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LUDE. 100일 후 (1)
앰배서더 스위트 호텔 카라카스(Ambassador Suites Hotel Caracas).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앰배서더 스위트 호텔 카라카스 이그제큐티브 플로어에 있는 스위트룸, 몇 년 전, 한규호가 스즈키라는 위장 신분으로 머물렀던 객실에 세 남자가 앉아 있었다.
호세 어린이 병원(Hospital San Jose De Dios)에 새로 부임한 에녹 노이스, 에녹 노이스에게 자리를 만들어 준 가리발도 몬타노 도밍게즈, 그리고 도밍게즈의 옛 전우이자 지금은 도밍게즈 의원의 비서관 일을 하는 톨레도,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얼음이 담긴 언더락 잔이 들려 있었고, 세 사람 사이에는 술 한 병이 놓여 있었다.
한규호도 마셨던 고급 럼(Rum) ‘디플로마띠코 레세르바 엑스쿨루씨바(Diplomatico Reserva Exclusiva)’였다.
잔을 들어 향을 음미한 에녹 노이스는 럼을 한 모금 머금었다. 그러고는 만족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추위에 떨다 겨우 잠들었는데, 누가 어깨를 흔들더군요. 나는 당연히 알샤바브 놈들이 다시 고문을 가하기 위해 날 깨운 것으로 생각했었죠. 내 열 손가락과 발가락을 웃으면서 짓이겨 놨지만, 그 정도로 만족할 놈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도밍게즈와 톨레도 두 사람은 말없이 에녹 노이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알샤바브가 아니었죠. 날 깨운 그가 내 입을 막고 말하더군요. ‘에이전트 노이스. 지금부터 코드를 말하겠습니다. 노벰버, 골프, 유니폼, 위스키, 탱고, 양키, 브라보, 호텔.’ Never Give Up. We'll Take You Back to Home. 코드를 듣고서야 그의 얼굴을 보았죠. 좋은 눈을 하고 있다. 그게 그에 대한 첫인상이었습니다. 믿을 수 있는 그런 눈이다.”
도밍게즈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그의 머릿속에 짧은 시간 동안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의 눈빛이 떠올랐다.
“끔찍한 응급조치를 받고, 그가 준 에너지 젤을 먹고,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니 아디스아바바 국립종합병원이더군요. 그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잠들어 있던 사이에 천 킬로미터를 날아왔더군요. 나중에 알았는데, 기절한 날 업고 접선지까지 20km를 걸어왔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금까지 그게 진짜 가능할까 하고 의심해 왔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니까. 하지만 당신들이 해 준 이야기에 비하면, 내 이야기는 차라리 믿을 만하군요.”
에녹 노이스의 말에 도밍게즈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혼자서 푸에르토 카르텔의 본부로 뛰어 들어가 조직원들을 모두 처리하고, 카르텔의 보스인 레니 페레아를 납치해 왔다는 이야기에 비하면, 에녹 노이스에 이야기는 오히려 현실적이다.
도밍게즈도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었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밍게즈는 그 장면을 직접 지켜본 당사자였다.
도밍게즈는 작게 웃음을 짓고는 에녹 노이스의 잔에 럼주를 따라 주면서 말했다.
“열이틀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베네수엘라에 머문 기간이 고작 12일이었죠. 그 12일 동안 그 친구가 우리에게, 베네수엘라에 얼마나 많은 선물을 남겨 주고 갔는지 그 친구는 모를 겁니다.”
도밍게즈 옆에 있던 톨레도 상사도 입을 열었다.
“신세를 졌습니다. 베네수엘라도 그리고 저도. 그분 덕에 딸아이의 탈상을 했습니다.”
에녹 노이스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모두 그 사람에게 갚을 빚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군요. 저번에 그 일이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군요.”
에녹 노이스의 말에 도밍게즈는 자신의 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사실, 조금 궁금하기는 합니다. 그때 우리가 전달한 그 종이에 담겨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떠한 작용을 했는지, 그리고 그 친구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두 사람의 시선이 도밍게즈에게 향했다.
“도움이 되었든, 되지 않았든 상관없이, 그 친구는 분명 하려는 바를 해냈으리라는 것. 그것 하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도밍게즈의 말에, 다른 두 사람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자신들의 잔을 들어 올렸다.
