 말에, 김승섭과 홍성민이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입금? 무슨 입금?
“그렇습니까. 좀 부담스러운데.”
곽용신이 말했다.
“부담스럽긴. 사실 승인 받는 것부터 이상한 거지. 곽 부장이 노력해서 번 돈인데.”
“작전 중이었으니까요.”
“작전이라도 곽 부장이 벌어들인 건 사실이니까. 얼마였지? 한 10억 되던가?”
김형원이 물었다. 곽용신이 유럽에서 부동산 브로커로 활동하면서 벌어들인 중개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반 정도 될 겁니다. 유럽은 세금이 세서…….”
“그렇지. 아, 그리고 미국에서도 돈 들어올 거야. 그거도 한 오십만 불 된다는 것 같던데.”
CIA와 독립요원 계약을 맺고 활동한 것에 대한 대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5억, 그리고 50만 불이라는 말에 김승섭과 홍성민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고기 한번 사라고.”
김형원은 그렇게 말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곽용신은 그런 김형원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쪼그려 앉아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곽용신에게 김승섭이 말을 걸었다.
“용신이 형님.”
곽용신은 고개를 들어 배꼽 위에 두 손을 곱게 모으고 있는 김승섭과 홍성민을 바라보았다.
“항상 형님을 존경해 왔습니다. 형님을 만난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꼭 한번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홍성민의 말이었다.
곽용신은 그런 두 사람을 쓰레기 바라보는 눈빛으로 바라보다, 바닥에 꽁초를 비벼 끄면서 말했다.
“그래. 더 행복하게 해 줄게. 네 위로, 내 밑으로 전부 다 집합. 아주 오랜만에 피비린내 한번 맡아 보자.”
* * *
상원의원 윌리스 웨버 집무실.
워싱턴 DC. 미국.
보고서를 전부 다 읽은 윌리스 웨버는 안경을 벗고는 두 손으로 가볍게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앞으로가 문제겠군요.”
상원의원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밀러 국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얀 베르그만의 죽음은 변화를 가져왔다. 금융시장이 출렁였고, 세계 경제가 일시적으로 그 영향을 받았다.
바티칸과 미국 사이에 새로운 협력 관계가 형성되었고, CIA는 기프티드에 대한 새로운 전략 구성에 들어갔다.
윌리스 웨버가 내려놓은 보고서에는 그러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나는 다음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을 생각이오.”
윌리스 웨버가 말했다.
“이제 나 같은 늙은이는 물러날 때가 되었지. 아니, 이미 늦었지. 진작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었어야 했는데. 아무튼,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사람은 고생 좀 하겠군. 국장이 잘 도와주시오. 그리고 테일러 양도.”
윌리스 웨버의 시선이 밀러 국장 옆자리에 앉아 있는 금발의 젊은 여성에게로 향했다.
“알겠습니다. 위원장님.”
금발의 젊은 여자, 트레이시 테일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윌리스 웨버가 다시 밀러 국장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 친구…… 코드네임이 왜 스튜인지, 궁금하더이다. 뭐 CIA에서 부여하는 코드명에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알려 줄 수 있겠소?”
트레이시의 시선도 밀러 국장을 향했다.
그녀도 그게 궁금했었다. 왜 그에게 스튜(stew)라는 코드명이 붙었는지를. 스튜라는 단어와 그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처음 그를 인지했을 때, 서울에 요원 하나를 감시 역으로 붙였습니다.”
밀러 국장이 말했다.
“감시 요원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그가 점심으로 항상 ‘국밥’이라고 불리는 한국식 스튜를 자주 먹는 것을 보고 스튜라는 임시 코드명을 부여했습니다.”
“단지 그 이유?”
윌리스 웨버가 물었다.
“단지, 그 이유입니다.”
밀러 국장이 대답했다.
트레이시는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밀러 국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시선과는 달리, 그녀의 머릿속에는 국밥을 먹는 한규호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 모습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머다이나(Medina).
워싱턴주, 미국.
“도착했습니다. 부사장님.”
캐딜락 뒷좌석에서 잠들어 있던 신시아 챔버는 자신을 깨우는 운전기사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 그녀의 눈에 머다이나에 있는 챔버가(家) 저택의 모습이 보였다.
5일 만에 보는 집의 모습이었다.
반년 동안 진행되었던 그 작전이 끝나고, 다시 업무로 복귀한 신시아 챔버를 기다리는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업무 폭탄이었다.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 보안감사 부문 부사장으로서의 업무는 당연했고, 홍콩에서 진행 중인 아시아법인 설립도 들여다봐야 했다. 단지 거기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보험회사 부사장이기 이전에 CIA 요원이었다. 그것도 밀러 국장이 신뢰하는 기프티드 전담 요원이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많은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차에서 내린 신시아 챔버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네 시.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신시아 챔버는 그 어느 때보다 침대가 필요했다.
아침, 저녁으로 비행기를 타면서 5일 동안 암스테르담, 프랑크푸르트, 뉴욕을 돌았다. 호텔에서는 직원들에게 보고를 받고, 회의 자료를 검토했다. 이동하는 비행기와 차량 안에서 잠깐씩 눈을 붙이는 게 전부였다.
일단 한두 시간이라도 눈을 좀 붙이자.
그렇게 결정을 내린 신시아 챔버는 캐리어를 끌고 현관문을 열었다.
5일 만에 찾아온 그녀를 반긴 것은 텅 비어 있는 집이었다.
조용한 집 안에는 사람의 온기라고는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신시아 챔버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거실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귀에, 자동차가 접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챔버가로 다가온 자동차는 주차장에 들어와 멈추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열렸다.
“엄마!”
양손에 축구공을 들고, 운동복에 목이 긴 양말, 축구화까지 갖춰 신은 마리아가 5일 만에 만난 엄마를 발견하고는 손에 든 축구공을 던져 버리고 신시아 챔버에게 달려들었다.
신시아 챔버는 그런 마리아를 안아 주면서 말했다.
“우리 마리아. 그동안 잘 지냈어요?”
“응. 나 엄마 보고 싶다고 울지도 않고 잘 지냈어. 엄마, 보고 싶었어.”
마리아는 신시아 챔버의 품 안에서 머리를 비비며, 그녀의 작은 손으로 엄마를 꼬옥 끌어안았다.
신시아 챔버는 그런 마리아를 품에 안았다. 피로가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축구 교실 갔다 왔어요?”
“응.”
요즘 마리아는 유소년 축구 클럽에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배우고 있었다.
트레이시의 영향이었다. 트레이시와 축구공으로 놀던 마리아는 축구의 재미에 흠뻑 빠져 있었다.
마리아를 안고 있는 신시아 챔버의 귀에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왔어요?”
현관문에 앤 챔버가 서 있었다. 앤 챔버가 축구 클럽에서 마리아를 데려온 것이었다.
“응. 별일 없었지?”
“있을 게 있나요?”
그렇게 말한 앤 챔버는 신시아에게 다가와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그렇게 피 한 방울 안 섞인 세 모녀는 잠시 동안 서로를 안아 주었다.
상황을 정리한 사람은 앤 챔버였다.
“마리아는 일단 씻고, 옷 갈아입어요.”
마리아는 경쾌한 대답과 함께 2층으로 우다다 하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엄마도 샤워할 거죠? 그 전에 차 한잔할래요?”
“그럴까?”
“피곤해 보여요.”
“괜찮아.”
앤과 함께 주방으로 들어간 신시아 챔버는 식탁에 앉아 차를 끓이는 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규는 연락 없었니?”
신시아 챔버가 앤에게 물었다.
“어제 전화 왔어요. 엄마한테 전화했는데 전화기 꺼져 있다고 하던데요?”
“비행 중에 전화했었나 보다.”
“나도 그럴 거라고 했어. 다시 전화하겠지.”
“그래…….”
그렇게 말한 신시아 챔버는 손목에 달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4시 반, 괌은 오전 10시 반이었다.
전화를 걸어 볼까?
그렇게 생각하던 신시아 챔버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앤에게 말했다.
“우리가 갈까?”
차를 끓이던 앤이 몸을 돌렸다.
“괌으로?”
“응. 마리아랑 같이. 가족 여행 겸해서.”
“너무 좋죠. 근데 휴가 낼 수 있겠어요? 요즘 안 그래도 너무 바쁘다면서.”
“괜찮을 거야. 아니, 무조건 가자. 지금 당장은 무리지만 2주 안에 어떻게 해서든 일주일은 시간을 만들어 볼게.”
“좋아요. 나는 좋은데……. 우리가 간다고 규가 좋아할까 모르겠네.”
앤이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