고급 럼이 담긴 3개의 언더락 글라스가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만들어 냈다.
글라스 안에 담긴 럼주가 잔을 따라 일렁거렸다.
* * *
미사한강신도시.
경기도 하남시.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정지혜는 요리에 한창이었다.
양손에 집게와 가위를 들고, 장어를 열심히 굽던 중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한 달 만에 집에 오는 아들을 맞이할 수 없었다.
“다녀왔습니드아아아아아!”
그렇게 시끄러운 인사를 건넨 아들은 가방을 거실에 던져두고, 자신의 몸을 침대로 던졌다.
“가방 던져두지 마. 빨랫감 있으면 뒤집힌 거 있나 확인하고 세탁기에 넣어 두고, 일단 손부터 씻어!”
정지혜가 말했지만, 소파에 엎드린 아들은 들리지도 않는지, 그저 몸을 꼬물거릴 뿐이었다.
“이요한.”
정지혜가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네에~.”
“경고야.”
경고라는 말에, 이요한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와…… 다른 엄마들은 아들 휴가 나오면 막 안아 주고 그런다던데……. 우리 엄마는 너무 냉정해. 냉정해도 너무 냉정해.”
“나도 군대 간 아들이 휴가 나오면 안아 주고 그랬을 거야. 하지만 이요한 씨는 휴가 나온 군인 아들 아니잖아. 여자 친구랑 신나게 논다고, 한 달 만에 집에 온 날라리 대학생이잖아.”
“항상 말하지만, 의대생이 공부할 게 얼마나…….”
“손부터 씻어.”
이요한은 투덜거리며 주방으로 들어와 싱크대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다.
“장어네. 우후후.”
“그놈의 장어. 지겹지도 않니?”
“절대로. 지겨워질 수가 없지.”
그렇게 말하고는 옆에 서서 지글지글 구워지는 장어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삼촌은?”
“요 앞에 슈퍼. 생강 사러.”
“장어에 생강이 빠지면 안 되지. 그럼. 장어는 생강이지.”
이요한은 그렇게 말하고는 잘라 놓은 장어를 손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가 오물거렸다.
정지혜는 그런 아들에게 한마디 하려다, 작게 웃고는 다시 장어에 집중했다.
“엄마.”
“응?”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뭘?”
“슬슬 아버지라고 불러 볼까?”
이요한의 말에, 정지혜의 손이 멈추었다.
“생각해 봤는데, 뭐……. 아버지라고 불러도 괜찮지 않나 싶어서.”
정지혜는 아무런 말 없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친구 놈들도 그러더라고. 아버지라고 불러도 괜찮지 않겠냐. 사실 뭐 삼촌이 어릴 때부터 아버지 역할 해 주었고. 무엇보다도……. 뭐. 아무튼.”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돼.”
“응?”
“엄마 때문에 억지로 그럴 필요 없어.”
“…….”
“너 편할 대로 해.”
“아닌데에. 엄마 때문에 그런 거 아닌데에~.”
이요한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거실로 나아갔다. 그러고는 자신이 던져둔 가방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색하겠지?”
“…….”
“싫어하려나?”
“……싫어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려나…….”
이요한은 그렇게 잠시 생각하다가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안 되겠어. 아우, 생각만 해도 어색하네. 호칭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마음은 이미 가족인데. 그치?”
아들의 말에 정지혜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래. 편하게 생각해.”
“역시 나중에 결정적일 때, 그때 터트려야 되겠어. 장가갈 때. 그때 아버지. 그러는 거지. 그러면……. 삼촌이 막 울고 그럴 거 아냐. 그걸 영상으로 찍어 뒀다가 나중에 두고두고 놀리는 거지. 아니다. 그때 편지를 써서 낭독할까? 아…… 그건 내가 못 참을 것 같은데……. 아무튼, 요 앞에 슈퍼 가셨다고? 마중이나 나가 볼까나.”
가방에서 세탁물을 꺼내던 이요한이 그렇게 말하면서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담배 피우러 가는구나.”
정지혜가 예리하게 지적했다.
“아니야. 담배는 무슨. 삼촌 빨리 보고 싶어서 그런 거지.”
이요한은 어색한 거짓말을 남겨 두고는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정지혜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행복감과 슬픔,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그런 감정이었다.
* * *
한 손에 생강과 맥주가 들어 있는 노란색 장바구니를 들고 걸어오던 박종연은 아파트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이요한을 발견하고 미소를 짓고는 이요한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박종연이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담배를 피우던 이요한은 늦게 박종연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손에 든 담배를 등 뒤로 감추었다.
“됐다. 인마.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너 고등학교 때부터 담배 피우는 거 내가 다 알았구먼.”
박종연에 말에 이요한은 배시시 웃고는 재빨리 박종연에게 다가와 그의 손에 든 장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묵직하네. 생강 사 오시는 거 아니었어요? 유전자 조작된 초대형 생강 사 오셨어요?”
“맥주.”
“크으, 역시. 센스.”
“한 달 만인가.”
“딱 한 달 되었네요.”
“자주 좀 오지. 말은 안 해도 엄마가 섭섭해하는데.”
“말씀드렸다시피, 의대 공부라는 게, 그게…….”
“네에, 네에. 알겠습니다요. 의대생 나으리.”
“아니. 진짠데. 다음에 올 때는 노트라도 들고 오든가 해야지. 억울하네! 진짜로.”
“됐고, 담배나 피우세요.”
이요한은 씩 웃고는 고개를 돌려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나저나. 규호 삼촌은 언제 들어온대요?”
갑작스러운 이요한의 질문에, 박종연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
“모르겠다. 뭐, 언젠가는 들어오겠지.”
“진짜, 규호 삼촌 얼굴 본 지 오래되었어요. 얼굴 까먹겠네.”
이요한의 말에 박종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어릴 때는 엄마랑 규호 삼촌이랑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랬냐.”
“뭐, 그래 봤자 아주 어릴 때 이야기니까. 초등학교, 중학교 때. 사실 그렇잖아요. 삼촌보다 규호 삼촌이 키도 크고, 얼굴도…….”
“키는 몰라도, 얼굴은 아니지.”
“객관적인 평가입니다.”
“시끄러워.”
“아무튼, 그랬어요. 사실 용돈도 규호 삼촌이 훨씬 더 많이 줬거든요.”
“그놈은 한 번에 많이 준 거고, 나는 조금씩 자주 준 거고.”
“뭐 총금액 계산해 보면 비슷비슷할 것 같긴 해요. 역시, 한 방이 중요한 거야. 임팩트 있게.”
“……망할 놈.”
“아무튼, 그랬는데. 뭐. 엄마랑은 규호 삼촌이 어울린다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내가 되어서 마음에 안 든다?”
“아니죠. 참 나. 기자도 아니고, 그렇게 사람 말을 곡해하고 그러면 안 되죠.”
“그럼 뭔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아니, 뭐. 엄마의 짝이라면 몰라도, 나에게 아빠가 된다면 규호 삼촌보다 삼촌이 더 좋겠다……. 뭐 그런 생각도 있었다. 뭐, 그런 이야기죠.”
“…….”
“확실히 규호 삼촌은 아버지 이미지는 아니지. 막내 삼촌, 아니면 나이 차이 나는 큰형? 그런 느낌이지.”
“……나는 아저씨고.”
“그렇죠. 사실.”
박종연은 뭔가 한마디 하려다,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그거 하나는 확실해요.”
“……뭐가.”
“규호 삼촌이든, 삼……촌이든, 가족이라는 거.”
“……그렇냐.”
“규호 삼촌도 그렇게 생각하나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할 거다.”
“그렇겠죠?”
“그래.”
“다행이다. 돈 많은 부자 삼촌은 소중하죠.”
“…….”
“규호 삼촌 한국 들어오면 저한테도 꼭 알려 주세요.”
“부자 삼촌이니까?”
“에이, 아니죠. 그게 아니지. 진짜, 사람을 어떻게 보시고. 그나저나 규호 삼촌은 진짜 언제 오려나. 그 양반 진짜 오기는 오는 거죠? 어디 외국인 숙모 만나서 조국과 가족을 버리고 그러지는 않겠죠?”
박종연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도시의 밤하늘이었지만,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로 초승달이 보였다.
“올 거야.”
박종연이 말했다.
“분명 올 거야. 그 자식은.”
초승달을 바라보며,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해 주었다.